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자 따뜻한 봄바람이 시원하게 산들거렸다.
찬바람을 쐬니 복잡했던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다.
건물 밖 정자에 함께 앉은 연주는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연주와의 침묵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마실래?"
연주를 만나기 전 미리 뽑아놨던 음료수를 건넸다.
연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음료를 받아들었다.
"..."
"후우. 날씨 시원하고 좋다. 그치?"
침묵 사이, 겨우 만든 틈으로 대화를 구겨넣는다.
"그러게요."
연주가 검지와 엄지로 음료 캔을 만지작 거리며 대답했다.
"선배는 참, 옛날부터 쓸데 없는 부분에서 매너가 좋은 것 같아요."
"야, 매너가 좋으면 좋은거지 쓸데 없는 부분에서 매너가 좋다는 건 뭐야."
연주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살짝 웃음지었다.
재밌는 일이라도 떠오른건가. 어쨌든 연주가 웃으니 굳어졌던 분위기가 살짝 풀리는 느낌이다.
"왜 웃어?"
"그냥요. 옛날 생각 나서요."
옛날 생각이라.
"선배, 저랑 언제 처음 만났는 지 기억해요?"
연주를 처음 만났던 날이라, 아 기억났다. 하긴 그렇게 시끌벅쩍한 사건, 사고가 있었는데
잊는게 이상하지.
"내가 군대 있을 때, 우리 학교 축제 시즌에 휴가나와서 봤잖아."
"오, 잘 기억하시네요?"
연주가 한층 더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연주와 처음으로 만났던 그 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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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신분으로, 휴가 나온 나는 학교 축제 소식에 잔뜩 신난 상태였다.
군바리주제 혼자 학교 축제오기는 뭐하고,
고학번 형들에게 학교 주점에서 같이 술이나 마시자며, 잔뜩 졸라 댔었다.
학과 주점에서 한창 놀고 있을 쯤, 옆 테이블에서 굉장히 눈쌀찌푸려지는 일이 발생했었다.
'아 좀, 앉아. 그냥 술이나 한 잔 받으라니까?'
'죄송한데, 신입생애들도 열심히 일하는데 제가 빠지면 안되죠.'
'좀 어때. 한 잔만 마시고 가라는 건데! 여기 옆에 고학번 선배님한테 인사도 하고'
'한 잔이 두 잔되고 세 잔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저만 앉아서 놀고 있으면
애들이 보기에 어떻겠어요.'
당시 신입생들을 맡아 학과 주점을 꾸리던 연주가 선배들에게 덜미를 잡혔었다. 당황해서 주눅이 들거나
벙찔 법도 한데, 연주는 당차게 선배의 말을 반박했었다.
그 모습에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똑부러지는 애라고 생각했었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아마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신경을 껐을텐데,
'아오 진짜 더럽게 말 안 듣네. 야 그럼 술이라도 한 잔 따르고 가.'
'싫은데요? 제가 왜 술을 따라야하죠? 가볼게요.'
화가 난 연주의 말투도 싸늘해졌다.
이쯤 되니, 바로 옆 테이블이다 보니 신경을 끄고 싶어도 들리는 소음에 자동으로 주의가 기울여졌다.
그리고 옆에서 듣는 나조차도 술을 따르라던 발언은 좀 멀리 나간다 싶었다.
'야!'
뒤돌아선 연주의 팔목을 남자 선배가 낚아챘다.
'아! 이거 놔요.'
팔목을 아주 쎄게 잡혔는지 연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아무리 당차고 똑부러진 연주라 할지라도 힘에서 남자를 이길리 만무했다.
팔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난처한 상황에 빠진 연주.
난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도덕심이 그렇게 투철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런 행태를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놔요.'
군인이어서 그런지 남는 게 힘 뿐일 때라 연주를 잡은 선배의 손을 풀어버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뭐야 이 새끼?'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여자 후배한테 술이나 따르라고 시키세요?'
'뭐? 너 몇 학번이야 이 새끼야. 그리고 여기 있는 형이 몇 학번인지는 알어?'
그 놈의 학번, 나이.
숫자가 높은 게 벼슬은 아닐텐데.
어쨌든 이쪽에서 그렇게 나와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형님'이 개입할 여지를 알아서 만들어 준다.
'야, 씨발. 니네 짬좀 쳐먹었냐?'
말했다시피 군바리 주제 혼자오긴 그래서, 고학번 형들을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정말 덩치 큰 초고학번의 형이 존재한다. 오죽하면 별명이 '형님'이었다.
본래 성격이 유순해 남들 일에 잘 간섭안하는 성격이지만, 이 형이 한 가지 병적으로 싫어하는 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짬질이었다.
육두문자와 함께 '형님'이 일어나자 그 압도적인 크기에 상대가 주눅든다.
'니네 몇 학번이냐?'
아마 과생활을 잘 안하더라도, 학번이 다르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이 형과 같이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테이블에 같이 앉아있던 한 명이 그제야 기억이 되살아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쨌든 상황은 그대로 종료.
'괜찮아?'
'아, 네.'
그대로 옆에 뻘줌히 있던 연주의 팔목을 살폈다.
얼마나 쌔게 잡았으면 빨갛게 자국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