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삼겹살을 잘라 굽는 엄마의 가위-집게질은 어린 내 눈에 언제나 야무지고 믿음직했다. 그 끈덕지게 든든한 행위에 다섯 식구를 굶기지 않겠다는 엄마의 억척스러운 끈기가 담겨있는 듯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기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던 나는, 그럼에도 엄마의 고기 굽는 모습이 좋았다. 삼남매 중 막내로 자란 나는 가위와 집게를 잡을 일이 거의 없었다. 고기를 굽는 일은 늘 엄마나 아빠의 몫이었다. 물론 옆에서 젓가락으로 고기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양심상 굽는 척(?) 하는 보조 역할은 자주 했어도 ‘온전하게 내 불판을 앞에 두고 누군가를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고기를 구워본 경험’은 없었다. 가끔 내가 시험 삼아 삼겹살이나 돼지갈비를 잘라 불판위에 올려놓으면, 이상하게 그 모양새가 영 어색하고 볼품없었다. 무뚝뚝한 가위질과 함께 고기 등급 떨어지는 소리가 뚝뚝 들리는 듯 했다. 하여튼 고기를 집게로 잡는 자세부터 뭔가 불안정했고 가위로 자르는 모양새나 손목의 스냅, 고기를 굽는 스킬까지 총체적으로 불안하고 어설펐다. 그러니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삼겹살집에 가도 대뜸 팔을 걷어 부치고 먼저 가위와 집게를 집는 일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불판을 가운데 두고 고기와 정식으로(?) 마주한 첫날은 스무살의 어느 봄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불알친구 원준이가 수원으로 올라온 것은 그해 스무살의 봄이었다.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원준이는 재수를 시작했다. 나에게 화창하고 푸르른 봄이, 원준이에겐 황사가 자욱하게 낀 흐리고 쓰라린 봄이었다. 나름의 비장한 각오로 상경한 원준이는 수원의 친척집에 머물며 노량진 학원으로 출퇴근을 했다. 열심히 하고자 하는 패기와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충만했던 시절이었고 나는 그런 친구를 마음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그런 내 친구를 가장 힘들게 만든 건 노량진의 낯선 환경도, 수험생의 부담감도, 부족한 주머니 사정도 아닌 친척집에서의 무시와 눈칫밥이었다. 원준이가 더부살이를 하던 친척집의 식구들은 하나같이 원준이를 짐짝 취급했고 눈엣가시처럼 대했다. 대놓고 욕하는 건 아니었지만 은근히 주는 눈치와 면박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 원준이는 서러웠다고 했다. 너무 눈치가 보이다 보니, 그 집에서 마음 편히 밥 한번 차려먹는 것도 힘들어서 차라리 끼니를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했다. 밥을 든든히 챙겨먹으며 가족의 응원 속에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원준이의 스무살은 그렇게 혼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힘든 일상의 와중에 하루는 너무 고기가 먹고 싶었다고 했다. 아침부터 배가 너무 고픈데다 유독 고기가 땡겼던 그날 아침, 원준이는 부랴부랴 아침 일찍 동네의 고기 부페를 찾았다. 단지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던 원준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날도 혼자였다. 그런데 막상 찾아간 고기 부페집은 문을 열긴 했지만 아직 영업 시작 전이었다. 그래서 일단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까짓 거 좀 기다렸다가 영업이 시작되면 고기를 노릇하게 구워먹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을 비롯한 직원들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주인뿐만 아니라 종업원들도 전부 ‘아침 마수걸이부터 재수 없게 혼자 오고 난리야.’, ‘오늘 하루 장사 재수 옴 붙었네.’라는 표정과 태도로 불쾌감을 대놓고 표시했다고 했다. 단순히 표정만 그랬던 게 아니라 아침부터 혼자 오다니, 기분 나쁘다는 말투로 대놓고 홀대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친척집 더부살이 눈칫밥에 서러운데, 내 돈 내고 고기 좀 먹겠다는데, 가게에서조차 그런 대접을 받아야 했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나였다면 기분 나쁘고 불쾌해서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원준이는 어릴 적부터 끈기가 남다른 녀석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친구는, 그래도 이왕 자리를 잡은 거, 배도 고프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눌러 앉았다고 한다. 그렇게 따가운 눈총을 참고 견딘 두 시간여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눈칫밥 가득 담긴 고기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근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고기들이 하나도 맛이 없었다고 했다. 평소에 그렇게 고기를 좋아하던 녀석이,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시골 촌놈 원준이에게도 그날의 고기는 하나도 맛이 없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 순간에 원준이는, 무언가 서럽고 속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얼마 후 원준이로부터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실체 명확한 이 ‘1인손님 홀대론’에 순간 울컥했다. 마치 내가 모욕을 당한 듯 화가 났고 마음이 속상했다. 그래서 얼마 후 원준이를 우리 집으로 불렀다. 원준이가 먹고 싶었던 그놈의 고기, 내가 직접 배터지도록 마음껏 구워줘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직접 식탁 테이블에 신문지를 넓게 펴고 가스 버너와 불판과 고추, 상추, 오이, 묵은 김치, 기름장 등을 그럴듯하게 세팅했다. 그리곤 냉동실에 구석에 둔 냉동삼겹살을, 마치 크립토나이트 덩어리를 마주한 렉스 루터 박사처럼 신성한 손길로 꺼내들었다. 보통은 사람들에게 두툼한 생삼겹살이 더 인기가 많지만 나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부터 주로 먹었던 냉동삼겹살이 익숙하고 좋았다. 뭐랄까, 차갑게 꽁꽁 언 냉동삼겹살 한 줄을 뜯어 불판 위에 올리면 얇고 차가운 삼겹살이 해동되며 지글지글 익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왠지 모르게 신선하고 깨끗해 보인달까? 두툼한 고기의 식감은 없어도 냉동삼겹살만의 깨끗한 비주얼과 깔끔한 얕은맛이 나는 좋았다. 그리고 그날은 친구를 위해 비장의 무기인 고추장까지 꺼내들었다. 내가 자란 안성의 시골마을에선 쌈장의 역할을 고추장이 대신하곤 했다. 쌈장보다는 고추장이 흔하던 시절이어서 그랬을까, 어쨌든 나는 칼칼한 고추장에 찍어먹는 삼겹살이 그렇게 좋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맛이었고 원준이도 분명 좋아할 거라 믿었다.
어쨌든 그렇게 내 인생의 첫 ‘고기 굽기’는 시작되었다. 근데 막상 가위와 집게를 양손에 들고 난생 처음 삼겹살을 굽다보니 이거 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꽁꽁 언 고기는 생각처럼 잘 떨어지지도 않고, 잠깐만 신경을 돌리면 불판 위에 올려둔 고기가 한쪽면만 까맣게 타고 있고, 가위가 잘 안 드는 건지, 내가 잘못 자르는 건지 고기가 매끄럽게 잘리지도 않는데다 불판 한쪽에선 기름이 튀는 통에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불판의 기울기는 조정을 잘못했는지 받쳐둔 종이컵으로 기름은 개미 눈물만큼 떨어지고 있고 나머지 기름들은 불판 위를 유람하며 한강여의도공원 폭죽처럼 팡팡 터지며 신문지 바리케이트를 넘어 나와 친구에게로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그뿐인가? 한편에선 해동이 되기 무섭게 익어버리는 얇은 냉동삼겹살들이 기름홍수와 조우해 마치 [TV는 사랑을 싣고]의 한 장면을 연출하듯 뜨겁게 엉겨 붙고 있었으니, 그렇게 불판 위에선 한 폭의 삼겹살 튀김(?)이 완성되고 있었다.
뭐랄까, 이건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난리도 이러 난리가 없었다. 고기가 익어가는 건지, 내 얼굴이 익어가는 건지. 삼겹살이 타들어가는 건지, 내 속이 타들어가는 건지. 기름이 총탄처럼 튀고, 삼겹살이 팔다리처럼 잘려나가는 지옥도(地獄道)의 한가운데서 나는 어찌할 바 모를 이등병처럼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을 순 없는 일이었다. 내겐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렇게 총성 없는 전쟁터의 한복판 속에서도 나는 전우를 위해 전투적으로 고기를 굽고 또 구웠다. 내가 고기를 굽는 건지, 고기가 나를 굽는 건지 모를 혼돈의 무간도 속에서도 친구는 즐거운 듯 웃으며 먹고 있었다. 이 전쟁 난리통에도 뭐가 신나는지 이놈은 꾸역꾸역 고기를 잘도 먹었다. 그렇게 원준이의 얼굴은 행복해보였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전쟁통에 내 밥숟가락 하나 떠먹지 못한 나도 무언가 배가 불렀다. 마치 그 어린 시절 원준이랑 같이 놀던 시골동네로 돌아간 느낌이 나면서 어느 순간 설핏 웃음이 났다. 여전히 기름은 여기저기서 튀고, 연기도 제대로 빠지지 않아 자욱한 부엌 식탁에서 뭐가 좋은지, 그렇게 우린 오랜만에 마음껏 웃으며 기분 좋게 고기를 구워 먹었다. 누군가를 위해 고기를 구워주는 일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를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내가 만들어낸 바삭한 ‘슈퍼 웰던(Super well-done) 삼겹살’들은 내게도 아주 특별한 맛으로 기억된다. 원준이도 그날처럼 맛있는 삼겹살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나보다 먼저 일을 시작하고 돈을 벌게 된 원준이는 자주 나에게 밥을 샀다. 그리고 나랑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을 때면 꼭 한 번씩 스무날 그 봄의 냉동삼겹살 전쟁을 추억하곤 했다. 그러면서 친구는 꼭 말미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 삼겹살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그 이후로 삼겹살을 먹을 때면 항상 그때 생각이 난다고 했다. 아마 그날 원준이는 정말 오랜만에 서러움 없이, 맘 편하게 누군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상을 마주했었나보다. 이제 막 알바를 시작한 고깃집 알바생처럼 어설프게 고기를 자르고, 응급환자를 처음으로 마주한 초짜 인턴처럼 우왕좌왕 서툴게 고기를 굽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원준이는 마냥 즐거웠던 것 같다. 물론 고깃집에서 고기를 사먹을 정도의 돈은 당시 우리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내 손으로 직접 구워주고 싶었다. 내 친구니까. 타향에서 겪은 온갖 설움 속에 때로는 집밥이 그리웠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 후로도 여전히 나는 고기를 잘 굽지 못한다. 고기를 예쁜 모양으로 맛깔스럽게 굽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그래도 나중에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생기면 꼭 한번은 우리 집에 초대해 단둘이 식탁에 마주 앉아 볼품없지만 맛있는 냉동삼겹살을 구워주고 싶다. 그리곤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웰던(?) 삼겹살을 한 점 고추장에 찍어 앞접시에 슬쩍 놓아주며 말하고 싶다. 앞으로 니가 먹을 고기는 내가 평생 구워주겠다고. 물론 참 시시한 얘기다. 그깟 삼겹살이 뭐라고. 프로포즈라 하기에도 영 볼품없고. 하지만 때로는 이런 시시한 것들이 나는 좋다. 스무살의 봄에 그랬던 것처럼 이런 것들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하고. 그래서 미래의 그날의 모습을 떠올리다보면 소설가 김애란의 말처럼, '마침내 시시해지는 내 마음이 참 좋다'. 불판 위에 볼품없이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들이 '네가 좋아'라고 대신 말해주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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