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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3/31 01:59:01
Name jerrys
Subject [일반] 소풍, 워낭소리, 한 친구에 대한 추억


이 글은 원래 오래 전에 올리려고 써 놓았던 글인데 워낙에 게을러서 미루다가  밑에

 

"워낭소리" 리뷰를 보고 용기내어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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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1999)이라는 단편 영화가 있습니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단편 부분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송일곤 감독의 작품입니다.

송일곤 감독은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 영화의 편집을 누가 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화를 하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22살, 대학 시절, 제가 어려웠던 한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조건 저를 믿고 지지해준 적이

있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서로 직장생활을 하던 1999년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나 소주를 같이

기울이던 친구는 자기 집에 가자고 제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그 친구는 신혼 초였고 간호사인 와이프는 당직이라서 다음 날 오전 퇴근한다고 했습니다.

싸구려 양주를 까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 친구는 보여줄 게 있다면서 안방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가지고 나왔습니다. 바로 자신이 편집을 맡았던 영화 "소풍"이었습니다.

술기운이 오른 상태라 느린 템포의 무거운 주제를 가진 영화가 눈에 들어 올 리 만무했습니다.

우습게도 화면을 처음 보는 것처럼 열중해서 다시 감상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수백 번 이상을

보았을 그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송일곤 감독은 영화의 성공을 바탕으로 입봉작을 준비하게 되었고,

조감독으로 제 친구를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제작사는 송일곤 감독의 선택을 거부했습니다

자신들이 지명한 사람과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충무로의 자본은 "무명"에 가까운 제 친구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송감독의 전화를 받고 매우 곤혹스러워하던 친구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우연인지 그 전화를 받았던 자리에도 제가 있었습니다.)

누구나 송감독 같은 입장이라면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기회는 흔히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친구는 물러났습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되어 친한 동생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지요.




이 때문일까요. 아니면 본인의 기질 때문이었을까요.

이후 친구는 충무로와 멀어지고 상업 자본 영화와는 멀리 떨어진 독립영화.

그것도 돈이 안 된다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어느 날 저는 일 때문에 광화문을 지나가다가 그가 근무하던

영상미디어센터 앞에서 잠시 만나게 됩니다. 무척이나 더운 날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는 이제 스스로 감독이 되어 작품을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겐 창작보다는 제작이 더 맞는 길 같다는 얘길 하면서.

독립 다큐 제작을 하는 회사를 하나 차리겠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단호해 보였지만,

아이 둘을 가진 가장의 그러한 선택에 저는 응원을 해줘야 할지 마음속으로 갈등을 느꼈습니다.






2009년 초순인가, 휴대폰에 친구의 이름이 떴습니다.

사소한 분쟁에 휘말렸는데 도움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업종 관련 분쟁이라서 제 생각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대화의 말미에 "내가 요번에 영화를 하나 프러듀싱했는데 한번 봐라." 하더군요.

무슨 영화인지는 모르지만 없는 사정에 무리도 하여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융통하여 가까스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어렵다는 사정을 얼핏 들었는데 인생에 배수진을 칠 정도로 무리해서

돈 안 되는 "독립영화"를 만들었다니 저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제목이 뭐냐고 했더니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합니다.

구구절절 물어보는 성격이 못 되는지라 대충 알아듣고 나중에 네이버 검색창에

그의 발음을 상기하면서 검색어를 집어넣어 보았습니다.

"원앙소리" <---남녀 간의 이야기인가? 하면서

"원한소리" <---공포영화의 제목치고는 좀 유치하네? 라고 생각하면서.


나오질 않습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회자정리(會者定離)"를 몰라서 답답해하던 정일우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한참이 지난 후 그 영화의 제목이 "워낭소리"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워낭소리"는 극장가에서 하나의 신드롬이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그와 친분이 있던 친구들은 오해를 받기가 싫어서 오히려 연락을 끊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가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지인을 통해 이런저런 안 좋은 풍문들이 돌았습니다.

다 된 영화에 밥숟가락만 얹었다, 돈 벌더니 건방져졌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더라.. 등등.




...........




시간이 꽤 지난 2011년의 어느 날 대학 시절에 친분이 있던 선,후배들이 모여서 경기도의

한 펜션으로 엠티를 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모두 애엄마, 애아빠가 되어 애, 어른 합쳐서 거의 3~40명이나 되는 대부대가 모였습니다.

워낭소리의 그 친구 역시 올 거란 소식을 들었습니다.

역시 바쁘신 몸인지, 그는 밤이 늦을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고 슬슬 술자리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거대한 모임의 기원에 그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를 욕하는 친구는 없었지만,

술이 오른 사람들은 매우 세속적인 한 가지 주제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싼 외제차를 타고 올 것이다"

저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얘기했고 몇몇 후배들이 상당한 자신감으로

'누군가가 봤다고 하더라'라는 강력한 "카드라" 주문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호기롭게 내기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밤 10시가 되어 그는 상당히 비싼(!!) 그랜드카니발을 몰고 나타났습니다.






P.S. 제가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저 MT의 몇 개월 전에 그 친구의 차를 타고 멀리 지방의

후배 장례식에 갔기 때문이지요. 새벽인데도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가면서 친구와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보고 변했다고 하던데" 했더니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습니다.

"내가 변한 것 같냐?"


분명히 천운을 타고난 것 같은 타인의 삶에 대해서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천운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기저에 열정과 저지르는 무모함이

깔려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친구의 성공은 재미없어 졸고 있는 저를 옆에 두고, 자신은 수백 번 수천 번 보았을

"소풍"을 또롱또롱한 눈빛으로 다시 보던 그 시절부터 이미 예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P.S 2. 사실 이 글은 또다른 무모함을 갖고 있고 어느 후배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한 사전 이야기였는데

이 자체로 너무 길어져서 그냥 하나의 글로 마무리해야 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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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충달
13/03/31 02:06
수정 아이콘
성공하면 근거없는 루머와 비난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인가 보네요;;;
치킨마요
13/03/31 02:46
수정 아이콘
뭔가 뿌듯하면서도 씁쓸.. 하네요. 이참에 독립영화는 잘 안보는 편인데 한번 챙겨봐야겠습니다.
절름발이이리
13/03/31 11:53
수정 아이콘
추천
아마돌이
13/03/31 12:22
수정 아이콘
환경이 변하면 어느 정도 변하는게 당연한 걸텐데.. 보통 사람들은 변했다고 하는 말을 나쁜 곳에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죠.
다음에 친구분이 '나 변했냐?' 라고 물으면 '보기 좋게 변했네' 이렇게 대답해 주세요.
13/03/31 13:15
수정 아이콘
네 보기 좋게 변한게 사실입니다. 돈 없어서 못하던 손대지 못하던 치아를 이제야 교정하더군요.
이빨 고치고 머리 심고 뭐 그래서 많이 이뻐졌더라고요^^.
가만히 손을 잡으
13/03/31 20:50
수정 아이콘
흠 추천
Eternity
13/04/01 08:4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워낭소리> 제작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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