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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6/25 21:14:32
Name 두괴즐
Link #1 https://brunch.co.kr/@cisiwing/10
Subject [일반] 집 나간 적 없는 꿈을 찾습니다 下편 (내가 찾은 꿈의 결론은? 또태지)
https://pgr21.com/freedom/99040 (상편)

집 나간 적 없는 꿈을 찾습니다 下편
-신이 보낸 악마의 꿈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고 누가 그랬나? 나의 기도는 수신거부 상태였고, 우주는 침묵했다. 각자의 항성에서 꿈을 내려받은 친구들은 거침없이 제 갈 길을 갔고, 그 덕에 나는 외로웠고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스타크래프트를 했고, 같은 처지의 루저들과 담배 연기 자욱한 PC방을 쏘다녔다.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자니 엄마가 미칠 지경이었다.



드래곤볼을 모아 용신을 부르는 꿈을 꾸곤 했다. 꿈 속에서 물었다. “용신아, 10년 뒤에 내가 뭐 하고 있는지 좀 알려줘!” 하지만 용신은 “넌 누구니? 이쪽 사람은 아닌데?”라는 얼빠진 소리 나 할 따름이었다. 무심한 우주와 얼빠진 용신을 대신하여 이들을 만든 신을 만나보기로 했다.  



우주를 만든 신은 교회에 있다고 했고, 거기에 가보니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속에 있다.” 모르겠다고 하니, 산 기도에 오르자고 했고, 오르니 그곳의 나무와 씨름을 하라고 했다. 씨름은 했으나 뽑을 수는 없었고, 목사님은 그걸 정말 뽑는 건 아니라고 했다. 나도 바보는 아닌지라 다 알고 있다고 답했지만, 알긴 뭘 알까. 성스러운 신자들은 마음으로 나무를 뽑았다고 간증했지만, 나는 마음이 어떻게 나무를 뽑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알 수 없는 상태의 나날을 보내던 2000년의 추석이었다. 나는 사촌형누나와 티브이를 보다가 신이 보낸 천사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서태지였다. 서태지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신이지만, 내게 임한 건 영이었다. 그가 부른 노래는 시공을 초월한 파동이 되어 나의 귀에 흡수됐고, 귀는 곧 마음이 됐다.



서태지의 성도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었고, 나도 거기에 새신자가 되어 합류했다. 그곳의 주류 성도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 개척을 함께 한 이들이었고, 나 같은 새삥은 그리 많지 않았다. 뭣 모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신성모독을 하여, 교회에 염탐을 온 신천지 취급을 받았다. “서태지 음악은 외국에서 이미 유행하고 있는 장르를 수입해온 건데, 새로운 창조자라고 예찬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아니, 아니, 이건 제 주장이라기보다는 서태지 본인도 그렇게 얘기했다니까요?” “지능형 안티라뇨?! 저 신실한 팬입니다!”



아이들 시절의 동료를 잃었던 상처받은 영혼도 많았던 터라, 신앙의 선배들은 예민했다. 내가 선을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적응을 해가고 있는데, 어느 날 목사님께서 문화 특강을 하셨다. 제목은 “서태지는 왜 악마 숭배자인가? 우리는 그와 어떻게 대적할까”였다. 그러니까 ‘서태지는 하나님께서 내게 보낸 천사가 아니었단 말인가?’



목사님은 6집 앨범의 재킷 분석을 시작으로 그의 악마성을 해독하기 시작하셨다. 해독이 되면 될수록 뒤통수가 따가웠는데, 교회 친구들은 내가 서태지 팬이 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의 막바지에서 목사님은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돌린 소리를 들려주셨다. 이것은 서태지가 악마와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를 보여주는 명징한 자료였다. 나는 내가 만난 천사가 루시퍼라는 걸 알게 됐고, 회장 형은 자신도 왕년에는 록 음악에 심취했는데, 회심하고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는 간증을 해주었다.



팬덤에서는 간첩으로, 교회에서는 악숭팬으로 낙인이 찍혔고, 그 때문에 장대한 흑역사가 나의 10대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 흑역사 덕분에 팬덤과 교회에서의 평판과 상관없이 내 마음속 서태지는 견고해졌다. 악마와의 계약서였던 ‘교실이데아’는 심지어 나의 인생노래가 된다. 교회를 때려치웠나고? 전혀. 오히려 임원, 찬양대원, 성가대원, 선교부원, 중등부 교사가 되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자아는 분열적이고, 단일한 정체성은 환상이다.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킨 서태지 정신이 있었으니, 바로 ‘자퇴’였다. ‘꿈을 위해 공교육으로부터 독립한다!’라는 발상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이탈이었다. 방구석 여포는커녕 간손미도 되지 못했던 나는, 키보드도 두드리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교실이데아’는 특별했다.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꾸에엑!!!”(교실이데아)



꿈을 위해 획일화된 공교육 제도와 손절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서태지가 놀라웠다. 놀란 만큼 부러웠고, 그보다 더 부끄러웠다. 알고 보니 나라는 인간은 허접한 키보드 워리어였고, 방구석 여포 옆에 붙어서 조잡한 깃발을 흔들며 불평만 하는 족속이었다. 서태지는 내가 국딩 시절에 이미 예언적 메시지를 전한 바가 있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한 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무엇을 망설이나? 되는 것은 단지 하나뿐인데,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환상 속의 그대)



다른 아이들과 같은 명징한 꿈, 직업으로 명명할 수 있는 그런 꿈은 십 대 시절에 끝내 찾지 못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이 사십을 앞둔 직업인이 됐지만, 사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다만 이제는 꿈이 곧 직업이 아님은 안다. 나도 무수히 많이 등장한 서태지‘들’처럼 ‘미친 마니아’가 되어 ‘밝은 미친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었으나 딱히 그러지는 못했다. 내 인생을 불태울 만한 열정의 매개는 만나지 못한 셈이다. 다만 노래방 18번은 얻었는데, 그것이 바로 ‘교실이데아’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은 그런 나를 섭태지로 불렀다. 내 이름의 마지막 자가 ‘섭’인 탓이다.



그렇게 중졸의 노래에 흠뻑 빠져 살았건만 나는 이후 박사과정까지 밟게 된다. 그러니까 정말이지 인생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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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00:41
수정 아이콘
저는 서태지 세대가 아니지만 제가 기억하는 선에서 거의 최초로 들었던 음악이 서태지 5집이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로 들었는데 그게 아직도 집에 있고 멀쩡히 돌아가더라고요. 어린 나이에도 Take Five를 듣고 너무 노래가 좋아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트랙들의 위엄을 깨닫게 되었지요.
두괴즐
23/06/26 14:14
수정 아이콘
테이크 파이브는 지금 들어도 참 좋아요. 저도 요즘에는 서태지의 덜 알려진 곡들을 더 자주 듣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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