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날 방과 후.
모두가 하교한 텅 빈 교실에서 우리는 삼자대면했다.
종례를 마치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녀석은 주은호의 반으로 향했다.
녀석과 주은호사이에 나는 불필요하게 끼어든 나무가시같아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또 주은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대되기도 했다.
주은호는 본인의 책상에 가지런히 앉아 있었는데, 텅 빈 교실에 혼자 앉아있는 모습이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치 화보를 생생하게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하나, 녀석은 그런 분위기 따윈 신경도 안쓰는 듯 교실에 들어서자 마자 주은호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
"안녕."
녀석의 인사를 가볍게 받은 은호의 시선이 이윽고 나를 향했다.
넌 누구? 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척 아름다웠으나, 한껏 나를 초라하게 하는, 그리고 또 울컥하게하는 표정이었다.
"지후라고 해. 현지후."
나는 애써 마음 속에 달아오르는 감정을 삭히며 말했다.
"내가 불렀어. '우리'가 할 일에 필요한 친구여서."
"아. 그렇구나. 안녕."
이름을 말하는 것 말고 무얼 더 말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
녀석이 재빨리 끼어들어 함께 대면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제야 은호는 의아한 표정을 거두고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줏대없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런 네가 가장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게 뭘까 많이 고민해봤어.
우린 네가 필요했으니까."
"..."
녀석은 적나라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은호의 표정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은호가 일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론은 이래. 너한테 필요한 건 약간의 일탈이야.
남들이 네게 원하는 게 아닌,
네가 좋아하는 뭔가를 해보는거지.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치 사절단 간 외교를 하는 듯한 긴장감에,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스르륵 얼굴을 타고 흘렀다.
"계속해."
은호는 어스름한 새벽 별빛처럼 차분한 눈빛으로 녀석을 주시했다.
녀석은 그런 은호의 눈빛을 담백하게 받아넘기며,
주머니에서 꼬깃하게 구겨진 종이를 꺼내어 책상에 펼쳤다.
"자 이게 네가 필요한 이유야."
그것은 새로운 스타를 찾고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포스터였다.
그것도 무려 공중파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녀석에게 놀라 물었다.
"이걸 나가겠다고?"
"응."
불현듯 녀석이 낮에 은호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기 전, 악기 하나쯤 다룰 줄 아냐고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 오디션을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분명 악기를 못 다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도 했었다.
아, 녀석의 주된 목적은 오디션 자체가 아니었나.
녀석이 바라는 건 오디션이라는 미끼를 바탕으로 주은호와 함께할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하지만 과연 녀석의 미끼를 은호가 덥썩 물까?
솔직히 나로서는 이것이 은호에게 먹음직스러운 미끼인지 아닌지 판단할 깜냥이 없었다.
다만, 은호의 반응을 기다릴 뿐.
"..., 나쁘지 않네."
청신호가 켜졌다.
은호의 반응에 나도 몰래 앗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러나,
"확실히 흥미로운 제안이지만, 굳이 내가 너와 이 오디션을 같이 나가야할 이유가 있을까?"
"..."
은호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심코 넘어갈 법도 하건만, 녀석의 의도를 날카롭운 반문으로 받아쳤다.
잠자코 있는 녀석에게 은호는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나갔다.
"오디션을 통한 일탈? 솔깃해. 아마 내가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 같네."
"..."
"근데 나는 너희가 아니어도 내 친구들과 오디션에 나갈 수 있잖아?"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일리있는 은호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러면서도 학교에서 보여지던 것과는 또 다른 은호의 모습에 놀랐다.
부드러워보이는 평소 이미지와는 달리 이 쪽이 은호의 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네 말이 틀린 건 아냐."
녀석은 은호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포기한 것 같진 않았다.
여전히 확신에 찬 녀석의 표정에서 뭔가가 더 남았음을 직감했다.
"네 말이 맞다고해서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어. 우린 꼭 네가 필요하거든."
"...?"
"오디션인 만큼 네 잘난 외모와 노래 실력이 꼭 필요하거든.
방송국에서도 득달같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겠지."
녀석의 친구인 내가 듣기에도 다소 거북하고, 건방진 말투였다.
물론 녀석이 진심으로 뱉은 말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단지, 주은호를 자극하기 위한 일종의 쇼랄까. 하지만 좀 지나치지 않았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 은호는 그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학교에서 누가 은호에게 이처럼 얘기했었겠는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필요하다면, 좀 더 정중하게 부탁해야하는 거 아냐?"
"정중하게 부탁한다고 해서 네가 혹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난 정말 솔직하게 네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말한 것 뿐이야.
이 부분이 불쾌했다면 사과할게."
허공에서 녀석과 은호의 눈빛이 냉전처럼 따갑게 얽혔다.
"더 말해도 될까?"
"... 그래."
"네 친구들이 아닌 우리와 오디션을 나간다면, 크게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어."
녀석에 비하면 다소 아둔한 나조차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승부처였다.
"하나는 우린 네게 어떤 '모습'을 바라지 않아.
남들에게,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고 선곡할 필요가 없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불러.
두번째는, 적극성에서 차이가 나. 나가고 싶어서 나간 사람이랑, 나가자고 해서
딸려온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지. 기왕할 거면 제대로 해볼 사람이랑 해보는 게 낫지 않아?"
"..."
다시금 정적이 우리를 에워쌌다.
이번 정적은 종전보다 더 길었다.
긴장되긴 했지만, 나쁜 분위기는 아닌 듯 했다.
찌푸려져있던 은호의 미간이 점차 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참동안의 정적 후, 마침내,
"좋아. 네 말 인정할게."
체크메이트와 같은 짜릿함이 손발끝에서 저릿저릿하게 밀려왔다.
이런 방식의 접근법도 있는 건가.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그래서 준비는 어떻게 할 셈이야? 계획은?"
은호의 물음에 녀석이 환하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별 거 있어? 미친 듯이 연습하는거지.
연습실은 이쪽에서 알아볼게, 세부적인 스케쥴은
문자할테니까. 문자 잘 보고, 그럼 오디션까지 잘 부탁해."
녀석과 은호와 나, 우리 셋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5>에 계속.
- - -
죄송합니다.
많이 바빴다고 핑계 대봅니다.
추가로 이번주 수목금은 출장이어서 해당 기간에는 연재가 어려울 듯 하네요.
(그래도 연재 노력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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