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12/25 15:54:35
Name 스타슈터
Subject [일반] [11] 난 크리스마스가 싫다. (수정됨)
난 크리스마스가 싫다.

크리스마스를 처음 싫어하게 된 것은 어렸을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일단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이 될 무렵, 난 산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심이 커지자 걷잡을 수 없어졌는지 부모님은 결국 진실을 말해주었고, 그 다음부터 애석하게도 크리스마스 선물은 오지 않았다. 산타가 없어져도 크리스마스 선물은 부모님이 그대로 주는거 아니냐! 라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나에겐 크나큰 핸디캡이 하나 있었으니...

내 생일이 크리스마스와 며칠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

결국 진실을 밝힌 나는 현실의 타협을 마주했다.
"음, 크리스마스 선물이랑 생일선물이랑 합쳐서 더 좋은걸로 사줄께~"

이 말의 뜻은 1+1 = 2 와 같은 원리가 아니라 1+1 > 1 정도라는 것을 처음에는 몰랐다. 그걸 깨달았을 때 즈음, 난 이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나이를 지난 후였다.

커서는 크리스마스가 조금 다르게 보일 줄 알았지만, 사실 별반 차이가 없었다. 솔로 생활만이 계속되던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외출하면 염장을 당하기 딱 좋은 날이 되었고, 그 마음을 이해해주듯 항상 크리스마스에는 풍성한 게임 이벤트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어떤 게임 이벤트를 열심히 했다는 기억이 참 많은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사교활동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고,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파티를 하고 집에 들어가면 어째서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아 게임을 켜서, 한참이고 밤을 새다가 잠에 들곤 했다. 도대체 크리스마스가 누구를 위한 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위한 날은 아니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듯 뭔가 울적해지는 하루하루였다.

그리고 2년 전 오늘, 내 생에 가장 울적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입대 시기를 한참 놓친 나에게 날아든 입영통지서의 입영일자는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날 입대란다. 나중에 들어보니 240명 중 60명 이상이 이 영장에 불응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의미부여 같은걸 하니까 마음이 약해지는게 아닐까?

작년의 오늘, 20대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군대에서 보냈다. 참 신기했던게 그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라는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걸 신경 쓸만한 애들은 이미 휴가를 떠난 상태였고 모두 다 무언가의 분문율을 따르듯이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참 다행이였다. 그리고 눈이 안와서 더 다행이었다. 어려서부터 눈이 오지 않는 곳에 살던 나에게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로망은 존재했지만, 군대에서만큼은 눈이 오지 않는게 최고였다. 제설을 위한 조기기상은 그 어떤 로망도 씹어먹을 정도로 짜증나는 일이다.

착한 아이처럼 살지 못해서 그럴까? 내 크리스마스는 항상 어딘가 쓸쓸한 면이 함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기억에서 지워버린건 아니다. 별로 대단한 기억은 아닐지라도, 전부 기억이 난다. 난 누구보다 크리스마스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싫다고 애착을 버린것은 아니다.

전역한 현재, 난 직장경력이 애매한 경력단절 취준생으로써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기껏 30번의 크리스마스를 거쳐 돌아온 것은 백수 크리스마스. 이거 참. 또 어떤 의미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반면, 정말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백수라서 한가하게 요리도 하고, 크리스마스 겸 생일밥상도 차려보고, 원래라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번 연말에는 참 많이 했다. 난 여전히 크리스마스가 싫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모두가 좋아한다면, 보다 특별한 날로 만들어주고 싶다.

크리스마스 하면 입대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도록, 이 날에 더욱 행복한 일들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0819 [정치] 저출산 대책의 종말 [59] 이그나티우스7198 24/02/01 7198 0
98794 [일반] 부부 둘이서는 아이 하나도 키우기 너무 힘들다. feat. 소아과 오픈런 [109] Hammuzzi12061 23/05/17 12061 26
98432 [일반] '100분토론-출산률0.78의 공포'소감. "근데, 정말 공포는 따로 있는데" [318] 진리는나의빛7081 23/03/15 7081 50
98235 [정치] 외국인 가사도우미 법안이 발의 후 철회, 재발의되었습니다. [74] 계층방정14266 23/03/22 14266 0
97411 [일반] 인터넷 트렌드가 한줌인지 그 이상인지 판단하는 기준 [35] 데브레첸12661 22/12/13 12661 14
97356 [일반] 세종시의 출산율과 한국의 미래 [156] darkhero18572 22/12/08 18572 19
97336 [정치] 한국에 와서 고생이 많은 마이클샌델 [76] darkhero16184 22/12/06 16184 0
97333 [일반] 노동권이 한국사회를 말아먹는 메커니즘(feat 출산율) [148] darkhero16453 22/12/06 16453 36
96671 [정치] 성인지예산 일부 바꾸면 북핵 막는다던 윤 대통령, 2023 성인지예산 20%증액 [148] 카르크로네21698 22/09/25 21698 0
94804 [일반] 인구절벽발 노동인력 부족 우려는 과장인가 [54] 데브레첸16610 22/01/12 16610 71
93546 [일반] 출생률에 대한 두서없는 사견. [117] 벨로린14121 21/09/29 14121 16
93470 [일반] 왜 내가, 그리고 젊은 남성들이 출산율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254] sionatlasia15368 21/09/24 15368 17
93458 [일반] 과연 여성은 정말로 사회적 약자일까? [273] 비온날흙비린내19669 21/09/23 19669 19
92639 [정치] 이낙연, 암 경험 여성 ‘사회복귀 국가책임제’ 발표 [54] 스토리북16807 21/07/23 16807 0
91405 [일반] 경력단절이라는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프레임. [489] 노르웨이고등어30189 21/04/18 30189 72
90867 [정치] 20대 남성을 논할 때 꼭 필요한 질문 [44] 데브레첸17018 21/03/13 17018 0
90289 [정치] 안티질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국 보수의 문제 [104] 데브레첸17212 21/02/03 17212 0
86709 [일반] [일상글] 결혼하고 변해버린 남편 - 집안일 [65] Hammuzzi13832 20/06/13 13832 85
83847 [일반] [11] 난 크리스마스가 싫다. 스타슈터6418 19/12/25 6418 9
83338 [일반] [단상] 저출산과 인구절벽에 대한 개인적 생각 [260] aurelius12699 19/11/06 12699 14
82004 [정치] ‘20대 남성’ 담론은 정치의 문제인가 [140] 유소필위14351 19/07/27 14351 58
81125 [일반] 제조업과 최저임금과 주52시간 근무에 대한 이야기.. [259] Restar13798 19/05/13 13798 46
80306 [일반] 경력단절 이전 20대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가? [331] 대관람차28043 19/03/04 28043 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