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얼마 만일까, 떠올려봐도 명확한 답은 구할 수 없었다.
내 생애 가장 많은 추억이 있는 곳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서 있어보고 싶었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1.
"저녁에 잠깐 볼래?"
"왜?"
"그냥."
"그래."
약속은 아주 간단했다. 하굣길에 마주친 그 애가 오늘 보자, 하면 보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정할 필요가 없었다.
"밥은?"
"언니가 없어서 라면 끓여 먹었어."
"안 굶었음 됐지."
그 애는 오늘 보자, 하는 날 저녁 여덟 시쯤이면 우리 집 앞에 와 나를 기다렸다. 나는 그 애가 여덟 시가 되기 전부터 우리 집 앞에 서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시계의 초침 끝을 보면서 여덟 시 하고도 십 초가 더 지나서야 집을 나섰다. 그 애는 내가 꾹꾹 참아낸 그 십 초가 얼마나 길었는지 알았을까.
그 흔한 놀이터도 없는 동네, 가로등도 띄엄띄엄 있는 동네를 그 애와 걷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놀이공원에 있는 기분이었다. 손을 잡지 않아도, 팔짱을 끼지 않아도, 그저 곁에서 가만히 걷기만 해도 즐거워 가슴이 벅찼다.
나를 불러내놓고 별다른 말도 없이 동네를 몇 바퀴고 걷는 그 애의 손을 가끔은, 아니, 사실은 매 순간 잡아 쥐고 싶었지만 그 정도 욕심쯤이야 참을 만했다. 계속 그 아이와 이렇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다.
"보름달이네."
"그렇네."
"좋다."
"보름달이 좋아?"
"최근엔 그래."
"왜? 너 어두운 거 좋아하잖아?"
보름달이 뜨면 네 얼굴이 더 잘 보이니까, 하고 대답하려다가 달빛을 받아 빛나는 그 애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내 마음은 구름이라, 구름이 뜨면 그 사이로 그 아이가 져버릴 것 같아서.
어두운 것만 좋아했던 그때의 나는 달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들어가."
"너 가는 거 보고."
"얼른."
"넌 맨날 너 가는 거 못 보게 하더라."
"나 가는 걸 뭐하러 봐?"
1초라도 더, 네 뒷모습이라도 더 보고 싶으니까. 하고 말했다면 그 앤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아 그 애의 집 앞을 지나가도, 그 애는 늘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바래다주곤 했다. 한 번쯤은 내가 바래다주고 싶다고 몇 번을 졸라도 소용없었다. 그 앤 내가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너야말로 나 들어가는 걸 뭐하러 봤어? 하고 이제라도 물어보고 싶단 생각이 가끔 든다. 대답해주지는 않을 것 같지만.
"불공평하게 왜 맨날 우리 집 앞에서 헤어지는데?"
"뭐가 불공평해."
"불공평해."
"데려다줘도 뭐라고 하냐."
"나도 너 데려다줄래."
"안돼."
"왜?"
"늦었잖아. 위험해."
"넌? 넌 안 위험하고?"
"너보단 덜 위험할 것 같은데."
"그래, 너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고 잘났다."
그 애를 앞에 두고 궁시렁거리며 우리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버텼다. 그 시간마저도 좋았다.
그 애는 한참을 내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을까? 왜였는지 차마 그 애를 올려다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그냥, 조용한 그곳에서 옅게 들리는 그 애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았다.
"알았어. 그럼 요 앞 신호등까지만 데려다줘."
그 애는 내가 생떼를 부릴 때면 결국은 내게 져주었다. 생각해보면, 그 애는 내가 그 애에게 져주는 것보다 더 많이 내게 져줬다.
"그런 게 어딨어. 우리 집에서 신호등은 5분도 안 걸리고, 너희 집은 10분도 더 걸리는데."
"더는 위험해서 안 돼."
너랑 더 있고 싶다고 이 바보야, 하고 솔직히 말했더라면 그 애는 내가 바래다주는 걸 허락해줬을까?
"초록 불이다. 얼른 가."
"너 가는 거 보고."
"불 바뀌겠어. 얼른 건너가."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은 초록 불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얼굴을 찌푸리는 척했지만 내심 몇 분 더 그 애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그 애는 내 옆에서 말없이 불이 바뀌길 기다렸다. 그 애의 옆, 그 자리보다 반발자국 뒤에서 그 애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스치는 바람보다도 빨리 지나갔다. 가끔은 시간의 옷자락을 붙잡아두고 싶었다.
"초록 불이다."
"응. 얼른 가."
"너 먼저 가."
"또 불 바뀌겠어, 얼른 건너가라니까."
"너 가는 거 보고 간다니까."
초록 불이 몇 차례 켜지고 꺼지길 반복하는 동안, 그 애와 나는 사소하지만 양보할 수 없는 실랑이를 했다. 그 애와 함께하는 사소한 모든 것들이 내겐 특별함이었으므로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때 그 애의 얼굴, 표정, 목소리, 말투, 그리고 뛰어대던 내 심장박동, 그 모든 걸.
"알았어. 이번만이야."
"......"
"다음엔 절대 안 돼."
"......"
"모른척 하지 말고."
"몰라."
얼마나 실랑이를 했을까, 그 애는 결국 내게 져줬다. 초록 불이 깜빡이자 그 애가 신호등을 가로질러 뛰었다. 초록 불이 깜빡하고 점멸할 때마다, 그 애가 내게서 한발 두발 멀어질 때마다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그 애는 신호등을 다 건너고선 뒤돌아 나를 보며 얼른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 애의 옆에 선 신호등의 빨간불이 괜히 미웠다. 내게 가라고 손짓하는 그 애를 보는 것이 마음 아팠다. 이유를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다.
"얼른 가라니까!"
반대쪽에서 소리치는 그 애에게 고갯짓을 대충 끄덕거리고는 몇 발짝 걷다가 뒤돌았을 때, 그 애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또 몇 발짝 걷다가 뒤돌았을 때에서야 그 애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거기 서 있었다. 눈물이 났다.
그래, 우리 사이는 이런 거야, 하고 생각했다.
2.
그 신호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신호등 말고는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신호등만은 여전히 서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초록 불이 몇 차례 켜지고 꺼지길 반복하는 동안,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그 애 모습들이 아주 천천히 지나갔다. 신호등 앞에서 몇 번이고 실랑이를 했던 날들, 때론 나를 달래기도 하고 때론 나를 몰아붙이기도 했던 그 아이가 캡처라도 되어있었던 것처럼, 생생히.
있잖아, 그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너와 내가 서 있었을 때, 빨간불에 우리가 가로막혀 있었을 때, 한 번쯤은 미친 척 소리쳐보고 싶었어. 널 좋아한다고. 차 소리에 묻혀 네 귀엔 들리지 않게, 그렇지만 네가 그냥 느낌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그래 보고 싶었어.
그 애와 나 사이는 어떤 사이였을까.
3.
"안 추워?"
"뭐, 별로."
늘 그렇듯이 하굣길에 만난 그 애가 오늘 보자, 하고 나를 불러낸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 애는 춥지 않아 괜찮다는 내게 기어이 제 목도리를 둘러 꽁꽁 싸맸다.
아침마다 목도리를 하고 가라는 어머니에게 목도리 같은 건 답답해서 못한다며 손을 내젓던 나는 거기 없었다.
"어, 정말 온다."
"뭐?"
"눈."
한참을 말없이 걷던 그 애가 손바닥을 펴 내 앞에 내밀었다. 그 애의 손바닥 위에 눈 한 송이가 스며들었다.
"오늘 밤부터 눈 온다더니 정말 오네."
"알고 있었으면 우산 가져오지."
"넌 눈 맞는 거 좋아하잖아."
"넌 싫어하잖아."
그 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교회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건물 처마 아래에 선 그 애는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바닥에 깔더니 그 옆에 앉아서는 점퍼 위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안 추워? 감기들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앉아."
"됐으니까 입어. 난 눈이나 맞을래."
"앉아서 나랑 같이 눈 오는 거나 봐."
그 한마디에 마음은 어찌나 무력하게 녹아내리던지. 그러나 나는 그 애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을 수 없었으므로 스며들 곳이 없었다.
녹아버린 마음이 온몸을 할퀴는 바람 때문에 에렸다.
"추워."
그 애 옆에 놓인 점퍼 위에 앉아 한참 동안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거리, 눈이 쌓이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눈을 잠시 보다가, 옆에 앉은 그 애를 보다가, 하면서 반복하는 동안 욕심이 차곡차곡 쌓였다. 욕심이 소복소복 쌓여가는 심장이 간지러워 한숨을 훅 내쉬었다. 쌓였던 욕심이 흩날렸다.
나도 모르게 그 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녹아내린 마음이 그 애에게 스며들 것 같았다.
"추워?"
사실은 너무 뜨거웠다.
"이제 따듯해."
그 애의 팔에 내 팔을 감았다. 이대로 내 전부가 녹아내린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그 날처럼 따듯한 날에 눈 오는 걸 본 기억이 내 생에 없다.
4.
교회가 있던 건물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교회 옆에 있던 화단은 그럭저럭 예전 모습을 알아볼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그 애와 내가 앉았었던 처마 아래는 바뀌어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 담배를 사서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았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눈 오던 그 날이 선명히 보였다. 그 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까지 몇 번이고 망설이며 멈칫하던 내 모습도.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눈 내리는 풍경도.
그날 밤, 그 애가 낮게 흥얼거렸던 노래를 들으면서, 그 애의 마음을 가늠해보았다.
그 애는 대체 내게 왜 그랬을까.
5.
그 애와 함께 걷던 동네를 천천히 걷는 동안, 박제되어 있던 순간들은 호출되어 다시 선명히 떠올랐다. 마치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껍데기만 남은 박제가 아니라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듯, 거세되었어야 할 것들이 거세되지 않은 채로.
왜 유독 그 시기의 기억들은 감정을 품은 채 각인되어 닳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건지. 여전히 풋내나는 그 시절은 왜 시들기를 거부하고 간직되려 하는 건지.
그 시기의 별 볼 일 없던 외사랑을 떠올리면 왜 아직도 심장이 간지러운 건지. 대체 왜, 유난스럽게도.
마지막까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갈무리된 그 관계는 어떻게 아직도 날 마음 저리게 할 수 있는 건지.
끝끝내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꺼내 보지도 못하고 덮어버린 그 시간은 내게 흉터처럼 남아서, 이렇게 가끔씩 떠올릴 때면,
여전히 심장이 간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