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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6/15 17:38:23
Name 글곰
Subject [일반] 씬 시티 : 정치적 올바름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서 (수정됨)
  그렇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우리가 추구할 만한 미덕에서 또 하나의 싸움거리로 전락해 버린 지금이야말로 씬 시티를 다루기에 좋은 시점이 아닌가. PC와는 천만 광년쯤 떨어진 대척점에 위치한 프랭크 밀러의 이 만화는 쓰레기처럼 더럽고 마약처럼 맛이 간, 그러나 동시에 무척이나 매혹적인 작품이다.

  프랭크 밀러는 1986년, 지금도 배트맨 관련 만화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다크나이트 리턴즈Dark Knight Returns]를 통해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육체적으로 쇠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과거보다 더한 분노와 광기에 휩싸인 배트맨의 존재는 이후 무수한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만화는 대단한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우리의 영웅 배트맨에게서 히어로의 자격을 단숨에 박탈해 버리고, 대신 보다 더 깊이 있고 선악이 불분명한 다크히어로의 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씬 시티Sin City]는 다크나이트 리턴즈쯤은 찜 쪄 먹을 수준이다. 이 만화는 갈 데까지 가 있다. 범죄와 어둠의 온상인 베이신 시티, 일명 죄악의 도시(Sin City)를 무대로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의 활약은 다들 마약을 치사량까지 들이마신 듯하다. 고릴라처럼 강하지만 외모 또한 그런 탓에 평생 여자와는 인연이 없었던 마브는, 금발 미녀가 자신과 하룻밤 자 주었다는 간단명료한 이유로 그녀의 복수를 위해 적들을 때리고 부수고 죽이다 죽기 전에 섹스를 한다. 바람난 아내나 남편의 밀회 장면을 찍어 돈을 버는 전직 사진사 드와이트는 거짓말쟁이 여자에게 반해서 역시 때리고 부수고 죽이고, 그 와중에 겸사겸사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한다. 강한 여자 페티시의 상징처럼 보이는 그녀는 헐벗다시피 한 옷 쪼가리를 걸친 채 자신의 동료인 창녀들을 지휘하여 적들을 때리고 부수고 죽이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일본도를 휘두르는 맛간 여자 암살자는 그녀의 명령에 따라 또다시 때리고 부수고 죽인다. 그리고 은퇴할 때가 다가온 늙은 형사는 십대 소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다 그것마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뒤늦게나마 때리고 부수고 죽인다. 그의 마지막은 자살로 끝났기에 다행이도 그는 자신이 구원하였던 소녀와 섹스를 할 시간이 없었다.

  오. 고작 일곱 권짜리 만화를 지나치게 길게 요약했다. 간단하게 줄이자. 굳이 하드보일드니 느와르니 하는 거창한 단어를 동원할 것까지도 없다. 이건 본질적으로 폭력과 섹스로 점철된 만화다. 화려했던 옛 대본소 시대에 만화방에 가면 성인만화 코너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만화다. 대체로 존재가치가 없는, 장작이 비싸질 때 땔감 대신으로 난로에 처박아도 될 법한 부류의 만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씬 시티는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작가의 역량 덕분이다. 프랭크 밀러는 흰 빛과 검은 어둠만을 사용하여 도시의 어둠과 그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자신의 그림과 그를 통해 창출한 압도적인 분위기를 통해 비현실적인 인물과 사건에 현실성을 부여했다. 아니, 현실성을 부여한 게 아니라 현실성을 ‘강요한’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말도 안 되는 인물들이, 중언부언 떠드는 지리멸렬한 대사와 이해할 수 없는 독백들이, 오직 프랭크 밀러가 만들어 낸 그 압도적인 분위기 하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재조립된다.

  특히 대단한 것은 인물들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누굴 죽일까 고민하는 것만 같은 정신 나간 연놈들이 있다. 섹스와 폭력을 빼면 껍데기조차 남을 것 같지 않는 욕구불만의 화신들이 있다. 서로 말싸움하다 남자가 여자를 두들겨 패고는 5초 후에 서로 격렬하게 키스하는 정신이상자들이 있고 오직 총과 주먹을 통해서만 두 마디 이상의 대화가 가능한 미치광이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놀랍게도 각자의 개성과 매력을 부여받는다. 이것은 창작이란 놈이 해낼 수 있는 어떤 부류의 경지이자 위업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창조라 할 만하다.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잠시 젖혀두고, 독자로 하여금 마치 폭풍처럼 몰아치는 피바람에 머리 끝까지 흠뻑 잠길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초 의도했던 바와는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서 터져나가는 카타르시스의 폭탄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씬 시티는 제정신이 아니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고 돌보아야 할 가족과 친지들이 있는 독자 제현에게는 불쾌감만 잔뜩 가져다주기 십상인 쓰레기다. 그러나, 중요한 건, 쓰레기에도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 시티는 그런 의미에서 최상급의 쓰레기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 쓰레기를 남들에게 추천하겠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결국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실망하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드물지만 간혹 쓰레기더미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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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ise
18/06/15 17:56
수정 아이콘
여담이지만 프랭크밀러가 말이야 많고 여러모로 흑화하기는 했는데 그것보다 요즘 작품자체를 많이 내지 않아 아쉽습니다.
18/06/15 17:58
수정 아이콘
[다크나이트 마스터 레이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야 이미 출판되었겠지만 아직 한국에는 안 들어와서요.
솔직히 기대 30에 걱정 70이긴 합니다만 클클클...
Otherwise
18/06/15 18:06
수정 아이콘
최근 사진을 찾아보니 작품을 내는게 힘들어보이는 모습이라 슬프네요.
foreign worker
18/06/15 17:57
수정 아이콘
PC는 권장할 수는 있지만, 강요되어서는 안되는 거죠.
물론,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차별 요소만 집어넣으면 그건 그것대로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18/06/15 18:00
수정 아이콘
아. 신 시티는 노골적으로 무시합니다.
아예 대 놓고 꼴마초+편견+폭력에의 동경+창녀에 대한 환상+스테레오타입적 인물 등등이 엉망진창으로 뒤범벅된 무서운 혼종이예요.
foreign worker
18/06/15 18:30
수정 아이콘
30년 전에 나와서 무사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나왔으면 무자비하게 씹혔을 듯...
18/06/15 19:12
수정 아이콘
작가가 "괜찮아. 튕겨냈어."를 시전할 양반이라... 크흐.
도큐멘토리
18/06/15 18:03
수정 아이콘
저도 이 작품을 사랑합니다.
영화를 먼저 본 다음 학교 도서관에서 이 만화를 발견했을때 느꼈던 반가움은 지금도 생각나네요.
18/06/15 19:11
수정 아이콘
저도 영화를 먼저 봤죠. 그 영화도 충격적이었는데 원작이 그보다 더 충격적일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영화가 나은 부분도 있긴 해요. 제시카 알....
도큐멘토리
18/06/15 19:38
수정 아이콘
원작 초월 인정합니다 크크크크
18/06/15 18:17
수정 아이콘
영화만 봤는데도 정말 재밌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드립이 아니라 진짜로요. 허세도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더라고요
18/06/15 19:13
수정 아이콘
그렇죠. 그런 면에서 무려 움베르토 에코와도 맥이 닿아 있는 부분이 있죠. 지적허영을 늘어놓으면 그것만으로 엄청난 책이 되는 분....ㅠㅠ
18/06/15 18:29
수정 아이콘
학생 시절 이 작품으로 조별과제를 하는데 이마저도 페미니즘의 영역으로 소구하려 드는 모습을 보고, 페미니즘이 과연 여성[학]인가 여성[주의]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기억이 나네요.
18/06/15 19:14
수정 아이콘
음. 알파걸의 신봉자였나요? 그게 아니면 그런 방향으로 해석하기 어려울 텐데요.
18/06/15 20:56
수정 아이콘
(수정됨) 뭐... 저 사람의 최종심급엔 저게 페미니즘으로 볼만한 영역이 있었나보다하고 짐작만 할 뿐이죠.

자신들의 창녀촌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총기를 들고 일어난 여성들의 행동을 두고 [이것이 바로 여성이기에 해낼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하고 말았어요.


물론 저 위의 언급은 문자 그대로 학문의 영역에서 국한될 때나 그러려니 하는거지, 저 단편적인 기준 하나만으로 다변화된 현실 문제에 접근하겠다 그러면 학을 떼겠지만..
마스터충달
18/06/15 18:46
수정 아이콘
과연 픽션에서 PC가 권장되어야 할까요? 저는 기본적으로는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선⊂미'의 다이어그램을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요즘 논란이 되는 방식으로 PC를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악인이 있어야 영웅이 있죠. 악인의 악행을 PC라는 이름으로 숨기면 그만큼 영웅의 선행도 빛을 잃는 법입니다. 영웅이 여성이거나 흑인이거나 약소민족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백인 남성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강요일 뿐입니다. 작품이 어떤 주제를 말하는가를 봐야지, 표현과 설정마저 PC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근데 저처럼 '진⊂선⊂미'를 믿는 사람에게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미적 쾌감을 선사하는 작품이 <신 시티>라던가 <고로시야 이치> 같은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SM 성향이라 이런 작품을 포르노로 소비하는 것도 아닌데, 왜 눈을 뗄 수 없으며, 책을 접지 못하는 걸까요? 폭력과 섹스의 극한에서 어떤 선함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정말 픽션에는 그딴 게 없는 걸까요? 그럼 왜 <국가의 탄생>이나 <영웅> 같은 파시즘/전체주의 주제를 가진 때깔 좋은 영화를 보며 기분이 나빠지는 걸까요?

이 부분에서 정답을 찾아나가는 게 제가 나아가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공부맨
18/06/15 18:51
수정 아이콘
영화 정말 재밌게봤는데 원작이 잇었군요
Jon Snow
18/06/15 18:58
수정 아이콘
영화도 재밌더라구요 2편은 안나온걸로 합시다
마스터충달
18/06/15 18:59
수정 아이콘
2편이 나왔어요? 금.시.초.문.
18/06/15 19:19
수정 아이콘
2편 같은 거 없습니다. 로버트 로드리게스도 바쁜 사람인데 설마 그런 거 찍을 시간이 있었을라고요.
정휘인
18/06/15 20:28
수정 아이콘
Eva Green..........
wish buRn
18/06/15 22:54
수정 아이콘
유 노우 나띵...
두부과자
18/06/15 23:53
수정 아이콘
그래도 에바그린누님은 인정합시다.
인간흑인대머리남캐
18/06/15 19:09
수정 아이콘
신시티와 정반대되는 설정의 세계가 있죠.. 데몰리션맨이라고... 아무도 불쾌하지 않고 침범당하지않는 세상이란 건 그런데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영화대로 개개인을 24시간 감시하고 처벌하는 거 밖에 없을 듯 싶네요.
Lord Be Goja
18/06/15 19:10
수정 아이콘
(수정됨) 설탕과 고추장 소금등으로 잔뜩 양념한 닭갈비와 그냥 닭가슴살 삶은것중에 건강에는 당연히 닭가슴살이 좋죠.
그런데 살다보면 자극적인 맛을 가진게 먹고 싶을때가 있죠.
그럴땐 건강에 나쁜 양념이 잔뜩 쳐져있어도 닭갈비를 먹는거죠.

그런데 마초스러운 근육맨의 폭력,탱크탑으로 대강 가려둔 가슴골,터질듯한 뒤태,외골수 꼴마초 주인공이라던지,이종족에 마구 휘두르는 폭력
그런 못된 양념쳐진거 먹으려고 갔는데
식당 간판은 그대로고 메뉴도 닭갈비라 안심하고 시켰는데 닭곰탕 주면
닭곰탕 먹어보고 아 이게 더 좋네 할사람도 있지만. 이건 배식에 나오는데? 회사식당에서 나오던건데? 이거 맛없는데? 이게 닭갈비냐?
할 사람도 많을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니가 식품학에 대해서 무지하니까 그런소리를 하는거지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까지 있어요.
그중에 몇명은 심지어 닭도 제대로 못삶아서 비린내도 나고.
18/06/15 19:20
수정 아이콘
(수정됨) 프랭크밀러의 씬시티는 하드보일드와 필름누와르에 대한 만화적 재현을 지향하며 그가 바라던 이상향을 가는데 필요없는 것들은 무시하며 오직 직진만을 한작품이죠.

본인이 어렸을때 6070때 느꼈단 폭력과 섹스를 20세기 후반에 재현할려면 극단으로 가는 만화적 과장이 필요했고 이는 성공했죠.


프랭크밀러가 영화 스피릿에 실패한거보면

결국 씬시티가 가졌단 장점이었단 b급펄프픽션과 필름누와르의 만화적 그리고 현대덕재현이 영화화되면서 스타일이 거세되고 그냥 단순히 복고주의에 그쳤기때문인거같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네요.
18/06/15 20:38
수정 아이콘
정치적 올바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황인종들은 살아남지 못하겠네요
Thursday
18/06/15 20:44
수정 아이콘
영화도 만화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시간 날 때면 그냥 멍하니 틀어놓고 맥주 한 캔 마시면서 보는 영화 중 하나..
MVP포에버
18/06/15 21:17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마지막권을 가장 좋아합니다.
18/06/19 13:52
수정 아이콘
저와는 정반대시네요. 앞서의 에피소드들과는 달리 마지막 권은 지나치게 헐리우드 영웅물 같은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메달 오브 아너를 받은 해군 출신이 정의구현과 사랑을 위해 악당과 싸우다니...... 선악구분이 명료한 그 이야기는 전혀 씬 씨티 같지 않았어요. 하다못해 하티건조차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MVP포에버
18/07/15 14:01
수정 아이콘
하긴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네요
제 경우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 막 죽이는 것도 개의치 않는 저돌성이 씬시티 스럽단 생각이 들어서요 흐흐
18/06/15 21:22
수정 아이콘
영상미 만큼이나 화려한 어휘의 향연으로 가득찬 영화인데
한글자막이 정말이지 너무도 처참한 수준이어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나네요.
기본적으로 각 문장과 중의적 표현, 대사 뒤에 깔린 배경, 심지어 행간까지도 느낌 살려 번역하려면 정말 어려운 영화힐 겁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돌아다니던 자막의 수준은...
보통 이런 경우엔 "에이 걍 자막끄고 볼란다!" 하고 안되는 실력으로 일시정지 해가면서 영문자막으로 보기도 하지만
제 실력에 영문자막으로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표현들이 많아서 그냥 분위기만 느끼면서 봤었네요.
달팽이
18/06/16 10:09
수정 아이콘
300도 프랭크 밀러 작품이죠.....
18/06/19 13:53
수정 아이콘
씬 씨티에도 300의 그 장면을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프랭크 밀러가 그걸 참 인상깊어하긴 했나 봐요.
18/06/17 23:25
수정 아이콘
영화 1편은 남주인공이 이보다 더 좋을수 없다시피한 인물이라 딱이고 이영화 생각하면 전혀 다르지만 분위기가 폭력과 여자, 이상한 놈, 덜 좋은놈, 완전 미친놈이 나오는 la컨피덴셜이 생각났죠.
개인적으로는 영화도 la컨피덴셜이 더 좋고 원작자인 제임스 엘로이를 사랑합니다.
추천하신 만화도 너무 땡기네요. 뭐든지 원작이 중요하니 꼭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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