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8/31 22:22:02
Name aura
Subject [일반] 어스름 즈음에
어스름 즈음에
엄마야 기억나?
날도 어둑하고, 퀴퀴한 날.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굵은 눈망울이 뚝뚝 떨어질 것 같던 날 있잖아.
세상이 잔뜩 억울해 울며 취해 온 날.

봉다리에 담아온 새하이얀통에 담긴 액체를 먹으려고, 먹이려고 하던 날.
그때 아빠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어스름 즈음에
엄마야 기억나?
맨날 헌 몸을 이끌고 오는 엄마를 공사장에서 나는 기다렸어.
그리고 공사장 앞 두텁게 놓인 모래에서,
두껍아 두껍아 헌 집줄게 새 집다오.
헌집은 내 집, 새 집은 엄마집.

고사리 손으로 지은 그 집이 얼마나 허술하던지, 엄마 한 자국 발걸음에
다 무너져버렸었잖아.

나 사실 그 때 엄마가 조금은 미웠어.
열심히 만들었는데.

어스름 즈음에
엄마야 기억나?
나 반에서 1등했는데, 상장도 받아왔는데.
엄마는 그저 술만 마셨잖아.

나 그래도 엄마가 밉진 않았어.
근데 술 한 잔에 새어나오는 한 잔 한숨은 너무 아팠어.
술에 절어 술김에 때리던 엄마 매질보다.

엄마.
있잖아, 나 학교에서.
찰흙이 준비물이었어.
나도 선생님께 매번 혼나고 싶었던 건 아니야.
그래도 그 찰흙이 엄마 한숨이 될까봐.
나 사실 조금 걱정했어.

엄마.
있잖아, 내 졸업식 때.
내 친구들은 부모님이 가져온 한아름 꽃다발을 싫어했어.
그걸 들고 바보같은 표정으로 바보같은 사진을 찍기 싫었대.
엄마, 나는 그게 사실 조금 부러웠어.
졸업식 날, 어스름 즈음에 집에 와도 혼자였으니까.

엄마.
있잖아, 나 대학교 때.
사실 조금 힘들었어.
나도 용돈 받고 싶었어.
방학 내내 일한 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옷도 사입고 싶었어.

엄마야 기억나?
어스름 즈음에
가져온 새하이얀 통에 액체.
먹으려고, 먹이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울며 안아줬잖아.
머리 위로 엄마 눈물이며, 콧물이며 쏟아져서
사실 조금 축축했어.

엄마야 기억나?
어스름 즈음 지나고
한 방 한 이불에 훈훈한 체온으로 안아 재워준 날.
그 훈훈함에 나는 사실 많이 울었어.

엄마야 기억나?
그래 나는 기억나.
엄마는 이제 두꺼비집을 밟을 수도, 찰흙을 사줄 수도, 꽃다발을 줄 수도, 용돈을 줄 수도 없지만.

나는 그래도, 그런 엄마가 기억나요.
엄마. 어스름 즈음이면,










-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짧은 단편이네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기념비
16/08/31 23:38
수정 아이콘
이런 글들이 많이 올라왔으면 좋겠어요. 사람냄새 나고 포근하니 좋네요.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려요~
글이 고픈 밤이었는데 배부르게 잘 읽고 갑니다.
8월 마지막 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16/09/01 06:2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9월도 행복한 한 달되세요~
Rosinante
16/09/01 00:0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16/09/01 06:2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16/09/01 00:11
수정 아이콘
이제 서늘해지는 가을날씨에 잘 어울리는 글입니다. 저도 이런 글을 좀 써보고 싶습니다만;;;;;;
이번생에서는 불가능한거 같습니다. ㅠㅠ
16/09/01 06:21
수정 아이콘
저도 못씁니다만, 자꾸 쓰려고 노력하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7378 [일반] 스포츠/연예 게시판(가칭) 관리자를 뽑습니다. [240] OrBef12683 16/08/30 12683 2
67377 [일반] [프로듀스101] 주요 탈락자 근황 정리 [9] pioren7631 16/09/01 7631 5
67376 [일반] 한글 며칠만에 익히셨는지요? @.@? [32] nexon6246 16/09/01 6246 1
67375 [일반] 정세균 국회의장 정기국회 개회사 전문 [216] 어강됴리12786 16/09/01 12786 19
67374 [일반] 여성혐오 패치 피해...경찰이 고소 묵살? [44] 삭제됨8693 16/09/01 8693 6
67373 [일반] 시사인 분노한 남자들 기사.. 보니까 기도 안차네요.. [61] 율리우스 카이사르13605 16/09/01 13605 9
67372 [일반] 고려대 총학, 카톡방 성희롱 학생 일부 신상공개 결정 [53] barable 9077 16/09/01 9077 1
67370 [일반] [야구] 송창식선수의 1군말소가 결정되었습니다. [12] 피아니시모5942 16/09/01 5942 1
67369 [일반] 현재 중국 종교계 상황 요약.jpg [104] 군디츠마라15445 16/09/01 15445 7
67368 [일반] 자연수 집합과 짝수 집합 중 원소의 개수가 더 많은 쪽은?... [44] Neanderthal7929 16/09/01 7929 5
67367 [일반] 결국 삼성전자에서 갤럭시7노트 전량리콜이라는 수를 던졌네요.. [265] 다크슈나이더22078 16/09/01 22078 6
67366 [일반] [해축] 16/17 여름 이적시장 정리 [43] 손금불산입8532 16/09/01 8532 2
67365 [일반] 손 한번 잡아보자. [50] 켈로그김8360 16/09/01 8360 5
67364 [일반] 유두열 전 롯데 코치 별세. [18] 이시하라사토미4874 16/09/01 4874 1
67363 [일반] 검도 얘기로 시작해서 교육 얘기로 끝나는 얘기. [14] OrBef6018 16/09/01 6018 8
67362 [일반] 신상유포행위에 대한 개인정보보호법위반 적용가능성 [5] 카우카우파이넌스6740 16/09/01 6740 7
67361 [일반] [짤평] <머니 몬스터> - 패셔너블하다. [17] 마스터충달3698 16/08/31 3698 4
67360 [일반] 5회 글쓰기 이벤트 결과 발표입니다. [5] OrBef3533 16/08/31 3533 4
67359 [일반] 어스름 즈음에 [6] aura3611 16/08/31 3611 1
67358 [일반] 더불어민주당 8.27전대 기념 정치글 제1부 – 이당은 변하지 않는 당이다. 변하는데요? [71] Mizuna11160 16/08/31 11160 53
67357 [일반] 프랑스 최초의 버블 [14] 토다에7257 16/08/31 7257 9
67356 [일반] [야구] 한화 송창식 검진결과 팔꿈치 뼛조각 염증 [23] 이홍기8398 16/08/31 8398 1
67355 [일반] 노트7 폭발 사고 사진입니다. (불타고 있는 도중에 촬영) [131] 포켓토이19620 16/08/31 19620 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