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무장 이성계를 고려 말의 영웅이자 조선 왕조의 창건자로 만들어준 것은 그의 군사적 업적에서 비롯되었고, 이 군사적 업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의 막강한 사병 집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병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던것은 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의 덕택이었고, 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은 동북면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왕조의 창건자 이성계의 힘은 동북면에 있었다.
동북면은 이성계의 선대가 오랫동안 머물며 세력을 일구었던 곳이다. 이성계가 무장으로서 활약할 당시에는 이미 어느정도 상당한 수준의 기반이 잡혀져 있었음은 자명하다. 이성계에게 있어 중요한 부분은, 선대가 일구어놓은 이 지역을 지키는 부분이었다.
이영훈은 태조사급방우토지문서(太祖賜給芳雨土地文書)' 고(考) 9 ~ 10p에서 삭방도(朔方道)의 지역은 고려 말기 국가에 대해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보았다. 물론 모든 삭방도 지역이 일반적으로 면세 대상지로 지정되었다는것이 아니라, 이성계의 토지에서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 지역의 경제력은 사실상 고려 조정과는 별개로 이성계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성계의 선대와 이성계 본인은 그들 자신의 역할과 힘을 통해 사실상의 면세 혜택을 누리며 자신들이 일구어 놓고 장악한 경제적 기반을 지킬 수 있었다. 문제는, 이성계가 이러한 기반을 지켜야 하는것은 조정의 통제 뿐이 아니라 외적의 침입이라는 요소도 있었다는 점이다. 고려 말기는 한반도의 북부와 남부에서 무수한 공세가 쏟아져내려오는 대혼란기였으며, 몽골계 군벌과 여진족, 왜구 등 온갖 적수들이 난립하고 있었던 참이다. 따라서 이성계는 이들로부터 자신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지키기 위해 갖은 힘을 다해야만 했다.
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도전은 1362년 나하추의 침입에서부터 있었던 일이다. 당시 이성계는 함주, 송원, 정평 등지에서까지 군사적 이동을 하며 군사작전을 벌였다. 당시 나하추의 군세가 수 만이나 되었던 만큼, 함흥 평야에서의 회전에서 대패했다면 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또다른 도전은 2년뒤인 1364년에 있었다. 이때는 최유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시기로,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의 정예 기병 차출을 요구하는 공민왕의 명령에 따라 1천여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서북면으로 이동한 참이었다. 이때 이성계의 종형제였던 여진족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는 1364년 1월 15일 군사를 일으켜 함주를 비롯한 화주 이북을 모조리 함락시켜 자신들의 판도에 놓는데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자 즉각적으로 대응하였다. 3일 뒤인 1월 18일 달천(㺚川)에서의 전투로 최유의 군대가 전멸이나 다름없는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며 서북면의 전황이 호전되었고, 1월 25일에는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의 침입도 최영 등에 의하여 저지당해 서북의 전투가 끝이 나자 이성계는 군사를 동북면으로 이동시켜 2월 1일에는 동북면 최남단의 철관(鐵關)까지 움직여 삼선과 삼개의 세력을 모조리 격파, 화주와 함주를 도로 손에 넣어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1385년에는 150여척의 넘는 왜구의 대규모 함선이 함주에 출몰하여 함주ㆍ홍원(洪原)ㆍ북청(北靑)ㆍ합란북(哈蘭北)등을 휩쓰는 사태가 있었다. 심덕부, 정승가 등이 이 왜구에게 별다른 대응조차 해보지 못하고 패퇴를 거듭하자, 당시 51세였던 이성계는 직접 출전을 자원하여 전장으로 나아가 이들을 모조리 격멸시켰다. 이 또한 왜구들로부터 자신의 세력지를 지키기 위한 행보였을 것이다.
이성계의 공백을 노린 삼선 삼개의 일시적인 위협을 제외한다면, 이성계에게 있어 자신의 세력을 지키는데 가장 위협적이었던 적은 다름아닌 여진족 호바투(胡拔都) 였을 것이다. 이는 호바투가 다름 아닌 이성계의 경제적 근간을 이루는 동북면의 백성들을 잡아갔기 때문이다.
1382년 정월 1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의주를 기습했던 호바투는, 이 해 7월에는 동북면의 백성들을 노골적으로 잡아가고 있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파견하여 이를 막게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실록과 고려사 등에서는 '이성계가 평소 이 지역의 군무를 담당하여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 으로 설명하였다. 신망이 있다는 부분은 기록을 쓰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표현을 사용한 부분이겠지만, 이성계가 이 지역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기록 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이성계가 출전을 자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성계가 북방을 방비하고 있는 사이, 이듬 해 1383년 호바투는 대규모의 침공을 감행한다. 실록이나 고려사 등에서는 이 당시 호발도의 군사 규모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것도 아닌데, 이지란신도비에서는 당시 호발도가 동원했던 병력이 무려 4만 기병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1385년의 한반도 지역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군사력이다. 이지란신도비에서의 언급 외에 당시 호바투의 병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이것이 과장된 숫자일 가능성이 높긴 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호바투의 침입이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도 이후의 정황으로 보면 분명하다.
이 당시의 침입이 굉장히 심각했다는 부분은 이성계가 취한 행동에서 나타난다. 이지란신도비의 기록으로 볼 시 최소 1362년 이전부터 이성계를 추종하여 이 당시에는 무려 20년이 넘게 이성계를 충실하게 보좌했던 이지란은 당시 모친상을 당하여 이성계의 곁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전투에 앞서 이지란에게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을 입고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라오라!" 國家事急, 子不可持服在家, 其脫衰從我
실제로 4만의 병력이 북방을 유린한다는것은 고려의 입장에서도 대단히 위급한 상황이긴 하겠지만, 동북면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이성계에게는 더욱 더 중차대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싸움은 이성계의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싸움인 동시에, 승패를 확신하기 어려운 전투였다. 따라서 이성계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한 장수이자 가장 믿음직한 이지란을 전투에 반드시 참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요구에 이지란은 마지못해 마지못해 상복을 벗고 울면서 하늘에 절을 올리고는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성계의 원정군에 합류했다.
전투가 펼쳐진 길주평야 지역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와 호바투의 군단은 길주 평야에서 교전을 치루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 군단의 선봉을 맡은 장수는 이지란이었으나 이지란은 초전에서 대패했는데, 후발대였던 이성계가 전장에 도착했을 당시 호바투는 횡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橫陣待之) 이성계가 어떠한 전술적 역량을 발휘하여 이 호바투의 횡진을 깨부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 왕조 사가들은 이성계의 전투에 있어 초인적인 역량을 미화하여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언급보다 이성계의 무용에 대한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때문에 오히려 이성계의 무장으로서의 역량을 알아내기 힘든 측면이 있다.
호바투와 이성계의 교전에서 호바투가 횡진을 치고 이성계가 전장에 도착한 다음, 벌어진 상황에 대한 기록 중에서 전황에 관한 기록은 이 부분이 유일하다.
太祖縱兵破之, 胡拔都僅以身遁去。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적군을 쳐부수니, 호바투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 갔다.
양군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 길주 평야라는 점, 그리고 묘사되는 언급을 통해 보면 양군의 전투는 일대 회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회전에서 이성계는 호바투의 대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호바투는 패퇴하여 물러나고 만다.
이성계의 승리로 호바투의 위협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그러나 호바투가 그동안 동북면 지역에 끼친 위협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호바투가 당시 동북면 지역에 끼친 위험성이 부각되는 시기는 바로 조선 태종 시기, 만산 군인(漫散軍人) 문제로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외교적 사건이 생겼을 무렵이다.
만산군인이란 바로 고려 말기 호바투에 의하여 붙잡혀 끌려갔던 동북면 주민들을 말함이다. 이들은 1402년 정난의 변 당시의 혼란을 이용해 대거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후 영락제의 강력한 강압에 못 이긴 조선에서는 이들을 다시 명나라로 돌려보내게 된다. 이 당시 명나라로 돌아간 만산군인은 무려 17,414명에 이른다.
장장 2만여명에 가까운 인원도 대단한 숫자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정난의 변의 혼란기에 조선에 들어왔던' 숫자만을 말함이다. 요동에는 더 많은 고려 출신의 사람들이 있었다.
"신(臣)이 《요동지(遼東志)》를 보건대,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高麗) 사람이 홍무(洪武)의 연간(年間)에 3만여 명이 되었으며, 영락(永樂)의 세대에 이르러서 만산군(漫散軍)이 또한 4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 요동(遼東)의 호구(戶口)에서 고려 사람이 10분의 3이 살고 있어 서쪽 지방 요양(遼陽)으로부터 동쪽 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남쪽 지방 해주(海州)·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聚落)이 서로 연속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에서 급급(汲汲)히 진려(軫慮)할 것입니다." ─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8월 1일(임오) 2번째기사
세조 무렵 양성지의 상서(上書)에서는 영락제 연간 요동의 만산군이 무려 4만여명에 달했다고 보고 하고 있다. 그 이전 홍무제 시기에는 3만여명의 고려 사람이 명나라에서 동녕위에 소속되어 있었고, 요동의 호구에서 대다수가 고려 출신 사람들이었으니 국가에서는 이들을 걱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수치가 조금 과장이 있을 수도 있으나, 앞서 말한 만산군인 송환 사례를 보면 최소 2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호바투에게 포로로 끌려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본래 살던 근거지에서 갑자기 포로가 되어 타국으로 끌려가, 이후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오고도 외교적 분쟁 때문에 다시 끌려가게 된 이들의 사정은 딱한 면이 있다. 다만 이 문제는 그들 자신의 운명 뿐만 아니라, 동북면의 기반과 관련해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여말 시기 동북면의 인구 숫자는 어느정도가 되었을까?
세종 실록 지리지에 따른 조선 초기 동북면의 인구 숫자는 14,739호에 인구는 66,978명에 이른다. 그런데 세종 시기는 바로 사면 정책이 이루어진 시기다. 세종 시기 4차례에 걸쳐 남방에서 사면된 숫자는 호구 9,500여 호에 인구 25,500명에 이른다. 이 숫자를 제외시키면, 본래 동북면의 인구 숫자는 9,500호에 41,000명이 된다.
그렇다면, 호바투에게 끌려간 인원을 17,000명으로만 보아도 고려 말기 동북면 인구의 3분의 1이 훌쩍 넘는다. 양성지의 말처럼 3만명에 달한다면 기존 동북면 인구의 거의 절반이 호바투에게 끌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는 거칠게 계산한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만 혼란스러운 고려 말기 동북면 지역의 인구 감소 실태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앞서 호바투의 침공에 대해서는 1382년과 이성계와 전투를 벌인 1383년의 기록만 언급했지만 호바투의 '인간 약탈' 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 18년인 1418년, 명나라 사신의 수행원이었던 소이옹불화(所伊雍不花)라는 사람이 사사로이 북청에 사는 자신의 숙부 아이불화(阿伊不花)에게 보냈던 편지가 중간에 조정으로 올라와 "이렇게 편지가 왕래되는것은 기밀을 누설할 수 있다" 는 말이 오간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편지의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갑인년에 호파두(胡波豆)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여직(女直) 대인(大人)을 배종(陪從)하여 백두산 북쪽의 새 목책성(木柵城)에 왔는데, 내가 소문을 들으니, 숙부께서 종제(從弟) 강길(康吉) 등과 사이 좋게 잘 지낸다니, 내가 나가서 서로 만나 보고자 하나……" ─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2월 20일(신축) 2번째기사
호파두란 물론 호바투를 말함이다. 이 말에 의하면 이 소이옹불화라는 사람은 갑인년 무렵에 호바투에게 사로잡혀서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갑인년이라고 하면 1374년으로, 호바투가 이성계에게 격퇴되기 무려 10여년 전 무렵이다. 호바투는 최소 장장 10년이 넘게 북방을 교란하며 수만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던 것이다.
이성계가 적극적으로 호바투를 격퇴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호바투에게 자신의 인적 자원을 뺏기지 않고 기반을 지키려는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이성계의 활약으로 동북면 지역 역시 호바투의 위협에서 구원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