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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글이기도 하고 상세하게 다룰 건 아니라서, 간략하게 봅니다. 우선 르제프 전역입니다.
전장 지도를 보면서 좀 황당했던 것이, 여기야말로 뒤엉킴의 진수였죠. 언뜻 보면 소련군 혼자 너무 깊숙히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독일군 제9군 역시 삼면에서 공격받는 돌출부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누가 먼저 전선을 정리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는데, 라스푸티차 이후에 선제공격에 나선 건 독일군이었습니다. 소련군이 저렇게 깊숙히 발을 들여놓은 것은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 개시된 소련군의 반격의 결과였는데, 저 성가신 돌출부를 작살내고자 자이들리츠 작전(Unternehmen Seydlitz)을 개시합니다. 특히나 이 후방이 좀 정리가 되어야 독일군의 보급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서 더욱 중요했죠. 이 때 제9군을 맡았던 건 폰 피팅호프(von Vietinghoff)였습니다. 발터 모델이 중상으로 인해 후방에서 치료를 받고 8월 10일에나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이 당시 활약했던 건 독일군 기병이었습니다. 루츠 강 일대에서 기동력이 보장되었기 때문인데, 전차와는 달리 지형에 덜 구애받았기 때문이라는군요. 더구나 비가 엄청나게 내린 때문에 전차의 기동력이 더욱 떨어진 것도 방어선이 상대적으로 빨리 돌파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군요. 아무튼 이 때문에 후방의 소련군 제39군은 말 그대로 갇힌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자료가 좀 엇갈리긴 하는군요... 하여간 이 돌출부 베어내기의 결과로 5천 명이 전사했고, 5만 명이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독일측 자료에 의하면 그 5만 명이 포로가 되었고, 전차를 230대 박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소련의 돌출부가 먼저 정리되고,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와 같이 포위 섬멸당할 운명을 벗어났습니다.
2주 후 이번에는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버리기 위해 대공세를 개시했습니다. 공세 개시 당시 병력 50만. 이게 일명 제1차 르제프-시쵸프카 공세(First Rzhev-Sychovka Offensive)로 불리는 건데... 당시 독일군은 남쪽으로의 공세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 보로네시가 함락된 게 딱 자이들리츠 작전이 마무리된 때였습니다 - 로스토프마저 날려버리면서 당연히 보급의 우선순위는 남쪽에 있었을 테죠. 다시 말하면 가뜩이나 인력 부족에 골골대는 독일군으로서는- 괜히 독일군이 청색 작전을 진행하면서 허약한 동맹군을 방어선에 배치했겠습니까 - 한 번 인력 손실이 일어나면 다시 보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고, 북쪽에서의 공세는 그런 점을 감안했을 때 독일군의 인명 손실을 유도해내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아니, 거둬야 했죠. 그런데...
원래는 8월 말까지로 계획된 공세였는데 성과는커녕 오히려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인명 손실은 그야말로 심각하다 못해 참담한 수준이었습니다. 독일군의 손실도 7만 명으로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지만 소련군의 손실은 그 네 배에 달하는 최소 30만 가량. 양측 모두 심각한 소모전이었지만 얻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작전은 명백한 소련군의 실패였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기가 참 힘들더군요. 러시아 입장에서는 패전의 기록이고, 독일군으로서도 남쪽에 눈이 돌아갔던 때문인지... 하여간 소련군의 여러 실패 중 하나였습니다. 이 공세를 기획했던 게 소련군 최고의 명장 중 둘이었던 주코프, 코네프였다는 게 더 놀랍죠.
10주가 지난 후 토성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이쪽에서도 독일군 제9군을 밀어버리고 아예 스몰렌스크까지 밀어붙이기 위한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화성 작전이죠. 보시다시피 여러 기갑 부대들을 동원하여 제9군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더불어 다방면에서의 협공으로 대응조차 제대로 못 하게 하며 최종적으로 스탈린그라드에 맞먹는 거대한 포위망을 만들겠다는 복선이 깔려 있었는데...
문제는 여기를 방어하던 게 파울루스가 아니라 발터 모델이었다는 겁니다.
마치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했었다는 것마냥 적절한 부대 배분에 이어 교과서적인 기동방어를 손보이면서 소련군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가버렸고, 그나마 바늘구멍처럼 좁은 공격로로 돌진해 들어간 소련군도 곧 박살날 운명에 처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는 역사학자들마다 좀 이야기가 엇갈리는 것으로 압니다. 아무래도 실패한 작전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무튼 이 르제프에서 가을에 한 번 박살났는데 겨울에 또다시 박살나며 주코프가 제대로 체면을 구기고 맙니다.
공세가 개시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별다른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이 전투의 결과로 러시아 측 주장만 해도 최소 20만, 데이비드 글랜츠는 35만을 주장할 정도로 손실이 막심했습니다. 반면 독일군의 손실은 그 1/5인 4~5만 가량. 독일군의 완벽한 방어전 승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남쪽의 전선이 거의 박살난 걸 간신히 하리코프에서 메꿔놓은 마당에 돌출부를 지킨다는 건 무모한 짓이었고, 결국 독일군도 여기에서 발을 빼서 가용 병력을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들소 작전(Unternehmen Büffelbewegung)이었던 겁니다. 어마어마한 수의 소련군이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 상황에서 철수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독일군은 겨우 1만 5천 명의 손실만으로 르제프에서 철수하는 데 성공합니다. 퇴각전을 이토록 적은 손실로 성공한다는 건 전쟁사에 있어서 가히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죠. 퇴각하면서 잔뜩 깔아놓은 지뢰밭으로 인해 추격하던 소련군이 무려 열 배 가까운 손실을 입은 건 덤이었습니다.
이 결과로 엄청난 길이의 전선이 단축되면서, 수십 개 사단이 쿠르스크 전투에 동원될 수 있었습니다. 소련군으로서는 가히 황당하다 못해 치욕적이라 할 수 있는 결과였는데, 어쩐 일인지 독소전쟁을 다룬 책들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고 있어서, 관련 자료를 좀 많이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이렇게 르제프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련군 전체가 발터 모델 단 한 명에게 그야말로 완전히 당해버리면서 끝났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더 북쪽에 있는 일멘 호 인근의 데미얀스크에서도 저렇게 지나치게 돌출되어서 독일군이 박살나기 딱 좋은 상황이었는데, 이 역시 먹잇감이 되기 전에 전선을 축소할 필요성이 생겼죠. 북부 집단군의 사령관인 게오르그 폰 퀴힐러가 히틀러에게 철수를 건의했고, 처음에는 반대하던 히틀러도 무슨 정신이 들었는지 1월 29일에 후퇴를 용인합니다.
그래서 소련군의 공격 자체는 예상되었던지라 성과도 영 지지부진했고, 독일군은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축소합니다. 이후에 일멘 호 바로 남단의 스타라야 루사(Staraya Russa)로 대공세를 펼치지만 성과 없이 격퇴당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으로서도 실패만 했던 전역은 아니었습니다.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을 잇는 중요 거점인 벨리키예 루키(Velikiye Luki)에서 벌어진 전투가 그것입니다. 지도에는 어째 제9군이라고 되어 있는데 실은 저 당시 독일군을 지휘하던 쿠르트 폰 데어 헤발레리에(Kurt von der Chevallerie)의 특임대 - 제59군단 - 가 벨리키예 루키에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 전투는, 말해지길 "북쪽의 소 스탈린그라드(The Little Stalingrd of North)"라고 불립니다. 도시를 지나쳐서 포위한 것과 병력이 포위당한 것, 후퇴가 금지당한 것, 그 과정에서 벌어진 격전 등이 스탈린그라드에서의 그것과 꽤 흡사하기 때문이죠. 이 과정에서 쌍방이 격렬하게 피를 흘렸고, 공격하던 소련군으로서도 독일군의 도시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방어에 많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독일군으로서도 벨리키예 루키의 병력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결국 공세는 돈좌되고 내부 병력은 1월 17일에 항복합니다. 이 벨리키예 루키는 철도 결절점으로서 르제프에 보급을 공급하던 중요 거점이었고, 이게 르제프에서 독일군이 철수를 결정한 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 곳은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의 연락을 직접 잇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더 이상 북부 집단군에서 병력을 빼돌려서 중부 집단군에 붙이거나 그 반대로 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기 매우 어려워졌고, 독일군의 보급 기지인 비텝스크의 후방으로 침투할 수 있는 길이 열려버려서 중부 집단군의 골머리를 더욱 아프게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게 1년 반 이후인 1944년 6월 22일의 소련군의 대공세, 바그라티온 작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죠.
그리고 이 동안 계속해서 레닌그라드 양쪽에서 소련군은 포위망을 풀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으로서는 여기에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결국 견고해 보이던 포위망도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해서...
마침내 1943년 1월 18일에 슐리셀부르크(또는 실리셀부르크, Shlisselburg)가 해방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컸습니다. 더 이상 계절과 호수의 얼음에 의존하는 실낱 같은 보급이 아닌 직통 보급이 가능해지게 된 것입니다. 여전히 폭은 10여 km에 불과했고 따라서 야포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만큼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보급선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겨울의 맹추위에 의존하는 보급과는 차원이 다른 보급길이 열렸다는 것은 분명히 소련군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호재였습니다. 완벽하게 해방되기까지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만...
이상으로 청색 작전의 연재를 마칩니다. 쉽지는 않은 연재였네요. 작년에야 백수라서 시간이 펑펑 남아돌던 터였는데, 회사 다니면서 주말에 연재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저 같은 귀차니스트에게는 특히나 더더욱요. 간단하게 쓱 훑어보는 것만 해도 여러 개의 지도와 위키피디아를 뒤져봐야 하는 터라... 매번 쓰면서도 어떻게 이걸 연재해야 하나,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하나, 이거 그냥 잠수타야 하나 했습니다. 6월 28일에 무슨 마음이 들어서 청색 작전 연재를 시작했는지 참 저도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네요.
그래도 (한 번 펑크내긴 했어도) 어쨌든 주 1회 연재를 하면서 마무리를 지었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는 좀 고무적이네요. 최근에 원고를 쓰던 게 문단이 다 틀어져서 손대기 몹시 난감한 상황이라, 이 김에 그냥 다 때려치워야 하나 고민을 많이 하기도 했거든요. 솔직히 글은 쓰고 싶어서 써야지 글을 쓰기 위해서 쓰면 바로 티가 납니다. 제가 스스로 읽어봐도 그렇고... 소위 말하는 "노잼글", "필력이 떨어지는 글"이 바로 그것이죠. 이번 청색 작전을 연재하면서 유독 심했습니다. 아마도 제 글이 평이한 이유도 - 좋게 말하면 잔잔하게 쓴 거고 나쁘게 말하면 무색무취인 거고 - 그런 이유가 큽니다. 분량도 지난 연재의 절반 가량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썼던 것은, 이전까지 계속 연재를 펑크내다가 드디어 처음 연재를 완료했던 지난 바르바로사 작전 때문이었죠. 연재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는 것을 1회성 이벤트로 끝내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계속 달라붙었던 거죠. 저는 일을 벌려놓는 데는 천재적인데 마무리를 지어본 경험이 별로 없거든요. 어쨌든 이번에도, 원하는 퀄리티도 아니었고 여러 모로 아쉬움 내지는 부족함이라는 게 너무 많이 보이는 결과이기는 합니다만,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거기에 만족합니다. 그동안 몹시 부족했던 제 글을 읽고 반응을 주시고 피드백을 주시고 추천해 주시던 분들께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다음 연재는, 11월에 4주 훈련이 있어서 그게 마무리되고 난 이후에나 새로운 글로 찾아봐야겠네요. 청색 작전을 조사하면서 확인했는데, 바르바로사 작전과 청색 작전 사이의 "공백"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 기간에 있던 일을 연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쿠르스크 전투의 시작이 독소전의 정가운데 정도이니 그 기간의 사건들을 연재하면 독소전의 절반을 다루는 셈이 됩니다. 역시 그 공백을 안 다룰 수는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