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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3/28 15:49:11
Name 글자밥청춘
File #1 145854504475_20160322.JPG (461.1 KB), Download : 57
Subject [일반] 너무 위대한 먼지




옛날에 즐겨 보았던 무협지를 떠올려보면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라는 표현을 종종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이 탄소와 물과 몇가지.. 대략 3천원 정도면 구할 수 있는 성분들로 구성되어있다고 이야기하는 시대지만서도, 나는 인간이 하나의 소우주라는 표현을 여전히 좋아한다.


우주. 내가 감히 어떤 원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수금지화목토천해명 같은 머릿말로 어릴 적 배운 우주의 끝을 지난 인류의 우주선이 보내온 사진 한 장은, 지구는 그야말로 코딱지 같았다. 파란 코딱지라면 감기에 걸린 걸까? 아니면 어디 도료공장이나 먼지투성이 건설현장에서 마스크도 없이 일하고 난 뒤의 코딱지일까? 어쨌든 지구는 엄청나게 작았다. 저게 지구인걸 어떻게 확신할까 싶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지구 안의 우리들은 비춰지지도 않았을 한 장의 사진은 까만 배경만큼이나 까마득했다. 미 항공우주국은 정말 놀라운 곳이다.


먼지라고 해도 너무 커다란 것은 아닐까? 사람이라는 개체를 소우주에 비유하고픈 나지만, 그 사진을 보고나면 인간은 먼지와 비교하기에도 언감생심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먼지보다도 작다. 있다하면 있을테지만 그 사진만으로는 도무지 인간이 어디에 있을지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원소같은 것일테다. 혹은 지구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개념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만. 어쨌든 그래도 먼지까지는 내 존엄의 경계를 확대해 놓고 싶으니 그냥 먼지라고 비유하고 싶다. 우주가 아무리 위대하고 광활하다한들.. 어쨌거나 나의 우주는 결국 발 붙인 이 땅과 보이는 저 하늘 사이에 위치한 어딘가 쯤일테니.


그 작은 지구 땅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여기까지 왔을까. 어쩌면 인간은 그만큼 하찮기에 이토록 이 작은 행성안에서 치열하게 다투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와 내세가 공멸한 이 시대에 더 이상 그렇게 피를 흘리며 다툴 이유는 있는 것일까. 과학은 우주의 위엄을 느끼게 해주었고, 동시에 어떤 희망도 빼앗아 버렸다. 얼마전 유명했던 한 연속극의 대사가 생각난다. 천년에 내 이름을 새길것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대사였다. 실제로 그런 말을 했을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세종 이전이니 기본적으로 한국어나 한글은 아니었겠지. 어쨌든, 이방원에게 죽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 분명한 것은 그가 천년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믿었던 불교의 내세는 과학적으로는 증명 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우리에게 현생의 덕이란 유사이래 가장 무가치한 시대를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오늘 누군가는 또 죽어간다. 죽음 이후의 희망이 거세된 시대에서.


며칠 전의 일이다. 유성기업이라고 하면 노동분쟁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몇 년전부터 유명한 기업이었다. 유명하다고 하니 왠지 칭찬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다. 악명이 높다고 정정하겠다. 한 사진에서 유성기업의 부회장인지 회장인지 하는 백발에 안경 쓴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신분보호 요청을 했다나 사설 경호를 붙였다나. 어쨌든 그 할아버지는 사진만으로 봤을때는 인자하고 중후한.. 양복을 입은 노년의 신사처럼 보였다. 인두껍을 쓴 괴물임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말끔한 인상이다. 유성기업의 한광호라는 노동자 분이 인간에서 열사로 스러지는 시기의 일이다.


그저 먼지 한 톨 같은 인간들의 싸움이라고 신선이 바둑판위를 노니듯 턱수염이라도 쓰다듬으며 관조하고 싶을지 모르겠다마는, 나는 그런 신선만큼 속세에 통달하지도 못했고 먼지는 먼지 나름의 이갈림이 있다. 바둑판을 밥상마냥 뒤엎으며 신선의 싸대기를 올려친다면 모를까. 재수업게스리. 그러니 나는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심드렁하게 앉아있기가 어렵다. 너무 위대해버린 먼지의 삶. 나는 그런 삶의 종착지를 맞이하는게 싫다. 먼지는 너무 위대할 필요는 없다. 이제 어떤 이름도 천년을 가진 않을 것이다. 정몽주의 위명은 정몽주의 것이며, 전태일의 위명은 전태일의 것이다마는. 근 몇년간 죽었던 쌍용의, 삼성의, 유성의, 한진의, 그리고 내가 떠올리지도 못해 잊혀져간 이들의 위명은 누구의 것도 되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여전히 기리고, 기억하고, 기록하지마는 그것이 역사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나 아득하다.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은 이런 것이다. 사상, 신념, 이념 이런것들보다 빨리 스러지는 죽음의 이름. 유성기업 회장님의 돈은 통장의 인쇄되어, 은행에 기록되어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 그는 노동조합이라는.. 이를테면 내 말 듣고 푼돈에 일해줄 일종의 부품들이 감히 인간처럼 군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던 또 하나의 그럴싸한 먼지였다. 그가 그럴싸한 것은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여김으로서 그럴싸한 먼지로 남게 된 아주 뭣같은 먼지이다. 그는 자신을 위대하다고 믿게 만들어줄 수십억의 돈을 부어서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사용했다. 이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노동조합은 법적 권리라고 하는데.. 노동조합을 하게되면 많이들 죽는다. 수십억을 들여서 그들을 죽게 하는 과정이 그에겐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었을것 같다. 왜냐면 노동조합은 그 수십억의 일부만으로도 충분히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 돈은 인간처럼 구는 먼지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누군가는 그 돈으로 신명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노조 파괴 컨설턴팅을 받고, 깡패를 쓰고... 하며 쓴 돈들을 회사를 위해 일해준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던 것은 그저 그들이 대등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기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 그리고 개기면 밟을 수 있다는 것이 위대함의 증거가 된 시대란. 나는 그 노인이 노조가 깨져나가고 누군가가 죽어나가며 울고 불고, 고통스러워하고 바닥을 기는 것을 보면서 침을 흘리며 딸이라도 친 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수백만원의 임금을 갖고 개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나, 자신의 위치를 새삼 느끼며 즐거워 하기 위해서는 수십억도 아깝지 않은 것이었던 것 같다. 하긴, 나도 그를 몽키스패너 같은 걸로 마디마디부터 지근지근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통스럽게 짓이길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돈이 있다면.. 그 백발의 신사를 그러할 것이다.



그도 그런 일들을 즐기는 자신이 캥키는 짓을 했음을 알기는 아는지, 신변보호를 요청한다. 누군가가 그의 목에 칼을 꽂아넣을지 모르므로. 몽키스패너를 들고 나타날 지 모르므로. 단두대에 세운 왕의 운명을 왕이 알았을리 없었듯이, 그 역시 목에 칼이 박히면 핏물이 뿜어져 나오고, 기도에 바람이 새며 폐로 핏물이 들어차고.. 주름진 두 손으로 벌어진 목을 틀어쥔 채 아직은 식지 않은 핏물이 손가락 사이로 터져나오는 것을 있는 힘껏 틀어쥘 것이다. 하지만 이내 눈에서 빛을 잃어가고, 손은 허공을 허우적 댈 것이며 온 몸은 바닥을 꿈틀이며 뒹굴다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그는 안다. 결국 공평하게 한 방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자신은 딱히 우주에서 바라보지 않더라도 사소한 먼지같은 것임을.



열사의 죽음은 벌써 몇 페이지 뒤로 넘어갔다. 아니, 죽어간 그 때 조차 첫 페이지로 올라오지는 못했다. 죽음이 너무나 사소해진 이 땅에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폭력은 죽음을 하찮게 만들고, 지워내고, 시대를 자꾸 되돌리려 한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우주의 한떨기 먼지같은 존재라 할 지라도 이 시대를 변화시키고 있으므로. 천년을 살아갈 시대가 아니라 해도 지금을 바꾸는 죽음은 아직 스러지지 않았으므로. 금세 사라지는 것들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남겨져 있으므로. 그렇게 먼지는 너무 위대하게 사라져 버렸지만, 그의 위대함을 부수고 다시 세워 한 인간으로 역사에 남기는 것은 이제 남겨진 흔한 먼지들의 일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보호를 받는 백발 노년의 신사의 운명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의 하찮은 먼지일지언정 하나의 소우주이며, 그 역시 결국 그정도일 뿐이다. 상처입는 것은 문을 걸어잠그는 이들일지니.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간신히 떠올린다. 무뎌지고 심드렁해진 그 이름들을 기억 한 켠에 다시 자리를 만든다. 오늘도, 내일도 죽어갈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백발 노년의 신사도 결국은 죽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할 것은 천년에 남길 이름 석 자가 아니다. 내일을, 모레를 기억하는 수고도 아니다. 다만 변화하는 시대에 속도를 붙여가야만 한다. 언제가 될 지 모르는 단두대에 죽어버린 이름들을 고이 모아 그들의 이름으로 칼날을 내리치는 것. 하찮은 먼지들이 오로지 위대해 질 수 있는 그 순간을 위해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들로부터 이별을 고하고싶다.



떠나간 이의 빈 자리를 이고 그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아마도 금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소우주 이므로.


폭행에 두개골 함몰, 화장실 쫓아와 몰래카메라까지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28962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것일까…
http://h21.hani.co.kr/arti/photo/oneshot/41377.html
노동자 한광호의 죽음
현대차-유성-정부 합작품
http://www.redian.org/archive/97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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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미
16/03/28 22:45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Unknown Verses
16/08/25 17:42
수정 아이콘
뒤늦게 댓글 남깁니다.
한 사람은 커다란 하나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 그릇인데 허무하게 사라져버렸고 그만큼 그 전보다 쓸쓸해진 듯 하네요.

밥딜런 노래만 계속 재생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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