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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2/08 20:36:11
Name 마네
Subject [일반] ▶◀
평소 군청색 면바지에,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바로 점퍼를 입고 출근했던 저였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아래위로 깔끔한 양복을 입고 출근했습니다.
푸른 색 계열의 줄무늬 넥타이가 나름 상큼해보였지만,
오늘 저의 마음을 표현하는 드레스코드는 깔끔한 양복에 상큼한 줄무늬 넥타이가 아닌,
손에 들려있던 검은 넥타이였습니다.

오늘 낮시간이 비어 있을 예정이었고 다행히 별 일이 생기지 않았기에,
점심시간 무렵 차를 끌고 나와 서하남/강동IC 쪽으로 달렸습니다.
하이패스 건전지가 떨어져 본의 아니게 지난번에 미납했던 요금 820원을 요금소에 들러 내고,
심호흡 한 번 하고 백미러의 도움을 받아 검은색 넥타이를 질끈 매고,
듣도보도 못했던 병원에 첫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네요.


어제 빈소는 한산했었습니다만, 오늘은 그렇지 않은 듯했습니다.
기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다음 찍을거리나 쓸거리를 기다리는 듯 했고,
쓸데없는 오지랖 덕에 여긴 참 내가 왜 왔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그래도. 가시는 분한테 인사하는 게 오지랖은 아니잖아 라고 다잡고,
회색 유니폼 영정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상주분들께는 그냥 '팬입니다. 고생하십시오'라는 말씀을 드리고,
그래, 그래도 점심시간이니까, 임 선수가 쏘는 국과 밥 한 그릇 얻어먹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저의 또 하나의 희망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혈기가 넘쳐 흘러 항상 뜨거웠던 고2때,
지금 생각하면 참 귀여웠던 4개짜리 리그 2개로 돌아가던 프로야구.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로 이미 유명한 그 시리즈는 가뜩이나 뜨거웠던 저를 불타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경기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빨랫줄같이 아웃이라고 쓰면서 날아오는 듯하던 삼성의 홈송구가 홈쇄도하던 김민재 선수 머리에 맞으면서 굴절되어 세이프.
다 아시다시피 삼성 모 팬이 호세의 급소에 친 홈런, 그리고 그물에 풀스윙하는 호세, 마해영의 헬멧던지기 작렬..
이 경기에서 임수혁선수의 '딱'하던 그 타격소리와 함께,
지금 다시 봐도 너무나 해맑은 웃음과, 야구선수에게 어울리지 않는 참으로 귀여운 걸음으로 베이스 한 바퀴를 돌아 들어오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멋진 시간을 일순간 태워버려서였는지, 이듬해,
다들 아시다시피, 그는 잠실구장 2루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죠.

심장은 살아있으나 뇌의 기능은 다하지 못하는 상태, 허혈성 뇌손상.
그게 뭔지는 그때는 잘 몰랐지요.


의대에 입학하고, 참 느리고 느리게 하나하나 배우고, 이런저런 일로 학교에서 벗어나 2년간 삽질도 하던 어느 날,
연극 에쿠스가 그렇게 재미있다던데, 정말 백만년만에 연극을 한 번 볼까, 하고 생각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태조 왕건에서 '와 참 연기 잘하신다'라고 감탄했던 김흥기씨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과,
의식이 없는 상태로 기약없는 투병생활에 들어갔다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5년 어느 날, 대충 https://pgr21.com/zboard4/zboard.php?id=ace&no=40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났고,




그 이후 참 세상은 제게 많이 뒤바뀌었으며,
역설적이게도 당신은, 5년이 넘는 시간동안, 하나도 바뀌지 않으신 채,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채 누워만 계시지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의학용어가 Babinski (+) 입니다. 뵐 때마다 인사조로 발을 꼭 잡아드리면서 긁으면, 참 어찌나 강하게 반응이 나오는지.




차라리 모르면 나을진대,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은 갖되,
그것이 헛될 확률이 높기에 희망이 현실이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을 줄 아는 이성과 지식을 가지게 되고 맙니다.




심혈관계 수업을 들으면서, BLS provider라는 자격증을 받기 위한 교육을 받게 되었고,
( 심폐소생술에 대한 자격증입니다. 일반인 분도 누구나 따실 수 있고 교육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니, 관심있으신 분 확인해보세요.
  http://www.kacpr.org/main.php )
심폐소생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동영상의 시작은, 임수혁 선수가 쓰러지던 모습이었습니다.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제대로 받지 못해 좀 더 좋은 경과를 가질 수 있었던 찬스를 놓친 것에 대해 두말하면 잔소리구요.

물론 뇌기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제가 잘은 몰랐지만, 아무래도 다시 일어날 희망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기에,
자꾸 저의 상황과 오버랩이 되면서, 아.. 자꾸 이렇게 이성적인 생각만 하면 안되는데... 하고 마음을 다잡았더랬습니다.
게다가 저희 재단병원에서 임 선수가 오랜동안 투병생활을 했기에,
이런 저런 경로로 흘려들었던 그의 입원 당시 상황, 그리고 이후의 생활들의 단편들은
그냥 보면 전혀 아플 것 같지 않지만, 바람에 날려 볼을 쓰다듬으며 아픔을 주는 모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냥 그렇게 제 마음에 사막이 시나브로 생기고 있던 어느 날,
저희 어머님과 병소도 같으시고
이후 투병상황이나 나이나 여러 가지로 비슷하셨던 김흥기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게 됩니다.
속으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제게 한 줄기 희망이었거든요.
왠지 그 분께서 훌훌 털고 일어나시면, 저희 어머님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처음으로 주행하는 한밤의 시골길에서 전조등이 갑자기 나간듯, 갑자기 툭, 그냥 끊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2루에 오래 머물면서,
야구선수로서 저에게 승부의 짜릿함을,
멋진 포수의 모습을,
진짜 승자는 찬스에 나타난다는 드라마를 알려준,
그 선수가,


그리고 의식불명 환우의 가족들에게 동무같던 한 환자가,
기어코 3루가 아닌 하늘나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또 하나의 희망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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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물량
10/02/08 20:50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더불어 글쓴분께도 힘내시라고 말씀 전해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힘내라고 기합 한번 넣고 갑니다. 아자!
10/02/08 20:51
수정 아이콘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어머님은 꼭 일어나실겁니다.
3자가 드릴 말씀이 이것밖에 없네요.
Go2Universe
10/02/08 20:59
수정 아이콘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힘내세요.
하늘하늘
10/02/08 21:05
수정 아이콘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앞으론 절대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런 불상사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상상도 못할 고생을 하셨을 가족분들에게 위로를 해드리고 싶네요.
한분은 천국에서 남은 분들은 이승에서 이제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닥터페퍼
10/02/08 21:11
수정 아이콘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네요..

임수혁선수, 당신은 기적을 바라는 모든 이들의 염원에 보답하지 못했네요.
그래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기적을 바랐던 사람들은 당신에게 이미 돌려줄 수 없을만큼 많은 것들을 받았던 '팬'들이니까요.
이쥴레이
10/02/08 21:17
수정 아이콘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머니의아들
10/02/08 21:32
수정 아이콘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희망을 놓지 마세요.
LowTemplar
10/02/08 22:08
수정 아이콘
하늘에서는 즐겁게 야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피치 위에서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꼭 일어나길.
항즐이
10/02/08 22:16
수정 아이콘
저 윗동네 리그에,

거물급 포수를 영입했다더군요.

시원한 미트소리와 경쾌한 배트소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더 아름다운 리그에 데뷔하시는 것을, 축하합니다.

영원히 즐거운 야구를 하고 계시기를.
여자예비역
10/02/08 23:24
수정 아이콘
고 임수혁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더불어 마네님 어머님께서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저희 고향 권사님 남편되시는 분께서도 뇌출혈로 쓰러지신지 꼬박 2년만에 정신이 들었고.. 5년이 지난 지금은 5살아이 같긴하지만 말도하고 스스로 걷기도 하십니다.
힘내세요..
지니-_-V
10/02/09 00:12
수정 아이콘
기적이 일어나길바랬습니다. 어렸을때 뛰던 영웅이 일어나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결국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하늘도 무심하다는 표현을 지금써야되는거 맞죠.. 눈물이 멈추질 않네요... 이제 좋은곳으로 가셨으면 좋겠네요.
LunaticNight
10/02/09 00:29
수정 아이콘
아.. 경기는 삼성으로 기울고.. 그 때 정말 속상했었는데.
다시 한번 그런 역전패를 해도 좋으니 일어나셨으면 좋았겠네요.
앞으로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글을 읽다보니 임수혁 선수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은 훌륭한 선수이자 좋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 선수는 떠났지만 마이네이션 님 어머니는 꼭 일어나시길... 힘내세요.
Naraboyz
10/02/09 01:04
수정 아이콘
▶◀
Rationale
10/02/09 03:43
수정 아이콘
▶◀ 삼가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마네님 어머님께서도 어여 훌훌 털고 일어나실 거라고 믿습니다.
로리타램피카
10/02/09 21:21
수정 아이콘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찬란한 삶을 살다간 이들의 빈자리는 유독 크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마네님 희망을 잃지 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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