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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6/19 15:33:18
Name 글곰
Subject [일반] 기다리다 (수정됨)
  어느 날 나는 놀이터에서 무작정 그 아이를 기다렸다. 지금 나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놀이터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그 아이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으레 그렇듯 개구멍으로 통칭되는 뒷길도 두엇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반드시 놀이터 앞으로 지나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하릴없이 그네를 앞뒤로 움직이면서.

  그 아이의 학교는 나와 같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의 방과 후 일정을 알지 못했다. 하교 후 그 아이가 학원에 다니는지, 친구와 어울려 노는지, 아니면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지 나는 몰랐다. 다만 그 아이가 나보다 먼저 귀가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지레짐작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네에 앉아 무작정 기다렸다.

  추운 초겨울이었다. 쇠사슬로 된 그네 줄이 시려워 종종 손에다 입김을 불어넣었고 바람이 차가워 간혹 몸을 떨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조금씩 녹여 갔다. 아파트 단지 입구로 시선을 향한 채로.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네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두 시간쯤 흐르고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져 올 무렵 나는 그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 아이의 집 앞으로 걸어갔다. 아파트 입구에 서서 그 아이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가 집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었다. 뒷길을 통해 집으로 갔을 수도 있고 아직까지 학원에서 공부중일 수도 있었다. 나는 무엇이 정답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 아이의 집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주머니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렇게 한동안 서 있다가 나는 몸을 돌렸다. 천천히 터벅거리며 귀가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많은 것을 바란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을 뿐이었다. 보았더라면 그뿐이었을 것이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내 얼굴을 감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지나간 후에야 다시 고개를 들어 그 아이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을 것이다. 아직 어렸던 때였다. 순수함이라 할 만한 것도 조금쯤은 남아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정도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나에게는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고 조금 앓았다. 다른 이유로 좀 더 오랫동안 앓아야 했다. 앓음의 끝에서 나는 불현듯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잃어버렸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지나치게 많은 세월이 흐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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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살로문과인
18/06/19 15:46
수정 아이콘
저의 그 아이는 뭘 하고 있을지... 썩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머릿속에 얼굴도 그릴 수가 없네요
가끔 생각나면 이불을 차곤 합니다
18/06/19 15:47
수정 아이콘
역시 글곰님... 기가 막히네요 글이.
잔잔한 여운이 좋습니다.
세인트
18/06/19 16:15
수정 아이콘
지난번에 저글링앞다리님 글과 그 글에 글곰님 댓글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때 댓글의 연장선인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8/06/19 16:40
수정 아이콘
다른 사랑을 만나도 괜찮아~ ♬
22raptor
18/06/19 16:47
수정 아이콘
김민종의 "귀천도애" 가사인가요?
18/06/19 16:56
수정 아이콘
네 맞습니다.
제목이랑 내용이랑도 어울려서요.
22raptor
18/06/19 17:13
수정 아이콘
20년전에 뮤직비디오 보고 혹해서 갔다가 영화보는 내내 한숨만 나왔던 기억이.. 아 노래는 좋았습니다.
서쪽으로가자
18/06/19 17:28
수정 아이콘
그런데 표절 ㅠㅠㅠ
서쪽으로가자
18/06/19 17:28
수정 아이콘
저도 제목보고 바로 이게 떠올랐습니다 흐흐
22raptor
18/06/19 17:48
수정 아이콘
저희가 다들 비슷한 또래인듯 크크
비가오는새벽
18/06/19 17:58
수정 아이콘
오랜 앎음과 세월이 지나 깨달은 잃음..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세바준
18/06/19 19:12
수정 아이콘
나는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조금씩 녹여 갔다. <-요 문장이 좋네요~~
18/06/19 19:58
수정 아이콘
김기림의 <길>이 떠오르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아마데
18/06/20 06:04
수정 아이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글이네요. 달콤씁쓸한 맛이란 이런 거였군요
라됴머리
18/06/20 09:08
수정 아이콘
널 기다리다 문득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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