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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조조의 최후를 언급하기에 앞서 잠시 위나라의 군권(軍權)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조조는 평생 능력 있는 자들을 중용했습니다. 하지만 군권을 나누어줄 때는 반드시 친족들에게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조조는 자신의 권위가 결국 그 강대한 군사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고, 그랬기에 믿을 수 있는 친족을 중용함으로써 군권을 손에 틀어쥐었습니다.
예컨대 한중 전투를 전후해서 볼 때 서쪽 방면은 한중에 주둔한 하후연이 총괄했고, 그 휘하에 장합이나 서황 같은 우수한 장수들을 배치하여 유비를 견제했습니다. 남쪽은 조인이 총괄했으며 만총이 그를 도왔죠. 손권을 견제하기 위한 동남쪽 방면은 합비에 주둔한 장료가 워낙 유명하고 악진과 이전도 있었지만 총괄은 하후돈이었습니다. 이렇듯 군권을 하후씨를 포함한 친족들에게 나눠준 것이 조위 정권의 특색입니다.
그리고 지난 화에 말씀드렸지요? 오환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들 조창을 북중랑장 행효기장군(효기장군을 대행)으로 임명하여 역시 군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219년에 형주에서 관우가 북상하자 조인은 그를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다급해진 조조는 다시 친족을 골라 군권을 맡기는데 그가 바로 조식이었습니다. 조식은 남중랑장(南中郎將)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이 되어 형 조창과 거의 동일한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후계자로 조비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후환을 없애기 위해 양수를 죽이기까지 한 조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조식에게 일말의 희망을 두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조식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조식은 이 명령을 받들지 못합니다. 왜냐면 술에 떡이 되어 있어서 궁으로 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크게 후회하며 바로 관직을 박탈해 버리죠. 이로서 조식은 최후의 희망마저 잃게 됩니다.
그런데 배송지주에 인용된 위씨춘추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식이 원래 멀쩡했는데, 명령을 받고 가려던 차에 조비가 억지로 술을 퍼먹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조비가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건 사실이 아닐 거라 추측합니다. 당시 전후사정을 따져 보면 조비와 조식은 다른 곳에 있었을 것 같거든요. 양수의 죽음 이후로 모든 걸 포기한 조식이 술독에 빠져 살았기에 일어난 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그렇게 조식은 완벽하게 몰락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서부터 고작 반 년 후인 220년 정월에 위왕 조조는 세상을 떠납니다. 위나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마침 강동의 쥐새끼가 관우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덕분에 남쪽의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조비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에서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죠.
그런데 죽기 직전에 조조가 희한한 조치를 합니다. 당시 조조는 위나라의 수도인 업이 아니라 낙양에 있었죠. 조창은 장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행월기장군으로 여전히 군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조식은 낙양에 있었고, 조비는 위나라의 태자로서 위나라의 수도인 업에 있었습니다. 헌데 조조가 갑작스레 조창을 낙양으로 부른 겁니다. 하지만 조창이 미처 낙양에 다다르기도 전에 조조는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이거 상황이 묘하게 되었죠. 태자이자 후계자인 조비는 젖혀 두고 굳이 조창을 불렀단 말입니다. 더군다나 조조의 곁에는 평생 총애하던 아들 조식이 있었어요. 하지만 조조가 눈을 감았으니 그 의도는 영영 미궁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사자인 조창은 그 일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버님이 나를 불러들이신 건 후계자를 바꾸기 위함이다!’
그래서 조창은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대뜸 묻습니다. “옥새는 어디 있는가?” 물론 그 의도는 누구나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후계자 문제에 개입하겠다는 뜻이었죠. 조조가 아꼈던 아들 중 하나이며 적자(嫡子)인 동시에 군권까지 손에 쥐고 있는 조창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월기장군은 요즘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관에 가까운 직책이었습니다. 그가 마음먹고 군사를 동원하겠다고 한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조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자신을 지지하는 심복과 부하들이 낙양에 여럿 있었습니다. 가규라는 자가 나서서 대꾸하죠. “태자께서 업에 계시니 나라에는 대를 이을 사람이 있습니다. 선왕의 옥새는 군후(君侯)께서 물어보실 일이 아닙니다.” 옥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어쩌면 이미 업으로 향하는 누군가가 품속에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요?
조조의 장례는 사마의와 가규가 주관하게 됩니다. 둘 다 조비를 지지했고, 물론 사마의는 조비의 심복 중 심복이었죠. 이 때 조조의 죽음이 가져다 줄 충격이 두려웠던 여러 관료들이 조조의 죽음을 숨기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규와 사마의는 오히려 조조의 죽음을 널리 알린 후 창고의 식량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의 반란을 막습니다. 그리고 잽싸게, 정말로 잽싸게 조조의 관을 업으로 운구합니다. 조창은 닭 쫓던 개 꼬락서니가 되지요.
게다가 하필이면 이 무렵에, 본래 수춘에 있던 하후돈이 소릉으로 옮겨 주둔합니다. 소릉은 허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손권을 견제하기에는 지나치게 후방이었습니다. 대체 그가 왜 이런 곳까지 온 것일까요? 저는 이걸 하후돈이 조비를 지지하기 위한 군사력의 과시였다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없지만요.
그래도 역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지 조창은 조식을 찾아가 말합니다. “아버님께서 나를 불러들이심은 너를 왕으로 세우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자신이 지지해줄 테니 조식더러 왕이 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무래도 스스로 왕위를 탐내기에는 명분이 너무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차선책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아니면 단지 조식을 이용할 의도였을 수도 있고요.
그러나 조식은 이미 의지를 잃은 후였습니다. 그는 힘없이 대꾸하죠. “아닙니다. 원씨 형제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한때 조조를 훨씬 능가하여 천하에서 제일가는 세력을 구축했던 원소. 그러나 그가 후계자를 확정짓지 않은 채 죽어버린 바람에 그 아들들은 서로 나누어 싸우다가 결국 아버지의 기업을 죄다 말아먹고 맙니다. 조식은 더 이상 조비와 다투지 않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업으로 관을 운구해 간 사마의와 가규는 27일 만에 장례를 치릅니다. 이건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다시피 한 빠른 속도입니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제후의 장례는 사후 5일 만에 빈(殯. 염하여 관에 안치하는 것)한 후 다시 5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도록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27일 만에 끝내버린 겁니다. 낙양에서 업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거의 즉시 장례를 지낸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조조도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고 군을 통솔하는 자들은 부임지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등 장례를 간략하게 하라고 유언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한 단축이었죠. 장례의 주관을 사마의와 가규가 담당했다는 데서 미루어볼 때 이건 자신이 한시바삐 위왕을 물려받기 위한 조비의 의도가 틀림없어 보입니다. 실재로 조비는 가규가 조조의 유해를 운구해 오자 그를 업의 현령으로 승진시키고, 다음 달에 바로 업현이 소속된 위군의 태수로 승진시킴으로서 가규의 조치에 대해 엄청난 보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후돈은 최고 무관직인 대장군에 오릅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 조비는 아우 조식과의 오랜 경쟁을 끝내고 마침내 승상이자 위왕인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했습니다. 완벽한 승리였지요.
이후 남은 건 숙청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