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바이러스로 난리 법석을 떨고 있는 시국에 다들 건강은 잘 보존하고들 계신지요. 제가 살고 있는 지역도 지금 난리입니다. 부디 이 소요가 하루빨리 잦아들기를 바라며 실제 면역 관련해서 현직에서 바쁘게 뛰어다니시는 분들에 대해 무한한 감사와 응원을 보냅니다.
이런 타이밍에 어울리진 않지만 가끔은 빡빡한 글보다는 걍 뜬금 추억팔이글 하나 적어보고자 몇자 적다보니 생각보다는 좀 길어졌습니다.
글의 흐름상 경어는 생략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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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이래도저래도 좋은 이야기
나는 친구가 적다.
몇년전에 유행했던 모 라노벨 제목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원래부터 붙임성이랑은 거리가 멀었고 하물며 성격도 결코 유순한 편이 아니어서 인생에 항상 친구보다 적이 많았다. 금수저나 엄친아였다면 홀로 정신승리라도 시전하겠건만 당연하게도 그런것들이랑 거리가 멀었으니. 애초에 엄친아는 초인싸였으면 인싸였지 아싸가 아니잖아? 고교 3년간 여태껏 연락닿는 놈은 단 한명뿐이고, 군대동기들은 전역즉시 연락이 단절됬으며 대학 4년은 단연컨데 내 인생 최악의 시기중 하나였다. 당연히 재학중에도 졸업후에도 연락하는 지인들은 한손에 꼽는다.
이런 나에게 있어 인생에서 어느정도 비즈니스적으로 이루어진 직장생활을 제외하고 내가 순전히 가장 많은 이 친분을 이제까지 계속 유지하던 시기가 언제냐고 한다면 나는 중학교 시절이었던것같다. 이게 참 오묘한것이 그때도 사실 나라는 인간자체는 별로 다른게 없이 똑같이 음침한데다가 자기주장만 쎈, 지금보다도 훨씬 덜 다듬어진 인간이었고, 중학교시절 전반은 고교시절과 비해 딱히 더 좋을것도 없었지만 이런 나에게 가장 오랫동안 곁에 남아준 이들은 이 시기에 만난 녀석들이었다.
이때 당시 우리들은 대부분 취미가 공통되었고 개중에는 나와달리 꽤 행동력이 있는 녀석들이 있어서 우리끼리 무리지어 다니는것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함께 있을때 그 무엇도 두려울것이 없었다'는 모 영화의 태그라인을 구태여 인용하지 않더라도 하여간 당시 우리는 본인들의 관심사에 있어선 항상 찐텐이었고 진지했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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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감수성이 충만하던 중2년의 겨울.
당시 교내에는 CA (Club Activity)라는 교내 특별활동 수업이 존재했고 이는 대개 기존 커리큘럼대로 교무진이 준비한 방식대로 짜여진 선택지를 우리가 고르는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통은 한달에 한번 정도 야외에서 집결해 수업을 하는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반기를 들고 우리중 옆반 반장을 맡고 있던 범생이 녀석과 예고입시를 앞두고 날마다 미술학원으로 출근하던 그림쟁이놈 이 두명을 주축으로 우리들이 전부 함께 힘을모아 모 마법소년이 주인공인 동명의 소설 및 영화 시리즈에 출연하는 크리쳐와 유사한 외모로 인해 당시 [도비]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던 교내 미술선생을 꼬드겨 이듬해 우리들끼리 새로운 CA를 발족하게 된다.
그 이름하야 [애니메이션 감상부]
이것은 나의 중학교 3학년 전반에 걸친 기억이다.
1. 시작
당시 이 동아리의 활동을 요약하면 교내에 있는 새로 신설된 강당에서 매번 CA시간에 담당교사와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 한편을 상영하고 그 직후 해산. 다음까지 감상문 한편을 써오는 것이 다였다. 명쾌하기 이를데가 없다. 당시 우리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동을 창설했다는 고취감에 더해 보고싶은 애니를 학교강당의 대형 스크린으로 감상할수 있다는 설레임이 한데 뒤섞여 한껏 상기되어있었다. 일단 명색이 정식 CA활동인지라 부장을 뽑아야했다. 이 부활동이 창설되는데 가장 큰 지분을 확보하고 학급 반장 경험도 있는 [야야](별명입니다)가 부장으로 당선되었다. 여기까진 예상대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건 앞으로 볼 상영리스트를 뽑는것.
민주적인 절차를 채택해 각자 보고싶은 작품을 공모하기로 했다.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작품들이 언급됬고 본인이 왜 그 작품을 골랐는지에 대해 간단한 보충설명이 이어졌다. 담당선생인 도비께선 작품선정에 있어서는 일절 관여치 않았다. 아마 본인도 잘 모르는 작품들 이름이 나왔으니 몰라서 신경안썼을 확률이 더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때 한 녀석이 추천한 애니메이션이 인상적이었다. 제목은 우리도 익히 들어본적 있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었는데 그 애니메이션의 극장판이란다. 뭔가 되게 철학적인 내용이 들어가서 작품의 예술성(!)도 제대로 확보된 작품이라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당시 우리중 대부분(나 포함)은 그 애니메이션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본편을 보진 않았다. 주인공 이름, 히로인 이름이 누구더라라고 어디서 들어본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철학적(!)이라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설명은 당시 중학생이었던 우리들의 지적허영심을 제대로 관통하는 멘트였고 기념비적인 우리 애니메이션 감상부의 첫 상영장으로써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나는 이에 근거해 당시 저 작품의 원작을 보지도 않았지만 첫 상영작으로 선정하자는 의견에 강하게 힘을 실었고 나의 바람잡이에 힘입어 여론은 한군데에 모여 해당 애니메이션은 우리 애니메이션 감상부의 첫 상영작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도비 선생
[..그럼 모두의 의견을 취합해서,
다음주 우리가 감상할 애니메이션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으로 하지.]
2.(여기서부터 원작 스포있습니다)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상영회 첫날. 우리의 기대치는 한껏 부풀어올랐다. 야! 우리가 오늘 강당 전세냈어! 니네 애니메이션 이만한 대형 스크린에서 본적있냐? 우와~~~~~
앞서서도 말했지만 당시에 우리는 이 엔드 오브 에바... 정확히는 에반게리온에 대해 알고 있는 애들이 별로 없었다.
당시 우리세대 최고 대세는 건담 시드였다.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당시에도 후쿠다 이 개XX라고 욕이란 욕은 다들어 먹은 작품이지만 시대를 넘어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그 특유의 막장전개는 하여간 시청자를 매혹시키는 농약같은 마력(...)을 지닌 작품이었고 어쨌든 이 애니메이션은 당시 우리들 사이에선 꽤 핫이슈였다. 그래서 난 에반게리온이 건담같은건줄 알았는데 우리 중 일원인 당시 슈로대 경력 10년차에 빛나는 [다우니](별명입니다?)말로도 에바는 슈로대 나온적 있다했다. 그럼 로봇물 맞는거네! 시드같은건가보지?
사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토미노의 손에서 탄생해 이미 수십년에 걸쳐 그 생명을 환하게 태우고 있는 건담이라는 고유명사를 고작 시드(!)같은 작품으로 정의코자하는 시도는 당시 우리들내에서도 어느정도 무리수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이때 나는 로봇 애니메이션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고작해야 시드하나 챙겨보는 정도. 슈로대를 제대로 플레이한것도 이후로 한참 나중의 일이기도하고.
그렇게 기대를 안고 시작한 극장판.
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어떠한 사전설명도 없이 남주가 여주의 슴가를 보고 한차례 폭딸을 치는것으로 오프닝을 장식했다.
약간의 웅성거림과 함께, 이 타이밍에서 대부분은 묘한 당혹감과 동시에 이후 찾아올 뭔지 모를 불안감을 감지했다.
사실 이때라도 좋으니 끊었어야했다.
2.2 XXXX는 말이지..
점입가경이라는게 이때 쓰는 말이던가.
애니메이션의 전개는 그야말로 한치앞을 내다볼수없을정도로 극단을 향해 처음부터 풀악셀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걸보는 대부분은 에반게리온에 대해서 아예 모르는 상태였다는것.
듣도보도 못한 고유명사가 수도없이 남발하고 세컨드 임팩트니 롱기누스의 창이니 제레니 인류보완계획이니 뭐니뭐니뭐니뭐니 우리들은 이미 대부분 방영 개시후 30분 안에 넋이 나갔다. 사실 제목에 엔드가 붙었을때 눈치챘어야됬는데, 이걸 잘 알아보지도 않고 걍 말만듣고 상영작으로 밀었던 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이건 지금까지도 내가 가슴 깊이 파묻혀 있는 나의 원죄다.
중간에 도저히 보다보다 못해 이걸 처음으로 보자고 제의했던 옆자리 친구놈한테 살며시 물어봤다.
[야, 방금 나온거, AT필드? 저게 뭐냐?]
난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의 대답을 잊지 못한다.
[어... AT필드는... 마음의 장벽이지]
당시 상영이 끝나고 정적만이 강당 내에 감돌았고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기에 도비 선생께서 오늘 수업을 마치며 소감을 말하는데 수차례 말을 더듬었었다.
'어... 오늘 본 애니는 되게 철학적인 부분도 많아서... 선생님도 따로 공부를 좀 해야될거 같고...음... 그 뭐냐... 다음에는 이거보다는 좀 가벼운...? 작품으로 골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20년에 걸친 에바혐오는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내 덕질의 역사는 에바빠들과의 투쟁의 역사다.
3.후속작
엔드오브에바 참사를 겪고 난뒤 당시 실시간으로 멘탈이 박살난 우리는 상영작 선정을 처음부터 재고하지 않으면 안됬다.
비록 내가 CA 창설의 개국공신은 아닐지라도 우리들중 내가 CA에 끼칠수 있는 영향력은 꽤 큰편이었기에 여전히 상영작 선정에 대한 비선실세로서의 권력은 나에게 있었다. 부장인 야야녀석도 니가 무난한걸로 고를꺼면 별로 신경안쓰니까 그걸로 정하자고 했다.
당시 멘탈의 케어가 필요했던 나(와 우리들)는 이번에는 철저하게 힐링에 초점을 맞추고 작품을 선정하고자했고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몇편정도가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는데 반응이 영 신통치 못했다. 뭔가 일본애니메이션은 이 시국에는 선정하면 안될것같은 분위기가 당시 흐름상 팽배해 있었다.
딱히 대회 개최지 선정하면서 쿼터 채우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국가의 애니메이션을 고르고자 했고 그러던 차에 내가 당시 통하교시 매번 들르던 비디오/대여점에 얼핏 봤던 명작의 후속작 타이틀이 뇌리를 스쳤다.
'다음시간에 볼 상영작은 라이온킹3로 하시죠'
3.1 이다음에도 스포있습니다.
라이온킹3는 원제는 라이온킹 1과 2분의 1. 한국으로 수입되면서 강제로 3편이라는 넘버링이 붙은 작품인데 뭐 사실 이런 케이스는 여지껏 비일비재했으니.
사실 이 작품은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대로 된 후속편의 스토리를 다룬 2편과는 달리 1편을 티몬과 품바 시점에서 재구성한 일종의 리마스터에 가까웠다. 이 역시 더할나위 없이 좋은 구성이었다. 우리 세대중에 일요일 아침에 방영되는 티몬과 품바 TV시리즈를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거기에 라이온킹이라는 네임밸류만으로도 이미 어느정도 전번에 상영했던 작품보다는 순한맛이라는건 누구도 예상가늠직했다. 그래 이거다. 사바나의 따사로운 서풍만이 에바로 더렵혀진 우리들의 마음을 치유해줄수 있어.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애초에 라이온킹 1편 스토리 모르는 애들이 있을리도 없었고, 그저 무난하게. 유일하게 아쉬운거라면 짧은 러닝타임이었는데.
어쨌든 이것도 [애니메이션 감상부]라는 타이틀이 정식으로 붙은 정식 수업의 일환인지라 아무리 담당선생 재량껏 단축한다해도 어느정도 시간은 채워야되는 상황. 그때 나랑은 직접적인 면식이 없었던 당시 부원중 한명이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제가 가져온 애니메이션 USB로 연결해서 틀어도 되나요?'
사실 수업의 연장을 위해선 다른 수단이 없었고 그렇게 우리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한편 더 감상을 하게 되었다. 그 애니메이션의 제목인즉 R.O.D(Read Or Die) OVA.
솔직히 당시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일본작품은 일부러 제외하는 대국적 합의가 기껏 조성됬는데 그게 깨진것 같아서 당시에는 조금 짜증났던것같은 기분이 들었고 실제로 반응도 그렇게 호의적이진 않았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내용도 눈에 잘 안들어왔었던 기억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닝 테마곡만큼은 확실하게 귀에 잘 박혔는데 해당 OST를 담당한 음악감독이 내 인생 최고의 OVA로 여지껏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바람의 검심 추억편]의 그 OST를 담당한 [이와사키 타쿠]와 동일인임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조금 더 훗날의 이야기였다.
여튼 이번수업도 끝나고 도비선생의 한마디가 더 이어졌다.
'다음에는 한국작품을 하나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해서 다음에 봤던 작품이 [오세암]이다.
4.잘 기억이 안나서 나무위키 참고해가며 적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때는 딱히 기억나는게 없다. 작품 선정권한도 우리쪽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막 맘대로 고를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당시 한국애니메이션 작품 선정하는게 개인적으로 마뜩찮기도 했던것이 여러가지 안좋은 의미로 희대의 문제작이었던 원더풀데이즈가 이 세상에 나온지 1년도 채 지나지않은 시점이었기에 당시 나는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다소 이미지가 안좋았다. 그도 그럴것이 원더풀데이즈 개봉하는 날 친구들과 플스방 2대2 위닝 저녁빵 약속 다 캔슬하고 혼자 극장가서 봤다가 당시 어린 내 시선으로도 어이가 상실하는 플롯에 기를 차다가 끝나고는 지갑까지 잃어버리면서 오열하며 극장에서 집까지 터덜터덜 걸어와야했던 기억이 있기에...
사실 오세암의 경우엔 당시에도 작화를 비롯해서 음악이나 성우 연기등은 흠잡을데 없었는데 여러모로 나온 타이밍이 안좋았다라고 밖에 말할수가 없다. 사실 난 이 뒤로 아치와 씨팍이 나올때까지 한국 애니메이션 안봤다.
아 그리고 이번에도 짧은 러닝타임때문에 빨리 끝나서 또 ROD OVA 를 남는 시간을 채우기 위해 봐야했다. 이번에도 반응은 별로였던것 같다.
5. 충전완료
사실 첫 작품이후 두 작품을 연이어 힐링물로 선정하면서 우리는 다소 매너리즘에 봉착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원한건 이런게 아니었는데... 두번 연이어 힐링했으니 이제 다시 좀 빡센게 필요해. 엔드오브에바때 하도 데여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정확히는 내가)상영시간 내에 온전히 배경지식없이 플롯을 담아낼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것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다.
예컨데 다시 슬슬 우리들 테이스트대로 선정할 필요를 느껴가고 있던 찰나, 도비 선생 역시 다음작품에 관해선 다시금 우리에게 일임한다고 했다. 아싸 그럼 정말 우리 맘대로 골라도 되겠구나.
선정권한이 다시 넘어온 이상 당시 우리의 덕부심을 충족할 물건을 고르는것은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다. 이번엔 다시 빡센걸로 봐야되... 근데 그러다 또 에바꼴 나면 어떡하지? 그렇게 해서 총집편 같은 형식부터 해서 어떻게든 상영시간 내에 볼 수 있는 작품을 고르는데에 주안점을 두고 당시 다음 상영장 후보들을 물색했다.
어느정도 인지도 있는 작품들부터 해서 아직까지 그렇게 직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쭉 돌려보는데, 당시 우리 멤버들끼리 덕력 충만하게 서로에게 자주 읋던 만화대사가 떠올랐다. 그 대사 나오는 그 애니, 극장판 있지 않았던가? 찾아본 결과 제대로 있었다. 심지어 원작 스토리 그대로 가져와서 함축한 극장판이란다. 완벽하다. 바로 이거야!
상영등급이 좀 높아서 신경은 쓰였지만 뭐 제대로된 보호자(도비 센세...)도 있겠다. 상도 탄 명작이라고 하니 문제 없겠지!
그렇게 우리는 다음 상영회에 감상할 작품을 골랐다.
그 이름하야
[북두의 권 세기말 구세주 전설]
5.1 다소 스포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4회차에 선정한 작품은 여러가지 의미로 교내의 전설이 되었다.
해당 원작도 꽤나 과격하고 잔혹한 묘사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해당 극장판은 그야말로 원작이 일반 커피면 TOP 수준의 묘사를 보여줬는데, 정말 시종일관 켄시로의 주먹에 뻥뻥뻥 터져나가는 적들의 참상을 보고 있자니 나중에는 그냥 봐도 풍선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대형스크린으로 펼쳐지는 압도적인 폭력성에 다들 아연실색을 금치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플롯과 특유의 그 쌈마이한 분위기에 모두가 매료되어 다들 집중해서 보고 있는것이 느껴졌는데(엔드 오브 에바때는 그냥 30분부터 다들 말이 없어졌는데 이 작품은 러닝타임 내내 우리들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러닝타임 초반부터 예의 그 대사가 나오기만을 예의주시하며 기대하고 있었다. 나와라 나와라 나온다 나온다.
툭,
퍽,
[お前まえはもう死しんでいる。]
[넌 이미 죽어있다]
으아아아아악ㅠㅜㅠㅜㅠㅜㅠㅜㅠㅜㅠㅜㅠㅣㅟㅏㅏㅠㅜㅏㅣㅠㅣ@#!$@$%#%$#%^*&%$^@#^#%^&
저 대사가 터져 나왔을때 강당의 반응은 보헤미안 랩소디의 그것이나 캡아의 아메리카 아쎔블을 아득히 상회하는 그것이었다. 덕후로써 느낄수 있는 가장 짜릿한 무언가의 쾌감이 날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사실 이 작품은 선정적인 부분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도 워낙에 폭력적이고 고어한 묘사가 많아서 당시에 우리가 단체로 감상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긴 하지만... 넉넉한 러닝타임과 기승전결이 완벽한 구조, 선악에 대한 인과관계가 명확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여실히 그려낸 플롯 등 (결국 신은 켄시로에게 심판받았으니...) 우리에게 어필하기는 충분했고, 당시 우리의 상영회는 중간부터 비때문에 야외 CA활동이 취소된 다른 부원들의 합류로 말그대로 강당안이 풀방을 찍으면서, 싱어롱 공연이상의 열기를 방불케했다. 물론 그에 반비례해서 도비 선생의 표정은 좀 안좋아졌다 (...)
사실 어느정도 한소리 들을 각오는 예상한 바였지만, 당연하게도 도비 선생께서는 '앞으로 이렇게 지나치게 폭력적인 작품은 지양했으면 한다'고 에둘러서 작품 선정에 있어서 교육자로써의 본인의 말씀을 내셨다.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남은 CA 시간은 두번.
중학교 3년의 겨울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6. 고전의 향기
나름 성공적인 상영회였다고 자부한 우리들은 다음 작품 선정에도 열의가 불타올랐고 이번에도 뭔가 작품성있는 원작을 중심으로 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봤으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선생께서 주문이 있으셨으니 너무 자극적이거나 과격한 묘사가 있는 작품은 피하는 방향으로 해서, 이때도 그래서 여러 작품 얘기가 나왔다. 짱구와 포켓몬 극장판 얘기등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뭔가 깔끔하게 묵살당했다. 지금의 나라면 무조건 그걸로 정했을텐데...
당시 우리들 멤버 중엔 애니메이션 DVD를 수집하는 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이따금씩 방과후에 그 친구와 함께 DVD매장 애니메이션 기판대를 둘러보는것은 우리의 주된 취미 중 하나였다. 물론 따로 DVD플레이어를 구비하고 있어서가 아니고 플스2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우리가 몇번이고지나쳤던 DVD케이스중에 사장님께서 특가라며, 아직까지 안나가고 있는 거라 특별가에 양도한다고 말했던 타이틀이 있었다. 분명히 익숙한 이름의 타이틀인데 아직까지 본편을 제대로 본적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이라면 딱 좋을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원작을 접하기 위해 만화책 대여점에서 전권을 정주행했고 과연, 명성에 걸맞는 명작이었다.
이 작품이면 장르도 무난하고, 심하게 폭력적이지도 않아서 모두가 즐길수 있는 명작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 친구를 꼬드겨 그로 하여금 그 DVD를 구입하게 만들었다. 왜 내가 안샀냐면 그때 난 플2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다섯번째 상영작은 [내일의 죠 극장판]
6.1 약~간 스포있습니다.
허리케인 죠. 즉 내일의 죠는 극장판이 총 두편이 존재하는데 이 날 상영된 극장판은 초반부에서부터 중반의 리키이시전까지 이르는 1부 극장판에 해당했다.
기본적으로 스포츠물이고, 묘사가 충격적이거나 자극적인 부분은 많지 않아서 지난번에 상영했던 북두의권 세기말구세주 전설보다는 훨씬 무난한 선정이었다고 자평할만하다.
북두의권 자체도 앞선 상영작들에 비해서는 꽤나 전세대의 애니메이션 영화였지만 내일의 죠의 경우에는 그런 북두의권 세기말구세주 전설보다도 더 이전의 작품이라 고전 애니메이션 특유의 쌈마이한 감성 (당시 제작공정상 필연적으로 발생할수 밖에 없었던 동화 중간중간에 확 튀는 윤곽선, 이따금씩 채도가 안맞고 따로 바래지는 채색 미술효과, 뭔가 부자연스러운 뜬금없는 컷 구성 등등)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었는지라 우리 모두는 그 점에 강하게 매료되었다.
뭔가 상영시간 내내 전체에 걸쳐 하염없이 같이 웃어제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렇게 밝은 내용의 애니메이션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나 1부는 대놓고 베드엔딩으로 마무리 되는 작품이었으니.
근데 아쉬운것은 역시 원작 분량의 문제겠지만, 내일의 죠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마지막의 그 대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우리 모두는 여기에 큰 아쉬움을 표했다. 역시 그 대사는 들었어야 했다라는 의식이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함께 그려졌다.
그렇게 우리는 이날 상영회가 끝난 직후 마지막 상영작을 골랐다.
[우리의 마지막 CA 상영작은 내일의 죠 극장판 2부다]
7. 마지막 수업
그 당시에는 내일의 죠 2부를 연속해서 상영하는데에서 큰 이견이 없었는데, 문제는 마지막 수업 당일에 되서 불만사항들이 언급되었다. 아무래도 똑같은 작품을 연이어 보는건 좀 그렇지 않느냐는 이야기. 그래서 수업 당일에 상영작을 바꾸지 않겠냐는 얘기가 나왔다. 당시에 후보작으로 검토된 작품은 신카이 마코토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하지만 내일의 죠를 향한 나의 의지는 굳건했다. 우리는 죽어도 그 대사를 들어야 한다!고 강하게 피력했다. 이러한 나의 의지(고집)에 결국 상영작은 본래대로 강행되었다. 다른 작품을 제시했던 녀석들의 의견을 무시하게 된 것에 대해선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근데 솔직히 신카이 마코토는 난 지금도 좀 별로야...
같은 작품의 두번째 극장판이었다보니 사실 감정선은 비슷하게 흘러가서, 크게 더 언급할만한 부분은 많지 않았다. 다만 극장판 1부와 2부 사이 TV판 내용의 간극이 꽤 있는 편이라 원작을 접하지 않고 극장판만 1,2부를 연이어 본다면 그 중간부분을 확 건너뛰어버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 그래도 엔드오브에바와는 달리 이건 딱히 배경지식과 관련없어도 보는데 지장은 없는, 본인 테이스트에 취해 무슨 되도않은 이상한 메타포를 미쟝센에 쑤셔넣는 작품은 아니었으니...
8. 졸업
영화 마지막 죠 야부키의 입으로부터 새하얂게 불태웠다는 대사와 함께, 이 수업도, 나의 중학교 생활도 종언을 고했다.
도비선생의 마지막 훈화말씀과 함께, 그렇게 나의 중학교 CA는 끝났다.
우리들은 재밌게도 멤버들이 전부 제각각 다른 고등학교로 배속되어 흝어졌지만 그럼에도 그 중 몇명은 이제까지 온전히 내 곁에 남았다.
그때 그렇게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을 추억코자 이 글을 남긴다.
p.s. 글의 서순에도 언급되어있지만, 정리하자면 제가 부활동을 통해 감상한 작품들은 다음 순서와 같습니다.
1.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2. 라이온킹3 (feat. ROD OVA)
3. 오세암 (feat. ROD OVA)
4. 북두의권 세기말 구세주 전설
5. 내일의죠 극장판 1부
6. 내일의죠 극장판 2부
p.s.2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보통은 싫어하면 아예 관심도 안주지만) 아예 제대로 깔려고 작정하고 깔려면 알고 까자는 마인드로 유일하게 TVA 전편과 신극장판까지 본 유일한 애니메이션이 에반게리온입니다. 물론 한동안은 아예 볼 엄두도 안냈고 저 뒤로 거의 10년쯤 지나서야 봤죠. 그리고 보고 나니 역시 까일만한 작품이다라는 제 믿음이 더 굳건해졌습니다.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크게 과대평가받고 있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임은 자명할겁니다. 독일계츤데레미소녀라는 아성을 구축한 아스카라는 캐릭터와 플래그슈트 디자인만큼은 인정합니다.
애니메이터ㅡ 즉 순전히 기술적인 측면의 그림쟁이로서 안노 히데아키는 꽤 좋아하는데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안노 히데아키는 희대의 거품이 끼어있다고 봅니다. (극단적으로는 표하자면 아예 감독으로써 함량미달로 생각) 개인적으로 거장이란 타이틀이 붙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인물.
p.s.3 저 당시 봤던 작품들에 대한 감정은 고스란히 기억이 남는데 정작 인생작품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암만 추억보정 껴도 막상 지금생각해보니 인생작품까지는 아니었다 느낌...?(특히 저중 하나는 대놓고 증오하고 있으니)
예전에 언급한바 있었던 저 개인의 인생작 리스트는https://pgr21.com/freedom/58105 이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