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Django unchained)에서, 독일에서 온 현상금 사냥꾼 킹 슐츠는 흑인 노예인 장고를 구출한 후 자유를 준다. 그리고 아내를 구출하길 원하는 장고를 위해 그를 뛰어난 현상금 사냥꾼으로 훈련시킨다. 이후 둘은 비열한 악당 켈빈 캔디가 장고의 아내를 사들였다는 소식을 접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켈빈 캔디는 그야말로 순수한 악당에 가까운 인물이다.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고, 어느 한 쪽이 죽어나가야 끝나는 노예들의 격투를 즐기며, 프랑스 문화를 즐기는 척하나 실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속물이다. 슐츠와 장고는 그의 노예가 된 장고의 아내를 되찾으려고 사기에 가까운 계획을 꾸민다. 그러나 이 속임수는 마지막 순간에 들통이 나 실패하고, 캔디는 경호원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총을 겨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디는 거래에 있어서는 의외로 깔끔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이 자신을 속여 넘기려 한 것을 알았음에도 그가 장고의 아내를 돌려주는 대가로 요구한 것은 슐츠가 원래 격투기 노예의 대금으로 자신에게 지급하기로 했던 일만 이천 달러뿐이었다. 물론 어마어마한 거액이었지만 슐츠가 즉시 돈을 꺼내 지급한 후에도 그의 지갑에는 여전히 돈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진 이후 슐츠는 그를 경멸하고,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캔디는 계약 종료의 뜻으로 악수를 요구한다. 악수는 곧 두 사람이 동등함을 상징하는 행위. 캔디는 악수는 그의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딴 식으로 나를 무시하고 깔보지 마라. 내가 아무리 증오스럽다 해도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라.
캔디 같은 저열한 인간과 악수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슐츠는 거부한다. 그러나 캔디는 악수를 거절한다면 장고의 아내를 넘겨주는 계약도 취소해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중무장한 캔디의 부하들이 곁에서 그를 노려본다. 그 상황에서 잠시 고민하던 슐츠는 결국 숨겨두었던 총을 꺼내 캔디를 사살한다. 그리고 캔디의 부하들에게 죽기 직전에 장고를 돌아보며 유언을 남긴다.
“미안하네.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I'm sorry. I couldn't resist.)”
슐츠는 작중에서 꽤나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고결하지는 않다. 현상범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를 쏴죽이기도 하고, 비록 악인이라 해도 캔디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에 사기를 쳐서 장고의 아내를 되찾으려 한다.
켄디는 어떤가. 그는 부자이고, 악당이며, 비열한 인간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당대의 시대상에서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악당이기도 하다. 흑인이 말에 탔다는 사실만으로도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경악하는 이 시대에서 그는 그저 남들과 별다를 바가 없는, 어쩌면 그저 남들만큼만 저열하고 남들만큼만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면 생각해 보자. 슐츠가 그를 쏴 죽인 건 정당했나? 악수를 요구한 것이 죽을 정도로 거대한 잘못이었나? 그리고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이선균을 찔러 죽인 건 정당했나? 냄새에 얼굴을 찌푸린 것이 그토록 큰 잘못이었나?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선이 있다. 그 선 안에서라면 인간은 대부분의 일들을 감내하고 참으며 살아간다. 그 선은 때로는 개인의 신념이기도 하고 혹은 도덕과 윤리이며 또는 사회의 법과 규정이다. 직장상사의 성질머리가 더러워도 그를 두들겨 패지 않는다. 엿 같은 작자가 진상을 부려도 웃으며 응대한다. 학교에 가기 싫어도 등교는 한다. 과자를 사먹을 돈이 없다고 해서 강도질을 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참는 존재다. 참지 않으면 함께 살 수 없으니까. 그 어떤 것도 참지 않는 인간이라면 이미 어디에선가 뛰어내렸거나 아니면 구속복을 입은 채 정신병동 침대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때때로 선을 넘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에.
그러므로 그들이 죽을 만한 잘못을 했는가? 라는 내 질문은 애초에 틀려먹었다.
이선균은 그저 평범한 인물이다.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도덕적이다. 졸려 죽을 지경인데도 자식의 장난에 맞장구를 쳐 줄 정도로 좋은 아빠고, 휴일에 운전기사를 불러 쓸데없는 일로 부려먹는 진상 고용주이기도 하다. 캔디는 그보다 좀 더 악인 쪽에 치우쳐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무결하게 순수한 악은 아니다.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우리가 고개를 한 번 돌려보면 눈에 보이는 여러 사람 중 하나인.
그들이 죽은 건, 살해당한 건 그들이 악당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의 선을 침범했을 뿐이다. 그 행동 안에 어떤 종류의 악의가 담겨 있었을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죽음을 불러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저 운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던 상대가 최후까지 지키길 원했던 ‘선’을 침범하고 넘어가는 순간, 결국 파국이 태어나고 그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다. 누군가가 지하 밀실에서 혼자서만 살아간다면 누구의 선을 침범할 일도 없고 누군가가 나의 선을 침범할 일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기에 좋든 싫든 간에 그런 일은 벌어진다. 그것도 아주 자주.
하지만 타인이 자신의 선을 넘었다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이 엄청나게 많은 반면, 반대로 내가 타인의 선을 침범했다고 슬퍼하는 자는 거의 없다. 인간은 원래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니까. 그렇기에 결국 그 침범이 자신의 죽음을 불러오게 된 그 최후의 순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왜 죽었는지를. 방금 전까지 인디언 모자를 뒤집어쓰고 같이 놀던 운전기사가 왜 나를 죽이는지, 총에 겨냥당한 채 자신에게 굴복한 상대가 왜 갑자기 죽음을 각오하고 나를 쏘는지 그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가 느끼는 ‘기생충’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세상 혼자 사는 거 아니니까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이 얼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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