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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11/05 23:20:58
Name 마스터충달
Subject [일반] 러닝 기담
※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만, 많은 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년부터 매일 1시간씩 달리고 있다. 사실 매일은 아니다. 매일 달리려고 해야 일주일에 4~5번은 달리게 되더라. 어쨌든 달리기는 이제 일상이 됐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일상과 마찬가지로 별 희한한 일도 일어나곤 한다. 한번은 뛰다가 새끼를 밴 고라니를 본 적이 있다. 고라니가 어쩌다 도심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3주쯤 뒤에 새끼와 함께 다니는 고라니를 또 목격했다. 아마 그때 그 고라니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사는 곳은 동탄 2 도시다. 널찍한 도로 양옆으로 아파트가 늘어섰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도 비닐하우스나 논밭이 쭉 늘어선 풍경을 볼 수 있다. 이 동네 러너 대부분은 동탄호수공원을 찾는다. 달리기 좋은 곳이다. 자연스러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풍경도 예쁘고, 코스도 잘 꾸며놨다. 하지만 나는 오산 쪽으로 흐르는 장지천 길을 주로 달린다. 호수공원은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장지천도 달리기 좋다. 대부분 평지라 기록 내기도 좋고, 무엇보다 한산하다. 다만 해가 지고 나면 조금 무섭다는 단점이 있다. 뭐 그렇다고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다. 100~200m 간격으로 산책하시는 노부부나, 나처럼 달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0월까지는 아이들도 많이 보였는데, 11월이 되고부터는 날씨가 추워서인지 아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장지천을 달리는 중이었다. 슈퍼문이 뜨는 날이라고 하는데, 달은 구름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몽환적으로 보이는 게 내일 비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묘한 분위기를 더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막걸리 자신 듯한 영감님 한 분을 뵌 것 빼고는 강변로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말했지만, 해가 지면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든다. 오늘은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다 앞에서 달리는 사람을 발견했다. 내가 그리 빠른 건 아니다. 한 시간에 10km 정도 뛰는 수준이다. 그래도 나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호수공원을 달려야 나를 제치고 가는 사람을 3~4명 정도 만날 수 있다.  장지천을 뛸 때는 거의 보지 못한다. 이 사람도 내 앞에서 등장했으니, 내가 더 빨리 달리는 셈이다. 50m쯤 떨어진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그 사람은 거리가 좁혀질수록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자치고는 큰 키였다. 170은 확실히 넘어 보였다. 다리도 늘씬하게 길어서, 뛰는 자세가 시원시원했다. 뛸 때마다 길게 내려온 생머리가 좌우로 찰랑거렸다. 하얀 나이키 러닝화에 하얀 양말이 레깅스 위로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허리는 메고 있는 러닝 벨트 때문에 무척이나 잘록해 보였다. 뭐랄까... 뒷모습만 봐도 미모가 뿜어져 나오는 사람이었다.

거의 지나칠 무렵 한번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지나치면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너무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예쁘면 가뜩이나 시선 때문에 스트레스받으며 살 텐데, 거기에 나까지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나이쯤 되면 예쁜 여자도 그냥저냥 시큰둥해진다. 중요한 건 달리기다. 그동안 컨디션이 별로라 1시간에 8~9km 정도로 그쳤는데, 오늘은 꼭 10km를 넘고 싶었다.

그렇게 또 아무도 없는 하천길을 달렸다. 오늘은 정말 사람이 없었다. 조용한 공기 속에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속으로 bpm을 하나둘 세는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니 오산시 장례식장이 보였다. 여기부터는 오산시다. 이때부터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진다. 지자체에서 돈을 덜 들인 티가 난다. 뭔가 더 어둡고 음침한 기분이 든다. 더 달리면 가로등도 없는 구간이 나온다. 조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벤치 높이만 한 구조물에서 희미한 불빛을 뿜는 장치가 있긴 하다. 하지만 너무 흐릿해 그저 길에 뭐가 있다는 것만 감지할 수준이다. 그래서 깜깜할 때 이곳을 지날 때면 종종 등골이 오싹해지곤 한다.

그때였다. 앞에서 누군가 달리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여기까지 달리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나처럼 열심히 달리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뒷모습이... 긴 생머리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아까 그 사람일까?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를 제치고 달린 지 10분이 훨씬 넘었다. 그동안 나를 지나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사람이 내 앞을 달리고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래 아마 다른 사람이겠지. 하지만 그 생머리가...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그 생머리가 눈앞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거리가 좁혀들수록 등골이 차갑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이 그를 지나쳤다. 나는 무서운 마음에 더 속도를 내서 그와 거리를 벌렸다.

하천길 끝자락에 있는 다리가 터닝 포인트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하천 반대편 길로 장지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내 달리기 코스다. 다시 또 어두운 구간을 지나고, 오산 장례식장을 넘어, 다시 화성시 구역으로 들어왔다. 가로등도 많아지고, 귀여운 토끼 구조물도 있고, 음산한 기운이 가시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내 앞에 또 긴 생머리가 보였다. 하얀 운동화, 하얀 양말. 레깅스, 러닝 벨트... 어떻게 내 앞에 있는 거지? 그래 아마 다른 사람일 것이다. 오산시 쪽에서 만난 사람은 어두워서 뭘 입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 더 어두웠던 생머리만 기억에 남았다. 이 사람은 아까 동탄 쪽에서 본 사람일 것이다. 나보다 짧은 코스를 뛰었을 것이고, 그래서 나보다 느려도 내 앞에 있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럴 것이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달렸다. 하지만 거리가 좁혀질수록 머리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하... 진짜 이 나이 먹고 왜 이렇게 겁이 많은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너무 어두워서 못 본 거 아닐까? 신발하고 양말밖에 못 봤잖아. 근데 똑같은 신발에, 똑같은 양말에, 머리 모양까지 똑같을 수 있나? 우연치고는 너무 확률이 낮은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나는 그를 지나쳤다. 아무 일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는 긴장을 풀고자 팔을 붕붕 돌리며 어깨를 풀었다. 그래 세상엔 별일이 다 있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달렸다.

그렇게 10분을 더 달렸다. 이제 거리는 7km를 넘었고, 슬슬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41분 30초. 오늘은 잘하면 10km를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또 긴 생머리가 보였다. 하얀 나이키 운동화에 하얀 양말이 레깅스 위로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러닝 벨트 때문에 잘록한 허리가 도드라졌다. 뒷모습만 봐도 미모가 뿜어져 나왔다. 솔직히 더는 나를 속일 수 없었다. 나도 남잔데 예쁜 여자를 보면 인상에 남는 법이다. 그런 사람을 벌써 네 번째 보는데,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간하지 못할 리가 없다.

미칠 것 같았다. 진짜 너무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내가 방향을 틀면 왠지 나를 돌아볼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거의 지나칠 무렵이 되었을 때 나는 속도를 높였다. 빨리 지나가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옆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갑자기 호기심이 들었다. 벌써 네 번이나 마주쳤지만,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사람일까? 사람이겠지? 그럼 얼마나 예쁠까? 그렇게 땅으로 숙인 고개를 천천히 돌리려고 할 때였다.

"다라라라라라라락"

앞에서 자전거 바큇살 소리가 들렸다. 당장 부딪힐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그런데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둑 위쪽 도로에서 나는 소리일까? 하지만 높이가 높아 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안 되나 보다. 돌아보지 말라고 누가 나를 말렸나 보다. 나는 속도를 더 높였다. 이미 8km 가까이 달렸다. 다리가 풀릴 것 같고, 숨이 턱까지 찼지만, 더 세게 달렸다. 장지천 끝자락에 있는 교회 앞까지 와서야 겨우 멈춰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제야 뒤를 돌아봤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멀리 편의점 앞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컵라면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집에 도착하고 러닝 앱을 열어 보았다. 페이스는 킬로미터당 5.3분. 내 최고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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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25/11/05 23:34
수정 아이콘
동탄에는... 미녀들이 많다... 메모...
샤아 아즈나블
25/11/05 23:51
수정 아이콘
'귀신은 나이키를 신는다'
집으로돌아가야해
25/11/06 00:20
수정 아이콘
미모의 페이스메이커를 4명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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