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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5/27 22:24:36
Name 글곰
File #1 20190527_140724.jpg (976.8 KB), Download : 57
Subject [일반] [연재] 제주도 보름 살기 - 다섯째 날, 밥-밥-치킨


  밤새도록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바람은 나무를 부러뜨릴 기세로 불어 닥쳤고 창문은 빗방울로 뒤덮여 밖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중에 기사를 찾아보니 호우경보가 발령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깨지 않고 잘 잤다. 한 번 눈을 감으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우리 집안의 유구한 전통은 나를 통해 딸아이에게로 대물림되었다.

  아침 식사는 소시지와 프리카를 곁들인 베이글이었다. 점심 식사는 구운 스팸과 달걀 프라이, 어린잎 샐러드와 김치였다. 어려운 상차림은 아니었다. 오히려 설거지가 더 귀찮을 정도였다. 그러나 제주도까지 와서도 나의 집안일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건 불만이었다. 밥을 먹어야 하니 상을 차려야 하고, 상을 차렸으니 설거지를 해야 한다. 분리수거와 쓰레기는 오히려 더 늘어났고, 아이는 땀을 흘리니 매일 샤워를 시켜야 했다. 나의 일거리는 죄다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늘어나 있었다.  

  그래서 점심을 차리기 전에는 밖에 나가서 밥을 먹자고 했다. 아이는 윈도우 그림판으로 뭔가를 그리는 데 열중하여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후천성 귀차니즘 중독증에 감염되고 만 아내는 소파에 누워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나는 점심을 차렸다. 그래도 아이가 반찬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어 준 덕분에 기분이 약간은 나아졌다.

  매일 상을 차려내는 건 번거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예전에 학교 앞에서 자취할 때, 나는 아침마다 칠백 원짜리 빵을 먹고 점심이면 학생회관에서 그날의 메뉴를 먹은 후 저녁에는 과자를 한 봉지 뜯었다. 상을 차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설거지거리를 아예 만들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세제 사용을 줄이고 물을 절약하는 친환경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딸아이에게는 그럴 수 없어서 나는 매일매일 식단을 고민해야 했다. 똑같은 소시지를 굽더라도 어떤 날은 문어 모양으로 썰고 다른 날은 비스듬히 칼집을 넣는다. 두부를 구워도 계란을 묻히거나 물기를 많이 빼는 등 그때그때 방식을 달리해야 하고, 특히 채소는 아이가 거부하지 않도록 다양한 수단을 써야 한다. 그런 귀찮음을 무릅써야 하는 건 딱히 내가 부지런한 까닭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가 잘 먹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제주도에서도 하고 있다니. 이러려면 왜 제주도까지 온 겨.

      
  오후가 되자 빗방울이 가늘어지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나는 저녁식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고, 그 질문에 절대 저녁밥까지 차리고 싶지는 않다는 나의 강력한 의지와 바람을 투영했다. 아내는 잠시 검색해 보더니 치킨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물론 나로서는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었다.

  숙소에서 삼십분쯤 떨어진 성산에 있다는 닭집의 이름은 문화통닭이었다. 단지 치킨만 사러 그곳까지 가기에는 다소 번거로운 거리였다. 그래서 가는 김에 한화 아쿠아플라넷에 들리기로 했다. 치킨을 사기 위해 수족관에 간다는,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기묘한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이가 있을 경우 수족관은 항상 정답에 가까운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비싸다는 점만 빼면.

  그때껏 우리 가족을 지배하고 있던 게으름의 사슬을 떨치고 일어나 우리는 출발했다. 오전에는 폭풍우가 몰아쳤고 오후에도 날이 여전히 흐렸는지라 사람이 별로 없어서 유유자적한 관람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섣부른 예단이었다. 드넓은 주차장은 허 자 번호판을 단 렌터카들로 그득했고 매표소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래도 마침 시간이 잘 맞아떨어져서 사람과 바다사자와 돌고래의 공연을 보고, 수족관이 문을 닫기 직전까지 관람하다 밖으로 나왔다.

  문화통닭은 인기가 많은 곳이어서 사십 분 전에 미리 전화로 주문을 해 두어야 했다. 닭강정과 똥집튀김을 받아든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삼십 분 동안 나는 내내 초조하고 불안했다. 치킨이 눅눅해질까봐 두려웠던 까닭이었다. 상대론적인 시간으로 일 년 가까이가 흐른 후에야 나는 숙소에 도착했고, 셋이서 치킨에 달려들어서 열심히 먹어치웠다. 아주 맛있다고 감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명 중간 이상은 가는 맛이었다. 배달이 되면 참 좋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 둘과 꼬마 하나는 치킨 두 개를 모두 처리하지 못했고 나는 내가 늙었음을 새삼스레 절감했다. 남자의 젊음은 1인 1닭이 불가능해지는 그 때부터 종말을 맞이하는 법이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자. 덕분에 내일 아침거리가 생긴 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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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muzzi
19/05/27 22:37
수정 아이콘
제주도에서도 줄어들지 않는 집안일이라니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치밥은 진리지요. 치킨만 있다면 살을 발라 치킨 샌드위치, 치킨 덮밥, 치킨볶음밥등 무궁무진하게 변주가 가능하니 치킨은 참으로 훌륭한 음식임은 틀림없습니다.
19/05/29 00:01
수정 아이콘
치밥에는 반대합니다. 치킨은 그 자체로서 완결된 완전식품입니다. 굳이 밥 따위를 덧붙여서 그 완벽함을 깨뜨리는 건 사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풀러맨
19/05/27 22:44
수정 아이콘
아.. 치킨 먹고 싶다.. TV 만 틀면 왜이리 먹는 것만 나오는 지 라고 생각했는데 여행기에서도 먹는 이야기가..
제랄드
19/05/27 22:45
수정 아이콘
역시나 필력이 좋으시니 소소한(?) 일상도 글이 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
제주도, 그리고 치킨 하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네요. 옛날에 올레길 걷기 할 때,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해져서 저녁밥 대신 안주 쌓아놓고 술 마시기 게임을 하다가 걸려서 벌칙으로 무려 치킨 세 마리, 그것도 BBQ 황금올리브를 쏘게 되었습니다. 게스트 하우스 쥔장께서 냉장고에 붙어있던 자석 연락처를 주셔서 전화해 보니 오늘 재료 다 떨어져서 배달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응? 이제 겨우 8시인데 BBQ에 재료가 없다? 신박한 경험이었습니다.
제주도는 원래 그런가 보다, 어쨌든 다행이다, 돈 굳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쥔장이 인근 횟집에 갈치회 8만원 어치를 시키더니 카드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ㅡ,.ㅡ (잊지 않겠다...)
Hammuzzi
19/05/27 22:52
수정 아이콘
(수정됨) 남편 후배가 제주도에서 살고있는데 이마트 조차도 8~9시만되면 (문닫는다고) 식품코너 세일을 한다고합니다. 그래서 왠만한 초밥집 레벨의 이마트 초밥을 싸게먹는다고 자랑한적이 있습니다. 활어 초밥이 이마트가격으로 할인이라니 부럽긴 하더군요.
19/05/29 00:02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일화네요. 하지만 내가 치킨 산다고 했지 언제 갈치회를 산다고 했냐? 라고 주장하며 얼른 도망가셨어야죠.(...)
19/05/27 22:49
수정 아이콘
[남자의 젊음은 1인 1닭이 불가능해지는 그 때부터 종말을 맞이하는 법이다.]

어디 걸어놓고 싶어지는 명문입니다. 전 아직 젊습니다!
19/05/29 00:03
수정 아이콘
아직 젊다고 주장하는 사람치고 정말 젊은 사람 없던데요.
19/05/29 00:33
수정 아이콘
진실은 잘 함부로 말하지 않는 편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ㅠㅠㅠㅠ
Je ne sais quoi
19/05/27 22:51
수정 아이콘
대부분 아는 데 이야기인데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네요
19/05/29 00:03
수정 아이콘
좋은 곳 좀 소개해 주세요. 가보고 싶습니다!
cluefake
19/05/27 23:22
수정 아이콘
으앙, 저는 늙었네요 ㅠㅠ
작년에는 1인1닭 가능했는데 ㅠㅠ
비싼치킨
19/05/28 07:38
수정 아이콘
오늘 아침은 치킨마요! 치킨마요!
19/05/29 00:03
수정 아이콘
1) 닭강정으로 치킨마요를 만드는 건 어렵고
2) 마요네즈가 없습니다...
니나노나
19/05/28 11:22
수정 아이콘
크크크 지루함 없이 잘 읽었습니다!! 특히 치킨이 눅눅해지는 부분에서는 감정이입이 확 되네요.
콩탕망탕
19/05/28 12:56
수정 아이콘
아이가 어린잎 샐러드를 먹는군요. 부럽습니다.
제 아이는 1인 0.5닭은 가능한데, 초록색 이파리만 보면 질겁합니다. 이걸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오랜 고민입니다.
19/05/29 00:04
수정 아이콘
드레싱을 여러 가지로 테스트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저의 딸아이는 과일드레싱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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