전의 제목으로 10편이나 쓰니 좀 제목을 갈고 싶어서 갈았습니다.
사실 가장 피를 많이 먹은 도시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예의(?)가 아닌거 같아서 말이죠. 크크
죽기는 1차 대전 힌덴부르크선을 둘러싼 전투가 더 많이 죽었지만 여기는 2년 간 긴 전선에서 이루어진
성과(?)이고 스탈린그라드는 몇개월동안의 업적이라서 말이죠.
참고로 이전에 쓴 글 링크 입니다.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ss=on&sc=on&keyword=%EC%97%AD%EC%82%AC%EC%83%81+%EA%B0%80%EC%9E%A5+%EB%A7%8E%EC%9D%80+%ED%94%BC%EB%A5%BC+%EB%B9%A8%EC%95%84+%EB%A8%B9%EC%9D%80+%EB%B0%A9%EC%96%B4%EC%84%A0
(1) 고프의 전략.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고프는 솜므와 아라스의 전훈에 대해 재대로 인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장기간 포격을 무차별로 가해봤자 상대는 그냥 후방 벙커에서 안전하게 몸을 피한 후 포격이 크지면 나와서 반격한다.
- 목표는 반드시 명확해야 한다. 두루뭉술한 목표는 부하들의 혼란 시켜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면에서 작년 솜므는 이런 문제를 고스라니 보여 주었습니다.
수일동안 포탄을 퍼부어 봤자 독일군은 귀신같이 진지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고 헤이그와 고프 같은 영국군 수뇌부는 부하들에게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지 못해 일정부분 성공을 해도 그 후 부하들은 뭘해야 하는 몰랐습니다.
<솜므 전투- 영국 역사 최초로 징집병으로 구성된 통칭 '키치너 아미(당시 영국 전쟁성 장관 키치너 원수의 이름을 딴 별칭
)가 치룬 데뷔전이었습니다만, 사실상 신병 나부랭이가 본질인지라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장군들도 알고 있었지만 단지 정치적
이유와 베르덩에서 프랑스군을 구하기 위해 이 젊은이 들을 그냥 대책 없이 사지로 몰아 넣었습니다. >
총사령관 헤이그의 경우 이런 전훈을 잘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의도는 일단 중부 겔르벨트 고지를 점령하여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중앙의 고지대를 확보하고 점차 북쪽 지역에서 진격하여 독일군이 점령하고 북부 능선에
위치한 마을 파스상달을 함락한다 란 것이었습니다.
대략적인 그림으로는
고프의 5군 =>(2) 파스상달 능선
=> (1) 겔루벨트 고지 아르님의 독일군 4군
플러머의 2군
속도로 아주 점진적으로 점차 독일군의 목일 조인다가 헤이그 원수의 전략이었죠.
하지만 그는 작전 입안 단계에서 스스로 의견을 내놓는 걸 아주 싫어했습니다. 간섭은 사령관의 좋은 덕목이 아니라
고 생각했던 거죠. 문제는 그는 작전이 파멸적으로 흐를 때 전투 지속을 위해서라면 미친듯 간섭해된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런 모습 역시 이번 3차 이프르 전투에서도 나옵니다.
반면 고프는 이런 헤이그의 의중을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헤이그가 메신능선 전투 이후 겔루벨트
고지를 빨리 점령하라고 체근 받은 적이 있었기에 속전 속결로 전투를 끝내는게 헤이그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겔루벨트 고지는 차후 정리하고 파스상달 능선부터 함락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고프의 5군 =>(1) 파스상달 능선
=> (2) 겔루벨트 고지 아르님의 독일군 4군
플러머의 2군
고트의 작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무려 5km. 그것도 잘 방어화된 독일군 참호와 겔루벨트 고지
그리고 파스상달 능선에서 쏘아대는 독일군 포병의 포탄 세례를 버터가며 진격해야 했습니다. (참고로
솜므에서 몇달간 혈투 후 진격거리는 10km 남짓)
고프가 하려는 작전을 스1으로 비교하자면 토스가 테란의 진형을 밀기 위해서 맵 가운데 언덕 공성전차(시즈탱크)
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이 언덕 뒤에 거미지뢰 그리고 그뒤에 벙커 수개가 지키고 있으며 그 뒤에 다시 공성전차가
배치되어 있는 상대 앞마당을 뚫으려는 것과 같았습니다. 광전사-용기병 조합으로 치기 전에 언덕길에서
상당부분 녹을 것이고 그 피해를 감수하고 들어 가도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에 부딪힐 게 뻔했습니다.
(개인적으로 1차 대전은 스1의 테프 라인전을 스2의 병력 회전력으로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플레이어라면 가운데 언덕에 배치된 공성전차 부터 처리하는 맞았는데 말이죠.
(2) 악몽의 시작
작전을 위해 벌어진 포격 역시 솜므의 재판이었습니다. 앨런비나 플러머의 경우 솜므의 전훈 덕에 대규모 포를
장기간 쓰기 보다는 집중적으로 적이 예측못한 타이밍에 주요 목표를 재압한 후 보병을 엄호하기 위해서 썼던 반면
고프는 솜므 처럼 포를 장기간 무차별로 사용하여 상대가 충분히 대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무차별 사격은 독일군을 죽이기 보다는 영국군 진격을 오히려 방해하는 효과를 낳았는데
저지대 플랑드르 지방 도시 답게 이프르 주변은 배수가 안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포탄 구멍이 파이면서
이 구덩이에 물이 차기 시작했고 전장은 진창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3차 이프르 통칭 파스상달로 지칭되는 비와 진흙의 바다의 이미지는 이 포격의 여파 덕이었습니다.
7월 31일 드디어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작전은 조금 성공적이게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게 독일군 4군
참모장 폰 로스베르크 대령의 작전 대로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로스베르크는 땅을 조금 내주고 대신 영국군의 목숨을 대가로 받을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정작 주요 요점 들은 전혀 흔들림 없이 완강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날 오후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면서 영국군의 첫날 공세는 점차 전망이 어두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진창은 정말 심한 진창이 되었고 오히려 독일군은 역습까지 해왔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반격도 난관에 부딪쳤는데 바로 이건 기후 때문이었습니다. 공세 당일 내린 비는 8월 내내
엄청 내렸고 양국군 모두 전투는 불가능했졌습니다. 그리고 이프르 주변도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전장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그냥 땅으로 이동이 불가능해졌고 널판지를 대야 거우 이동이 가능할 정도 진흙이 전장에 가득찼습니다.
방어하는 입장에는 단지 기관총과 포를 이 좁은 널빤지 길에 조준하면 되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다시 영국군은 8월 16일에 공세를 가했지만 전장 한가운데에서 영국군을 다 보고 있는 겔루벨트 고지 덕에 막혔고
헤이그 장군은 더 이상 고프로 답이 없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2달 전에 했어야 하는 결정을 이시기 헤이그는 하게 됩니다. 다시 지휘권을 플러머로 넘기는 것 말이죠.
길 잃은 어린양 님이 쓴 허버트 고프 장군의 인간관계에 대한 글을
덤으로 링크 합니다.
http://panzerbear.blogspot.kr/2007/04/hubert-gough.html
엄밀히 말하면 고프가 안잘린 이유는 그의 파벌 대장이 당시 참모총장 로버트슨이었기 때문이었고
뒤에 잘린 이유는 로버트슨이 이 전투 이후 해임 당하고 반대파 해리 윌슨이 참모총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