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가리킨 것은 지하철 안의 작은 모니터였다. 출입문 위쪽에 놓인 검정색 모니터 화면 안에선 응급상황 발생 시 필요한 심폐소생술 안내가 한창이었다. 갑작스런 녹내장 발병으로 엄마와 함께 삼성서울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단한 세월은 엄마에게 고혈압과 당뇨, 척추관협착증과 함께 녹내장이라는 합병증마저 안겨주었다. 육십 평생의 삶이 그녀에게 남긴, 빛바랜 훈장이자 멍에였다. 엄마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몸이,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제든 이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듯 했다. 그동안 한 번도 내게 응급처치에 관한 얘기를 꺼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못들은 척 입을 다물고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알겠다고, 내가 배워두겠노라고 대답을 하는 순간에, 정말 그런 일이 우리에게 생길 것만 같은 두려움에 꾹 입술을 물었다.
그날 집에 돌아온 후에 방에서 홀로 심폐소생술 방법을 자세히 검색했다. 응급환자가 심정지로 의식을 잃었을 경우에 4분 이내에 심폐소생술을 실시해야하며, 4분을 넘기면 뇌손상이 진행되고 10분을 넘기면 대부분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심폐소생술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한 듯 까다로웠다. 구급차가 오는 동안에도 119대원과 계속 통화를 하며 침착하게 심폐소생술을 이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글로만 읽어선 통 감이 오질 않았다. 막상 위급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면 무섭고 당황스런 마음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것만 같아 그림과 문구를 여러 번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러던 몇 주 후, 민방위 교육에 참석하라는 엽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직장에 공가를 내고 동네 근처의 주민센터 겸 민방위 교육장을 찾았다. 교육장에 들어서니 교육생들은 복사/붙여넣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심드렁한 표정과 얼굴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교육이 시작되었지만 대부분이 잠을 청하거나 지루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채 폰만 만지작거렸다. 남들처럼 모바일게임이나 하려던 나는 'CPR 교육'이라는 첫강의 주제를 확인하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방관 출신의 전문 강사는 우렁차고 딴딴한 목소리로 심폐소생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심폐소생술 사례와 관련된 동영상을 시청하고 구두 강의를 마친 후에 마지막으로 심폐소생 실습 순서가 찾아왔다. 교육생 중 네명 정도만 무대 위로 불러서 실습을 진행하겠다며 지원자를 찾았다. 교육석에선 으레 그렇듯 다들 눈을 내리깔며 눈치를 살폈다. 나는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의외라는 듯, 의아함 섞인 주변의 조용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내 옆에 있던 고등학교 친구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포함한 두명 정도는 자원을 했고, 나머지 두명은 강사와 눈이 마주쳤다는 죄(?)로 간택을 받았다. 강사에게 선택받은 이들은 세상 억울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혼자 긴장하며 설레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실습을 해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막상 마네킹 모형에 직접 손꿈치를 대고 강사의 구령에 맞춰 심폐소생술을 해보니 1분에 100회 이상 압박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팔꿈치는 나도 모르게 자꾸만 굽혀졌고 금방 숨이 차올랐다. 그래도 내 손에 누군가의 생명이 달려있다는 생각으로 실전처럼 실습에 임했다. CPR 실습이 끝난 후엔 곧바로 자동제세동기 사용 실습이 이어졌다. 뭐 하나라도 놓칠까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세동기를 작동법을 배우고 따라했다. 이런 내 모습을 교육석에서 지켜보던 친구는 재밌다는 듯 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아마 동창들 단톡방에 올리려는 심산 같았다. 친구는 실습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나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웃었지만 나는 한순간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그즈음부터였을까. 엄마랑 매일 저녁마다 산책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이래봤자 집 앞 체육공원을 한 시간 정도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매일 저녁 삼십분에서 한시간정도를 꾸준히 걸으며 혈액순환을 시켜주는 것이 엄마에겐 중요했다. 척추관협착증으로 조금만 오래 걸어도 허리가 내려앉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엄마는 공원 한 바퀴를 돌면 벤치에 앉아 쉬어야 했다. 별 거 아닌 공원 산책에도 통증을 느끼고 힘에 부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내내 마음이 아팠지만 겉으론 모른 척 했다. 오히려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부터 그래?", "딴 생각 말고 부지런히 걸어!"라며 괜한 타박을 하곤 했다. 그냥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위로와 격려보다는 핀잔과 타박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마지막 세 번째 바퀴째에는 야트막한 오르막길 코스가 있었다. 그때마다 말없이 엄마의 허리춤에 손바닥을 대고 뒤에서 밀어주었다.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막상 밀어주면 싫지 않은 눈치였다. 비록 가벼운 산책과 걷기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빠른 걸음으로 그렇게 걷고 나면 집에 돌아올 때쯤엔 몸에서 슬몃 땀이 났다. 나는 그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이상하게도 혼자서 운동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꼭 내가 나서야 같이 따라나섰다. 직장 회식이나 저녁 약속이 있는 날에는 전날에 미리 "내일은 빼먹지 말고 꼭 혼자라도 운동 다녀와."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엄마는 그러지 않는 눈치였다. 엄마는 산책 운동이 좋은 게 아니라, 나랑 걷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솔직히 좀 귀찮을 때가 많았다. 엄마와 밤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일은 좋았지만, 사실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가라앉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많았다. 어떤 날은 컴퓨터도 켜지 않은 채 저녁 나절부터 꼼짝 않고 가만히 방안에 누워있는 날도 있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퇴근 후에 맞는 저녁 한 시간이 내게는 무척 아깝고 귀했다. 일곱시에서 여덟시 사이, 혹은 아홉시에 열시 사이 한 시간이면 이것저것 제법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심해서 저녁 산책 운동을 할 수 없는 날에는 은근히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렇게 피곤하고 귀찮은 마음이 들 때마다 속으로 내게 말했다. 지금은 귀찮아도,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서 되돌아보면 엄마랑 산책하던 이 시간이 가장 그리운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 미련해지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스물넷 어린 나이에 타향으로 시집을 와 남편 뒷바라지와 농사일에 젊은 시절을 바치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시 연고도 없는 대도시로 터전을 옮긴 후에는 식당에서 온몸 부서져라 일을 했다. 쉼표 없는 그녀의 고단한 삶은 친구라는 여유를 허락지 않았다. 친구들과 한가롭게 카페에 앉아 차 한 잔 나누는 여유를, 엄마는 몰랐다. 언젠가 같이 시내를 걷던 중 스벅카드를 충전하기 위해 잠시 스타벅스에 들른 일이 있었다. 잠깐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자 엄마는 왠지 모르게 머뭇거렸다. 커피값도 내지 않고 자리에 맘대로 앉아도 될는지를 몰라 망설이는 눈치였다. 커피숍 문화를 생경해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그녀의 지나온 삶이 보이는 듯 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효도하는 아들 말고, 그냥 친한 친구.
올해 같이 해외여행을 가자는 몇몇 친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올여름 엄마와 함께 가기 위해 얼마 전 베트남 여행을 예약했다. 친구들과의 우정여행이야 내년에, 안되면 내후년에라도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건강한 모습의 엄마와 내가 친구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보다 짧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의 우정여행(?)을 계획하며 이것저것 알아보는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효도한다'는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내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 어떤 의무감 혹은 자식으로서의 도리나 보답이 아니라, 나는 그냥 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 즐겁고 웃음이 났다. 그러니 내가 엄마에게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녀가 내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에서 항상 내가 등 뒤를 밀어주는 것 같아도, 실은 엄마의 존재가 나를 끌어당겨주었다. 그래서 힘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 밀어줄 수 있다. 엄마가 걷기만 해준다면.
그러니까 내 소원은 엄마랑 매일 걷는 일이다. 서로 티격태격 말다툼을 해도 좋고 쓸데없는 타박이나 핀잔을 주고받아도 좋다. 이 사람과 매일 같이 걷는 일이, 내게는 행복이다. 처음 함께 산책을 한 날로부터 어느새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때에 비해 엄마의 몸은 조금 더 안 좋아졌지만, 우리는 더 많이 행복해졌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흘러 언젠가 같이 걸을 수 없게 되는 날이 오게 되더라도, 슬퍼하거나 우울해하기 보다는 웃게 해주고 싶다. 좋은 친구여서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고, 또 얘기 듣고 싶다.
좋은 친구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고.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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