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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5/12 12:51:05
Name 바위처럼
Subject [일반] 슈퍼 히어로 여선배-1


"당신 여기서 뭐하는거야!"

우악스런 손길이 내 손목을 휙 잡아당겼다. 어어, 군중들 사이로 내 몸이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저기, 잠깐만.. 저기요! 군중들의 아우성 사이에 내 목소리는 쉽게도 잡아먹혔다. 사람들의 어깨, 등, 가방에 부딪혀가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누군지도 모를 손에 이끌려 뛰었다. 대학교 신입생, 술만 진탕 먹었던 그 시절, 저질같은 체력에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그 손길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한 여름의 광화문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여기저기에 깃발이 나부꼈고, 뭔지 모를 전단지가 사람들 사이에서 돌고 돌았다. 아침까지 종로에서 술을 먹고 친구들과 여기저기 놀러다니다가 헤어지고 집에가려던 찰나였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길래 무슨 콘서트라도 하나 싶어서 고개를 들이민 곳이었다. 전단지에는 한미FTA 결사반대 같은 이야기가 잔뜩 써있었고, 2MB퇴진 이라는 말도 써있었다. 2MB가 누군지 알게 된 것은 좀 더 이후의 일이었다.

"야.. 이게 뭐람?"

약간 이상한 기분이었다. 군중 속은 시끄러우면서도 고요했다. 웅성웅성했지만 아무일도 없었다. 옆에 서 있는 생판 처음보는 사람에게 이게 뭐냐고 물으려 했는데 갑자기 어디서 마이크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자세히는 들리지 않았지만, 전단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문득 몇 개월전 수능을 보기 전에 봤던 근현대사 교과서의 '만민공동회'가 떠올랐다. 다시 전단지를 보고, 숙취와 졸음이 낀 눈을 부벼 주변을 돌아봤다. 그제서야 여기저기 피켓과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이거 데모잖아!

중학교시절,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던 나였다. 한미FTA가 뭔지도 몰랐고 2MB가 뭔지도 몰랐지만 이 행렬에 조금 더 있어보기로 했다. 사람은 엄청나게 많았고, 나는 뭔가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까지도 술만 진탕 먹고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허벅지에 대해서 토론하던 나였지만 오늘 나는 지식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뭐 이런 느낌이었을까. 사람들은 걸음을 시작했고, 몇 가지 구호가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웅얼거리면서도 큰 목소리로 따라했다. 2MB와 광우병, FTA는 인기있는 단어였다.

시간이 얼마가 흘렀을까, 다리가 슬슬 아파왔다. 하필 핸드폰 배터리도 다 나간 참이라 시간을 알고 싶었다. 사람들은 멈추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몰랐지만, 그래봐야 서울이겠거니 했다. 내가 서울에서만 20년을 살았는데 까짓꺼 라는 생각에 계속 군중속에서 따라다녔다. 일단 나가려고 해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디로 가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 때였다. 아까와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여러분은 지금 불법으로 도로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해산하십시오!"
"이쪽으로는 행진할 수 없습니다. 불법 시위를 중단하고 해산하십시오!"

그 때였다.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평화롭던 공기가 가지각색으로 변해갔다. 집단이 뜨거워졌다. 나는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옆에 있는 모르는 사람이 갑시다 하며 앞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방송이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몰랐으나,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마이크의 목소리는 조금 더 다급해졌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나도 따라서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투툭

하고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다. 비가 오나? 하고 하늘을 쳐다봤는데 하늘은 맑았다. 갑자기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고함이 터져나왔다.

"저 새끼들이 물대포를 쏜다!"

주변이 혼란스러워졌다. 걸음걸이가 뒤섞였다. 누군가는 앞으로, 누군가는 뒤로, 또 누군가는 옆으로 서로를 비비며 지나갔다. 나는 어찌해야할 바를 모른 채 그 자리에서 밀고 밀쳐졌다. 물대포? 불 났나? 그때까지만 해도 물대포를 사람에게 쏜다는건 모를 때였다. 그리고 수분 뒤, 나는 찬물에 흠뻑 젖었다. 이런 개 ...

화가 났다. 내가 뭘했다고! 아 씨 뭐야! 하고 짜증을 내려던 찰나였다. 나는 어느새 군중의 최전선 변두리 가까이 까지 밀려나있었다. 앞에는 철가면을 쓰고 큰 방패를 쥔 경찰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격렬히 몸싸움을 하며 서로를 끌어내고 있었다. 짜증을 내려던 생각은 사라지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나는 목적도 신념도 없이 떠돌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화를 내고 욕설이 쏟아지고 그리고 그걸 말리는 사람들과 발길질을 내뻗는 사람들과 커다란 방패가 사람을 때리는 모습과 한 경찰이 방패를 또 빼앗기는 모습과..


"너 여기서 뭐하냐고!!!"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당황스러움과 무서움과 이상하게 속이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을 해결하지 못한 채 다시 군중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누구세요! 뭐에요! 놔요! 라고 했지만 걸음은 그 우악스런 손을 착실히 따라 뛰었다. 무서웠으니까. 비명과 고함소리로부터 멀어지고 아까 주변에서 보이던 얼굴과는 다른 얼굴들을 마주치면서, 아저씨들보다는 젊은 여학생들과 또래 애들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은 집단을 지나가면서 안도했다. 그치만 숨이 너무 가빴다, 나는 사람들이 좀 뜸해질 때까지 군중 사이를 뛰었고, 그제야 내 손목을 쥐고 마치 전장의 장수처럼 군중을 역으로 헤쳐나간 사람의 등짝을 볼 수 있었다. 단발머리에 가녀린 어깨, 잘록한 허리, 운동화에 반바..지? 작은 백팩을 맨 여자였다. 여자?

나는 손을 잡아 빼려했다. 그러자 그녀는 뒤를 휙 돌아보며 "빨리 안뛸래! 잡혀갈꺼니??"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아니 뭘 잡혀가요? 헉.. 헉.. "아 좀 빨리 뛰어봐 사내새끼가 진짜!" 와, 어떻게 마스크를 쓰고도 저렇게 빨리 뛰는거야? 주저앉고 싶을만큼 비척대며 겨우겨우 군중 사이를 빠져나왔다.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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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란맥
15/05/12 13:23
수정 아이콘
절....절단신공! 2편 기대하겠습니다.^^
돈보스꼬
15/05/12 13:30
수정 아이콘
어서 2편을....
클라우스록신
15/05/12 15:08
수정 아이콘
그래서 이쁜가요?

크크 농담이구 빨리 2편 주세요 ㅠㅠ
눈뜬세르피코
15/05/12 17:00
수정 아이콘
크아아 2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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