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말. 홈팀이 3:5로 지고 있는 가운데 선두타자가 안타를 치고 나가자 맥이 빠져 있던 1루 관중석이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속타자가 담장을 직격하는 2루타를 날려 주자를 불러들이자 순식간에 관중석은 환호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 관중석 한가운데에 홀로 토라져 있는 소녀가 있었다.
“아, 진짜 시끄러워.”
바리가 툴툴댔다. 그러나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해원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응원 구호를 외치며 주먹으로 연신 삿대질을 해 댔다. 바리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워낙 많아 해원에게 직접 심통을 부릴 수 없다는 점이 그녀의 짜증을 부채질했다. 결국 그녀는 하릴없이 홀로 투덜거리며 야구인지 뭔지가 어서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다음 타자가 빨랫줄 같은 타구를 날려 외야 담장을 훌쩍 넘기는 순간, 해원은 바리의 존재조차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저 환호와 비명의 중간쯤 되는 괴상한 고함만을 질러대고 있었다.
“나, 두 시간 넘게 기다렸거든요?”
“미안해.”
해원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이 수그렸다.
“그 동안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한 거 알아요?”
“미안해.”
“이럴 거면 왜 날 데리고 왔어요? 혼자 오지.”
네가 같이 가자고 했잖아, 라는 말이 목구성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해원은 얼른 집어삼켰다. 이럴 때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결코. 바리는 잔뜩 화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행히도 해원의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아. 왔다.”
바리는 샐쭉한 얼굴로 몸을 감추었다. 아래쪽에서 한 남자가 계단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마침내 해원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다른 분하고 같이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니요. 혼자 왔습니다.”
“그런가요? 제가 잘못 본 모양이네요.”
남자는 손목시계를 슬쩍 들여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청소도 거의 끝났고, 이십 분쯤 후에 조명을 끌 예정입니다. 그 정도면 괜찮을까요?”
“딱 좋습니다. 조명이 꺼지고 나면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저어, 그런데......”
남자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해원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따라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남자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리 위에서 시켜서 하는 일이라지만, 귀신이니 뭐니 하는 꺼림칙한 일에 구태여 옆에서 따라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자가 위쪽 출입구 쪽을 가리켰다.
“그럼 저는 저쪽에 있겠습니다. 일이 끝나면 말씀해 주십시오. 문을 열어드려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남자는 마치 뒤에서 뭐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른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남자의 모습이 출입구 뒤로 사라지자 해원이 부러 유쾌한 투로 말했다.
“자자, 일 하자, 일.”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선 채였다.
“나 아직 말 안 끝났어요. 아직 이십 분 남았다면서요?”
해원은 목을 움츠리고, 폭풍을 맞이하는 선장의 심정으로 바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폭풍이 지나가고 고요가 찾아왔다. 조명이 꺼지자 거대한 야구장 전체에 어둠이 두껍게 내려앉았다. 수십 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벽 너머로 주황빛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비쳐들어, 간신히 눈앞만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인구 천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 한가운데서 해원은 문득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자동차 경적 소리가 멀리서,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참을 기다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간신히 계단과 의자를 구분할 수 있었다. 휴대전화가 주머니에 들어 있었지만 불빛을 켤 때는 아니었다. 해원은 주의 깊게 아래로 내려가며 계단 수를 셌다. 서른네 단씩 세 번을 내려가자 2층 내야석의 가장 앞줄이었다. 해원은 미리 들었던 대로 오른쪽을 쳐다보았다.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의자 끄트머리쯤에 희미한 그림자가 있었다. 해원은 차분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림자는 가장 끝 의자에 앉아서 어두운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해원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앉은 자리에서 마운드와 홈플레이트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제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야구장에 처음 왔습니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해원은 싱긋 웃더니 흡사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 전까지는 주말에 아버지가 틀어놓으신 TV에서 야구를 본 게 전부였습니다. 만화를 봐야 하는데, 그놈의 야구인지 뭔지 때문에 만화를 못 봐서 입이 댓 발은 나와 있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구장에 간다고 해서 처음에는 안 간다고 뻗댔지요. 그러다 야구장에 가면 치킨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을 바꿔서 아버지를 따라나섰습니다.”
벌써 이십 년은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해원은 그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표를 사려고 줄을 서던 모습. 야구 유니폼을 입고 무슨 말인지 모를 말들을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던 사람들.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간신히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던 기억. 가을바람에 식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맛있었던 양념통닭. 품속에서 자연스럽게 초록색 병을 꺼내 생전 처음 보는 옆자리 사람과 잔을 나누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함성들.......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습니다. 다음 우승은 4년 후였고요. 그 때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저는 이미 야구 광팬이 되어 있었습니다. 야구장을 중뿔나게 드나들었지요. 표 살 돈이 없는 날에는 개구멍으로 기어들어가거나 철문을 타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야구장에 들어오면 항상 눈에 뜨이는 분이 있었습니다.”
해원은 흘긋 옆을 보았다. 그림자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항상 가장 앞줄에 서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시는 아주머니였습니다. 경기 내내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지 않으시면서요. 제가 야구장에 올 때마다 그 분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항상 같은 모습으로 응원을 하고 계셨습니다. 홈런! 홈런! 하고 외치시면서, 바로 여기에서요.”
해원이 그림자의 발밑을 가리켰다. 그림자가 살짝 흔들린 것 같다고 해원은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히 어둠 때문에 착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해원은 기다렸다. 차갑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 때가 생각나네.”
한숨이 살짝 섞인 투로 그림자는 말했다.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좋았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놀랐습니다.”
“뇌출혈이었어.”
“예.”
“아마 화병이었을걸.”
해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잠시 대답할 말을 고르다, 그냥 머릿속에서 떠오른 대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화병이 날 만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내내 바닥권만 맴돌았으니까요. 솔직히 저도 제가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우승을 못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승한 지 벌써 이십 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다른 팀으로 갈아탔을 겁니다, 아마.”
“망할 놈들. 그딴 야구를 보면서 천 날 만 날 뒷목을 잡다 보니 혈관이 터질 만도 하잖아. 안 그래, 총각?”
해원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림자는 잠시 키득거렸다.
“내가 오래 살려면 진즉에 이놈의 팀을 떴어야 했어. 잘하는 팀이 한둘이 아닌데 하필 어쩌다......”
그림자의 말꼬리가 어둠 속으로 길게 늘어지다 마침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팀으로 옮겨가는 게 쉽지 않더라고.”
“우리 팀이니까요.”
“그래. 자식 같은 거지. 총각 혹시 결혼했나?”
해원은 손을 내저었다.
“총각인데 결혼했을 리 있습니까.”
“그래. 총각도 나중에 애 낳아 보면 알 거야. 하루에도 열두 번씩 속 썩이는 자식 놈이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내 맘대로 바꿀 순 없거든. 그저 어떻게든 잘 되라고 빌 수밖에 없는 거야. 응원팀도 그런 거지. 아무리 병신 같아도 그래도 내 새낀데 별 수 있냔 말이야. 화가 나도 그냥 괜찮다, 다음에는 잘하면 된다, 그러는 거지. 그러다 보면....... 그래. 언젠가 이런 날도 오는 거지.”
싱긋 웃으며 해원이 말했다.
“우승 축하드립니다.”
“망할 놈들. 늦어도 너무 늦었어. 나 죽은 뒤에 우승이라니.”
그림자는 유쾌하게 웃으며 걸쭉한 욕설을 몇 마디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해원을 돌아보았다. 이십 년 전부터 매번 야구장에서 홈런을 외치며 응원하던, 익숙하기 그지없는 아주머니의 얼굴이었다. 야구장을 찾는 팬들은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몰랐지만 누구나 그녀를 알았다. 그래서 팬들은 나름대로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홈런아줌마. 그 수많은 팬들이 앞으로도 그녀를 계속 기억하리라고 해원은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는 여한이 없네.”
“예. 편히 가십시오.”
그녀의 모습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바리가 작은 소리로 무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아생전, 그리고 죽은 후에도 항상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팀을 응원하던 홈런아줌마가 자신의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세상에서도 야구를 볼 수 있나?”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해원은 일어나서 눈을 감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해원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차가운 가을 공기가 옷 사이로 파고들어 해원은 잠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옅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출입구가 위쪽 저 먼 곳에 있었다.
“다음에는 야구장에 오기 전에 규칙이라도 좀 알려 줘요.”
바리의 목소리에서 뾰로통함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할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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