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7/05/02 14:11:08
Name 글곰
Subject [일반] 내가 등산을 싫어하는 이유
동생은 산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장롱이나 마당 나무에 기어오르기를 좋아했던 녀석은, 머리가 굵어진 이후로 틈만 나면 산에 올랐다. 처음에는 동네 뒷산으로 시작되었던 등산은 차츰 범위를 넓혀가더니 마침내 전국의 명산은 죄다 오르는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타고나기를 책상물림인 나로서는 그런 동생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발목과 허리를 다쳐가면서, 비지땀을 뚝뚝 흘려가며 산에 오르는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어차피 내려올 산인데 바득바득 정상까지 올라가는 이유 또한 알 수 없었다. 언젠가 동생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자 녀석은 자못 젠체하더니 설교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형. 산이 거기 있기에 나는 산을 오른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

“못 들어봤다.”

그러자 녀석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 한숨을 쉬며 가 버렸다. 괘씸한 녀석.

빡빡한 경쟁률을 뚫고 취업에 성공한 이후에도 녀석의 등산 애호는 줄어들지 않았다. 심지어 직장 안에서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모임도 만든 모양이었다. 남들은 등산 좋아하는 상사를 따라 산에 가는 것이 고역이라던데, 녀석은 오히려 본인이 상사에게 산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들이댔다. 혹시 네 동생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냐며 귀엣말로 묻던 상사의 얼굴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벽이 있다. 그리고 등산이라면 개중 멀쩡하고 평범한 편이 아닌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크게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동생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어 서랍 속에 밀어 넣은 후 잊어버렸다. 항상 업무에 정신없이 바쁜 나로서는 성인이 된 지 오래인 동생의 취미 문제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후회되는 일이다. 그 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면 그런 사고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 때의 나는 녀석이 미래에 저지를 일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동생이 갓 마흔을 넘겼을 때쯤이었다. 그즈음해서 동생의 야근이 부쩍 늘어났다. 직장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맡았다는 것이었다. 평소 딱히 바지런하지 못하던 녀석이 갑자기 한밤중까지 일하다 녹초가 되어 퇴근하고, 다음날 새벽이면 다시 출근하기를 몇 달이나 반복했다. 그러더니 상 맞은편에 앉아 자못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자기 능력을 인정받아서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노라고. 나는 진심으로 기뻐했다-그 때는.

녀석의 임무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목책을 치고 좁은 길목에서 적의 진로를 막는 일이었다. 아주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신묘한 계책이나 놀라운 계략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저 승상이 시키는 대로 목책에 의지해 방어에만 전념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길목을 지키는 대신 산에 올랐다.
  
녀석은 대패했고 벌을 받아 목숨이 달아났다. 몇 년 만에 나를 만나러 온 녀석의 목 위에는 머리가 없었다. 녀석은 잘려나간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 꼬락서니를 마주한 순간 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마속 이 미친놈아! 거기서 왜 산을 올라!”

녀석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발을 구르고 짜증을 내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망할 놈의 등산 때문에 큰일이 날 줄 알았다.”

녀석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허공만 쳐다보았다. 승상의 꿈이, 제갈 형님 평생의 숙원이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꿈을 무너뜨리고 박살내어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의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빌어먹을.

한참 후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대체 왜 산에 올랐냐?”

녀석이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곳에 산이 있어서......”

이것이 내가 등산을 싫어하는 이유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최종병기캐리어
17/05/02 14:14
수정 아이콘
가정의 달에 걸맞는 글이네요
17/05/02 14:14
수정 아이콘
본격 가정의 달 특선 명작동화입니다.
17/05/02 14:14
수정 아이콘
마량님?
종이인간
17/05/02 14:14
수정 아이콘
(왈칵)
설명충등판
17/05/02 14:15
수정 아이콘
가정의 달이 왔습니다 여러분...
17/05/02 14:34
수정 아이콘
이 댓글.... 닉네임과 참으로 잘 어우러지는군요.
17/05/02 14:15
수정 아이콘
진지하게 읽다가 [녀석의 임무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부터 폭소를 참을 수가 없었네요 크크크크
새벽포도
17/05/02 16:11
수정 아이콘
거기까지 읽으면서도 저는 가정이 생기면서 가장의 책임감 때문에 좋아하는 등산도 못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네요 크크
동굴곰
17/05/02 14:16
수정 아이콘
눈썹 하얀분...?
17/05/02 14:19
수정 아이콘
마량이 먼저 죽지않았나요? 이릉대전때...
srwmania
17/05/02 14:21
수정 아이콘
그래서 몇년만에 만나러 온 거죠. 머리통 옆에 끼고 (...)
바스티온
17/05/02 14:21
수정 아이콘
하늘나라에서 만났겠죠..
17/05/02 14:34
수정 아이콘
5형제 였던걸로 기억 합니다. 마속이 막내고...
17/05/02 14:36
수정 아이콘
제갈형님이라길래 마량인가 싶어서요.
윗분들 말처럼 저 세상에서 만났다면 말되네요...
17/05/02 14:41
수정 아이콘
설명충 등판하자면 마량 맞습니다. 제갈량을 존형이라고 불렀고...... 저 세상에서 만난 거죠. 중간에 '상 맞은편'은 제삿상입니다.
마스터충달
17/05/02 14:19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 바보 동생니뮤.ㅠ
바보미
17/05/02 14:21
수정 아이콘
중간부터 눈치채고 웃음을 참지 못했네요
더스번 칼파랑
17/05/02 14:21
수정 아이콘
뭐 마씨형제도 5형제였으니..
데오늬
17/05/02 14:22
수정 아이콘
아이 진짜 진지하게 읽고 있었는데 --^
아칼리
17/05/02 14:27
수정 아이콘
명문은 닥추입니다.
17/05/02 14:31
수정 아이콘
왈칵 ㅠㅠ
빠독이
17/05/02 14:33
수정 아이콘
아 이 세상에 창잉력이 넘쳐나 ㅠㅠ
17/05/02 14:40
수정 아이콘
아놔 크크크크킄크
동전산거
17/05/02 15:06
수정 아이콘
아무생각 없이 읽었다가 댓글보고 '응? 뭐지?' 하고 다시 읽어봤는데 와...
지나가다...
17/05/02 15:08
수정 아이콘
조금 읽다가 눈치는 챘지만, 명문입니다. 크크크
17/05/02 15:09
수정 아이콘
ㅠㅠb 추천합니다!
달토끼
17/05/02 15:11
수정 아이콘
마량이다 마량~!!
aDayInTheLife
17/05/02 15:14
수정 아이콘
순수히 산을 사랑하기에 산을 오르신 마속니뮤...
17/05/02 15:26
수정 아이콘
아닙니다. 마속은 사랑 같은 감정적인 이유로 산을 오르지 않았습니다. 마속의 등산은 그의 존재이유, 이른바 레종 데트르입니다. 마속이 산을 본 순간부터 그가 산을 오를 것은 운명지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체홉이 말했지요. 총이 나오면 그 총은 발사되어야 한다. 마찬가지입니다. 산의 존재로 인해 마속은 산을 올라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마속이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그는 산을 올라야 했습니다. 그 또한 인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은 거대한 운명 앞에서 어쩔 수 없는 필연론적 존재였던 것입니다.

(......내가 뭘 쓴 거지?)
aDayInTheLife
17/05/02 15:49
수정 아이콘
무릎을 탁치고 갑니다...
종이인간
17/05/02 15:50
수정 아이콘
제가 지금 뭘본거죠 ? 크크크크크
언어물리
17/05/02 15:15
수정 아이콘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촉한도 무너지고..
바스테트
17/05/02 15:27
수정 아이콘
아 안그래도 등산 싫어하는 이유는 마속때문이죠라고 댓글달려고 왔는데....크크
17/05/02 15:31
수정 아이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임무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구절을 읽고 글쓴이를 확인해봤습니다. 크크.
17/05/02 15:32
수정 아이콘
하얀눈썹아조씨의 눈물
은하관제
17/05/02 15:32
수정 아이콘
동생분이 계셨나 하고 잠깐 고민했습니다.... 크크크크 제목이 너무 담백해서 생활문인줄 알았네요
하늘하늘
17/05/02 15:36
수정 아이콘
내 감동 어쩔꼬야!!
YORDLE ONE
17/05/02 15:37
수정 아이콘
아니 생활문인줄 알았잖아요.....ㅠㅠ
R.Oswalt
17/05/02 15:40
수정 아이콘
가정을 지키는 것까지는 등산하다 과로사한 가장의 눈물겨운 이야기인 줄 알았잖아요 크크크
아, 근데 하얀눈썹 아재... 아재도 상사말만 듣다가 목은 커녕 몸통마저 잃어버렸... ㅠㅠ
하우두유두
17/05/02 15:54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 이런글 너무 좋아요
윌로우
17/05/02 16:10
수정 아이콘
유게로 옮겨야 합니다!?
새벽포도
17/05/02 16:15
수정 아이콘
마속 등산에 대한 재평가 글이 올라올 때 됐는데 여전히 때마다 고통받는 마속...
'마속이 산을 오른 이유에 대해 논하시오' 같은 주제로 글짓기 대회 같은 거라도 열렸으면 좋겠네요.
17/05/02 17:19
수정 아이콘
재평가의 여지는 없습니다. (단호)
17/05/02 16:27
수정 아이콘
1. 가정의달이라 요즘 마속이 자주 등장
2. 글쓴이가 '글곰'님
3. 주제가 등산
'이거 또 마속 이야기 아닌가?' 싶은 생각을 가지고 읽어서 안낚였습니다!

로그인을 잘 안하는편이라 댓글은 자주 못남기지만 좋은글 잘보고 있습니다.
17/05/02 16:33
수정 아이콘
중간 부터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크크크크크크
무더니
17/05/02 16:39
수정 아이콘
이쯤해서 가정의달 드립 링크걸어주실 친절한분을 구합니다.
에위니아
17/05/02 16:52
수정 아이콘
17/05/02 17:38
수정 아이콘
되도않는 실드를 하나 치자면.. 가정에 장합이 아닌 허접한 장수가 지휘관으로 왔으면 어쨌을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물론 그런 중요한곳이니 장합같은 명장이 왔겠지만서도)
17/05/02 18:07
수정 아이콘
예상하고 읽다가 역시나 하면서 키보드를 탁 치고 갑니다.
17/05/02 20:14
수정 아이콘
한번의 실수(!?)로 대체 얼마 동안이나 까이는건지 크크크
17/05/03 02:35
수정 아이콘
아 이건 글쓰기 천재 인정합니다.
미네랄배달
17/05/03 09:39
수정 아이콘
추게 가야죠~
17/05/03 17:13
수정 아이콘
명문입니다 크크크크 잘 읽었습니다.
17/05/04 09:28
수정 아이콘
끝까지 다 읽고도 등산하다 실족사한 동생이 있었구나 생각했습니다. 댓글 보고 알았네요;;
할러퀸
17/05/05 16:41
수정 아이콘
저는 왜이리 마음이 아플까요.ㅜㅜ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1649 [일반]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호기심 천국' [22] 신불해11454 17/05/03 11454 28
71648 [일반] 조지 오웰 [동물 농장] [1] 솔빈3337 17/05/03 3337 1
71647 [일반] 조지 오웰[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1] 솔빈3596 17/05/03 3596 0
71646 [일반] 서초패왕 항우에 대해 고금의 시인들이 내린 평가 [14] 신불해11534 17/05/03 11534 2
71645 [일반] 현대 한국을 만든 위대한 위인, 인정하십니까? [74] 삭제됨11030 17/05/02 11030 0
71644 [일반] [모난 조각] 13주차 주제 "오마주" 마스터충달2907 17/05/02 2907 0
71643 [일반] 가오갤1, 2편 관람하신 분들 베이비 그루트 피규어 받아가세요 [23] 빵pro점쟁이8233 17/05/02 8233 0
71642 [일반] 한국/미국 관객들이 근 몇년간 임팩트 최고로 꼽는 영화 속 등장 장면.swf [31] Ensis11861 17/05/02 11861 2
71641 [일반] 내가 등산을 싫어하는 이유 [55] 글곰14746 17/05/02 14746 62
71640 [일반] 정부는 사드 비용 청구 가능성을 이미 통보받았었다. [94] SkyClouD12413 17/05/02 12413 0
71639 [일반] 항생제의 역사 [64] 솔빈11988 17/05/02 11988 49
71638 [일반] 삼성중공업 사고.. 현장에 있던 제 동생이 거의 혼이 나갔네요. [64] 파란무테18854 17/05/01 18854 42
71637 [일반] 왕따라는거 솔직히 100%가해자가 잘못이죠 [85] 사쿠라기루카와14303 17/05/01 14303 6
71636 [일반] 근로자의 날이 아닌 노동절. [31] 와인하우스10502 17/05/01 10502 16
71635 [일반] [징기스칸4] 코에이의 의외의 고증? [7] 선비욜롱7756 17/05/01 7756 3
71633 [일반] [링크] 동성결혼 합법화 찬반 비율 / 기계적 민주주의의 문제 [6] 동아중공업4667 17/05/01 4667 0
71632 [일반] 동성애 - 따로, 또 같이. [15] 사악군6773 17/05/01 6773 5
71631 [일반] 이마트 과자이벤트 후기.. [49] 대장햄토리14230 17/05/01 14230 8
71630 [일반] 독후감, 소설 마션 [25] 솔빈7560 17/04/30 7560 2
71629 [일반] 스머프 : 비밀의 숲 더빙판 감상문 [2] 말랑5499 17/04/30 5499 0
71628 [일반] 내가 교회를 가지 않게 된 계기 [148] 솔빈13900 17/04/30 13900 29
71627 [일반] 우연히 알게된 에이즈 예방법 트루바다PrEP 이야기. [88] the3j17807 17/04/30 17807 1
71625 [일반] 남자는 여자가 친절하면 자신에게 관심있는 줄 안다類.book [80] nexon13922 17/04/30 13922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