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과 음주운전
짝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 짝사랑의 고통은 ‘사랑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갈망에서 비롯된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고 나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고통이 따를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현실의 짝사랑은 내 맘 같지 않다. 결국 ‘짝사랑과 고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단짝이자 동전의 양면이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짝사랑의 고통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고 헤어날 수도 없다. 결국 모든 짝사랑에는 그 사랑의 깊이와 무게만큼의 아픔이 따르게 마련이다.
딜레마는 여기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사랑을 쟁취하고 싶지만, 고통은 피하고 싶다. 그리하여 많은 연애 칼럼이나 조언들이 공통적으로 입을 모으는 것이 ‘평정심의 유지’와 ‘일희일비의 구축(驅逐)’이다. 이른바 ‘짝사랑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의 제1원칙은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자 연애를 대할 때 꼭 필요한 자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평정심의 유지’와 ‘일희일비의 구축(驅逐)’이 나의 고통을 덜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당면한 연애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무기에 가깝다는 점이다. 즉 이건 나를 향한 응급처방이나 구급약품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향해 날카롭게 벼린 조용한 칼날이자 총구이다. 치료백신이 아니라 일종의 스팀팩이란 얘기. 그러니 이 ‘평정심의 유지’와 ‘일희일비의 구축(驅逐)’이 나를 평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란 기대는 착각이자 오해에 가깝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짝사랑을 겪는 많은 이들이 평정심이 유지되지 않는다며, 자꾸 일희일비한다며 스스로 자책하고 괴로워한다. 어떤 날은 마음이 편했다가도, 또 어떤 날은 불안해서 미칠 것 같고. 또 어떤 날은 멀쩡했다가도, 또 어떤 날은 이대로 있어도 되나,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조급증에 시달리고. 그래서 이런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고, 과거와 달라진 게 없다고 좌절 섞인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은 적절한 판단일까? 내 생각은 다르다. 짝사랑은 이루고 싶은데, 고통은 외면하고 싶다는 건 마치 ‘술을 마신 후 운전대를 잡아놓고 음주운전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다. 술을 마신 후 운전대를 잡았으면 음주운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짝사랑을 이루고 싶어서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기로 했다면 그에 따른 고통과 아픔은 자연스레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음주운전을 피하고 싶으면 애초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될 일이고, 짝사랑의 고통을 피하고 싶으면 상대방을 애초에 사랑하지 않거나 이제라도 포기하면 될 일이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이제라도 그를 포기할 수 없는 나 자신에 있는 것이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나의 애꿎은 마인드 컨트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정할 건 인정하고 가자는 얘기이다. ‘나는 왜 평정심을 찾지 못할까’, ‘나는 왜 걸핏하면 일희일비할까’에서 문제의 원인과 대처법을 찾으려고 하면 답이 없다. 이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이기에. 자연스러운 감정의 생성을 내 이성으로 제어하고 논리적으로 조절하려는 시도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물론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치료약은 아니다. 이른바 짝사랑을 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슬픔, 우울, 분노, 서러움, 조급함, 서운함 등의 감정을 없애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한 일일까? 짝사랑을 하면서 평온을 얻고 싶다는 건 마치 조각배 한 척에 의지해 망망대해로 나아가면서 잔잔한 물결만 일기를 바라는 순진한 소망과 진배없다.
결국 고민의 초점은 ‘나는 왜 그(그녀)를 포기하지 못할까?’, ‘결국 어떤 길이 나의 행복일까?’에 맞춰져야한다. 이러한 고민 끝에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하고 그 외에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그에 걸맞은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행위에 따른 응분의 대가도 당연히 치를 마음의 준비를 가져야 하고, 조각배 한 척에 의지에 망망대해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거친 파도에 배가 뒤집힐 위험도 감수해야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내가 시달리는 감정의 폭풍우의 원인이 나의 찌질함과 못남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가 전혀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짝사랑에서 파생되는 고통을 감정의 통제나 조절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일시적인 처방이나 단기 부양책(?)이 될진 몰라도 언제든 더 큰 파도에 휩쓸려 결국 다람쥐 쳇바퀴 같은 좌절의 늪에 우리를 빠뜨리기 쉽다. 결국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미 발생된 감정이란 놈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어떻게 응전(應戰)할 것인가에 있다.
[우리 시대의 삶은 과거보다 더 팍팍해졌다. 그만큼 우리에게서 행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이 악화된 만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기 쉬우니까. 그렇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감정의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분출이 가능하냐의 여부에 달린 것 아닌가.···(중략)···원하는 감정일 수도 있고, 원하지 않던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다. 슬픔, 비애, 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에, 내일을 더 희망차게 기다릴 수 있으니까. 장차 내게 행복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설렘,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닐지.] (강신주, <감정수업> 中)
결국 핵심은 ‘무엇이 나의 행복인지’ 돌아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무엇이 내 행복인지를 알아야 만이 환경에 떠밀리지 않는, 책임 있는 나만의 선택을 할 수가 있다. 내 행복을 알아야 책임도 질 수 있다. 그리고 내 길에 온전히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후회도 없다. 결국 행복에 대한 성찰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내 사랑을 온전히 책임져나가기 위한 지렛대이자 디딤돌이다. 짝사랑도 가끔은 행복할 때가 있다. 상대방이 나를 향해 웃어주고, 가끔 내가 원하는 피드백을 해주면 더없이 달콤하고 행복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잠시이다. 짝사랑의 계절에서 봄은 잠깐이고 겨울은 계속된다. 그러니 짝사랑으로 인한 행복의 과실은 따먹고 싶어 하면서 고통의 쓴약은 외면하고자 하는 건 짝사랑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로 적절치 않다. 이 사랑을 포기할 용기가 없다면, 그에 따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을 용기 정도는 가져야하지 않을까? 짝사랑에도 자격은 있는 법.
이것이 내 행복이고, 이 고통의 실체들이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당연히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면 기꺼이 끌어안으면 그만이다. 일부러 피하거나 누구도 원망할 필요가 없다.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라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그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 외엔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을 땐 돌을 맞아야한다. 다만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우두커니 서서 돌을 맞기보다는 어떤 자세로 이 고통을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결과가 오든, 현재 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 A라는 노력을 했으니 B라는 피드백을 달라는 뇌물이 아닌, '선물'의 자세. 최선의 노력 후에 아쉬움 없이 원망과 미련을 훌훌 털어낼 줄 아는 '안 되면 할 수 없고'의 유연한 자세. 이런 자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사실 사랑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말은 절반은 거짓말이다. 짝사랑은 집요하게 나를 괴롭힌다. 그러니 굳이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다. 뭐가 어찌됐든 스스로를 끌어안고 지켜낼 수 있는 건 나 자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