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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3 15:02
유교적으로는 공자가 "가혹한 정치(세금)은 백성들에게 있어 호랑이보다 무섭다"라고 말했듯이 적은 세수를 걷어야 백성들의 삶이 풍요로울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래서 조선이 저런 식으로 운영되었죠.
다만 세수가 적었기 때문에 1) 국가 역량의 발전을 위한 큰 투자가 힘들었고 2) 중앙 정부의 통제가 흔들리는 시기에, 관료들에게 봉급이 들어갈 게 너무 적어서, 그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백성들의 고혈을 뜯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25/10/03 15:18
조선은 온 나라가 공부하는 국가였으니 크크크크
지방의 유지층이라고 해야할까요? 거기의 양반들이 꽤 도움 됐을거같습니다 물욕이 크게 없지만 공부는 충분히 해둔 선비들이 있었을거라
25/10/03 15:26
(수정됨) 정작 지역유지들이나 상인들은 엄청난 재산을 축제하고 있었다고하죠. 그들의 뒷배는 정부 고관들이고.....조선은 중앙의 힘이 강해서 지방을 통제했다기보단 지방을 유기해버리고 수도권에 모든 자원을 끌어모은 구조였다고 봅니다.
나라에 돈이 없다기보단, 왕이 돈이 없고 사대부들은 뒷주머니 낭낭하게 찼었던 나라가 조선이죠.
25/10/03 15:38
지방을 유기했다기엔 지방에 대한 통제가 너무 완벽했죠.
결국 지방 유지가 자발적으로 중앙의 통치에 협력하고 민중을 수탈했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 지방 유지가 수탈하는 민중들은 또 왜 체제에 순응하고 있었냐는 의문이 생기죠. 뭐 원해서 순응하는 건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큰 탈없이 유지되었으니까요.
25/10/03 15:40
민중들은 체제에 순응하다가도 이따끔씩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명종 시기 도적떼가 들끓는 것에 대해 사관이 도적(임꺽정 등)이 저렇게 성행하는 건 수령의 가렴주구 때문이라고 실록에 적었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세도 정치기에도 민란이 잦았구요.
25/10/03 15:46
세도 정치 때는 이미 조선의 행정력이 무너진 때니까 왜 순응했냐로 말하긴 좀 애매하고 조선 전기 200년 동안 대규모 민간이 하나면 좀 적긴 하죠.
25/10/03 15:49
민중들만 있으면 소요를 일으켜도 일개 도적떼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사상적 토대를 갖추지 못했으니까요.
양반 사대부들의 조선 왕조에 대한 충성은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반란은 적은 편이었구요. 양반 대다수까지 몰락한 세도 정치 즈음 되어서야 그 몰락양반+민중들이 합쳐져서 민란이 더 잦아진 거죠.
25/10/03 16:28
(수정됨) 중앙에서 지방을 유기해버렸으니 통제가 잘된겁니다. 발전을 안시키고, 사람간의 이동을 막으면 반란이 일어나봐야 규모가 작을수 밖에 없죠. 민중들 입장에선 반란을 언제,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니까요. 화난다고 사람 몇십명 모여서 몽둥이 들고 모여봐야 지방 토호들이 밥먹여주던 깡패들에게 역으로 두들겨 맞고 죽거나 반병신되니까요. 그리고 이런일은 위로 올라갈 일이 없죠.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건 반란을 막는거고, 그래서 사대부들이 농사가 가장 중요하고 상업은 비천한거라고 노래불러댄거죠. 상업을 하려면 이동을 해야하고, 그러면 민중들이 접하는 정보가 늘어나서 체제유지에 불리하거든요.
25/10/03 16:36
토호들이 밥먹여주던 깡패들이 대놓고 사병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유지하려면 돈이 들거 잖아요.
그 돈은 결국 마을 주민들을 수탈해서 나온 것일 테고 수탈이 심하면 마을 주민들이 아무리 깡패가 있다 해도 그게 유지가 되나 싶거든요. 그 정도면 거의 봉건제 사회라고 봐야 되고 봉건제 사회에서 중앙 통제가 잘되는 것은 또 신기하구요.
25/10/03 18:00
눈앞의 폭력앞에서 법과 정의는 무력합니다. 그리고 폭력을 행하는 사람보다 더 큰 폭력을 가진 사람들이 중앙에 있다면 저렇게 되는거죠. 당장 북한만봐도 알수 있습니다. 21세기의 조선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25/10/03 16:53
농사를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한 건, 유가 사상에서는 1차 생산물을 생산하는 농업이 중요하고 상업은 유통 과정에서 마진을 남겨 상품 가격의 차이를 이용해 이윤을 버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선은 땅덩이가 그리 토질이 좋지 않고 잉여 생산물이 많이 나지 않아 상업이 발달하기 애초에 힘들었습니다.
25/10/03 19:13
(수정됨) 사실 공자는 상업을 별로 까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 소싯적 그런 일을 했고 제자인 자공도 네임드 현인인데 상업 잘 했다죠. 맹자가 시장에서 이사나왔느니 농단이니 좀 천시를 보여주긴 했는데 이론성은.. 정작 부국 실용주의 이미지인 법가에서 상업의 폐해를 지적했고(금지는 아니고 '중상주의'인데 경제학적으로는 통제경제), 이후 한나라에서 유두법육(?)하면서 유교가 말씀하신 것처럼 좀 그렇게 됐죠.
중농억상이라는 것도 불교 다루듯 잘나가던걸 잡아버린 것은 없고 그냥 이념적 후순위 그 자체이며 어차피 국제상업이 죽은 시대라 말씀하신 것처럼 (맥락이 다른 용어긴 하지만) 비교열위인 상업을 포기한 수준이라 봅니다.
25/10/03 15:47
현대 대한민국의 행정력도 신기하긴하죠.. 공공서비스 전세계 탑급인데 그거도 모자라서 온갖 민원을 상전받들듯 해야되고 그정도 서비스를 유지해도 세금도둑 취급받으니 말이죠.
25/10/03 15:48
조선은 지역 유지들이 국왕이나 국가를 여러모로 이용해 먹는 구조라 모순적인 구조는 아니지 않나요?
국가가 공식적으로는 지역 유지에게 통치 대행으로 맡긴적은 없지만 비합법적 권한과 세금을 스스로 챙기며 가끔 업적작도 시켜주니 유지된거로 보이는데..
25/10/03 15:51
중앙집권이라고 하지만 조선정부는 지방 정부나 각 관청에게 재정적으로 상당히 많은 자율적인 권한(과 책임)을 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탐관오리의 부정 내지 정경유착으로 여겨지는 여러 행태들도 이러한 자율적인 재정권한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거나 중앙정부가 인식한 측면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의 비중은 약 5대5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앙정부에서는 비총제에 따라 정해진 액수만큼만 세금을 거두고는 지방재정의 운영에 큰 신경을 쓰진 않았습니다. 즉 중앙정부에서 파악되지 않은 지방 재정이 많았고, 이 것이 지방관들 재량으로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후기로 갈수록 시장경제도 발달하고 기근과 재난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커지면서 중앙정부의 씀씀이도 커졌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의 재정을 가져가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씀씀이가 커진 지방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정의 문란도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도덕적 해이도 크지만 지방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눈물의 똥꼬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얘기가 벗어났는데 이렇게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와 각 관서에 자율적인 재정권한을 부여한 것이 지금 관점에서는 비효율적이지만 당시의 행정력을 고려한다면상당히 효율적인 측면이 컸고 덕분에 중앙정부는 작은 재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파생되는 폐단도 상당하겠지만 뭐 그렇습니다?
25/10/03 15:58
명나라 형님을 본 받아 해금정책을 펼치고 초기에 여진족과의 전쟁으로 경계선을 강하게 그어버림으로써 외부요소가 덜 들어오도록 통제되었죠.
그럼 남은 것은 내부인데 조선정도의 중앙집권이라면 초기와 중기까지는 통제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듯 이게 초기에는 별 영향이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실험실의 무균실같은 환경이 되어서 통제하기는 좋으나 사회내부의 모순을 바꾸어 줄 역동성이 줄어들어서 현재의 북한처럼 시름시름한 상태가 되어버린거라고 봅니다.
25/10/03 16:02
지역 양반들은 무협 세계관의 협객이나 야쿠자랑 비슷하다고 봅니다.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역에 협을 내세운 협객들이 은원을 풀어주고 야쿠자들이 나와바리 관리하듯 조선도 지역 양반들이 고을 풍속을 단속했습니다. 종교에 가까운 성리학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지역 양반들은 정부에서 받은 벼슬도 있었고 신분 질서 상 우위에 있고 자기 성씨 집성촌 위주로 이익집단 형성도 가능했죠. 얼마나 뿌리깊은 풍속이었던지 1960년대까지 시골마을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주도하는 멍석말이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25/10/03 16:03
그리고 조선왕조가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접하면서 인상깊었던 의견 3가지가 있습니다.
1. 과거제를 실시하여 지배계층에게 충성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제공해주었다. 2. 진휼과 환곡 등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농업사회를 안정시켰다. 3. 향약, 대동법, 균역법 등 나름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적절한 개혁을 시도한 것이 왕조의 수명을 증가시켰다. 결국 19세기에 1,2,3이 무너지면서 왕조의 수명이 다한걸 생각해보면 저 개인적으로는 나름 그럴듯해보입니다.
25/10/03 16:46
갑자기 코락스 조선후기 대체역사물들 생각나네요.
웹소설일 뿐이라 학문적으로 엄밀하게 맞는지는 무의미하겠지만 전 그거 보고 조선의 '중앙집권'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졌거든요.
25/10/03 17:36
본문의 의문은 사실 조선 전기 대상이라서요.
후기는 이미 사뢰가 많이 망가져서 사회 불안이 심해졌죠. 조선 전후기 근본적인 사회구조는 동일한데, 이런 구조라면 후기처럼 사회가 혼란해지는 것이 맞는데 어떻게 전기는 유지가 되었는가? 이게 신기했습니다.
25/10/03 17:41
조선이 인구와 농지를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건 대체 어디서 나오는 환상인 지 모르겠네요.. 조선 인구나 토지는 좀만 알아봐도 그냥 총합으로 가면 언제나 6천만이 되는 명나라 인구나 마찬가지로 적당히 혼합된 수치에 불과할 뿐 전혀 정확한 수치가 아니란 건 알텐데요.
25/10/04 00:17
유럽의 봉건제는 지방영주가 군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고려호족 체제를 깨고 중앙집권을 해낸 점에서는 근대적인 것 같지만, 행정력이 강해지려면, '이성'이 강화되어야 하는데, 조선은 그 점에서는 근대국가라 하기 곤란한 것 같고요. 세금을 합리적으로 잘 거두려면, 이성적 질서가 발달했어야 했겠죠. 그게 안 되니까, 지방권력을 상당히 용인하면서 진행된 것이겠고요. 다만 문관 중심이란 점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곤란한 점이 있고, 또한 성리학의 위계 구조가 도덕적으로 돌아간 점에 반란의 곤란함이 있었던 것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반란을 막기 위해 유용한 하나는 '할 일'을 주는 것이었을 겁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반란의 원인 또는 도구가 되곤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조선 양반들에게는 글공부라는 할 일이 있었으니, 그점도 반란 억제로 작용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내부에 어떤 문제와 모순이 있든, 어찌되었든 반란을 막고 외침을 막으면 국가는 계속될 수 있는 거니까요. 반란은 없었어도, 상대 파벌을 역모죄로 몰아놓고 공격하는 건 있었던 걸로 압니다. 역모죄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거죠. 그것은 내란과 유사한 거라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로인해 권력 교체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겠고요. 어느 파벌이 득세하는지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아예 왕이 교체되기도 했던 걸로 알고요. 왕은 교체되어도 종교사직은 보존된 거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에 문제를 일으킨 네 가지가 있는 듯합니다.
첫째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점입니다. 병자호란이 있었죠. 조선 양반들 입장에서 소위 오랑캐에 힘에 밀려 산다는 게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둘째는 서자가 왕이 된 경우입니다. 셋째는 세도정치입니다. 이 세 가지는 유교적 질서에 반하는 것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정신적 문제가 심각해진다면, 그 뒤로는 도덕성을 잃고 부정부패가 많아지게 될 수 있는 거라 봅니다. 넷째는 삼림훼손입니다. 조선 후기에 숲이 많이 없어진 걸로 압니다. 숲이 없으면, 농사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걸로 압니다. 불쌍한 백성들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에 세금이 잘 걷히지 않아서 국력이 약해질 수 있을 겁니다.
25/10/04 00:37
참고로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이란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요. 프랑스의 경우에도 귀족들이 지방행정에 많이 참여한 걸로 압니다. 그 과정에서 일반 사람들과 교류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러던게 행정력이 점점 강화되면서, 공무원들이 일을 하고 점점 귀족들은 할 일이 없어진 걸로 알고요. 그것이 프랑스혁명의 맥락인 걸로 압니다.
그와 비교하면 조선의 행정력은 강한게 아니었던 거 아닐까 싶습니다. 성리학 질서와 과거제도에 힘입어 중앙집권은 강했어도, 행정력이 강한 건 아니랄까요. 행정력이 강하다면, 공무원들 임금은 국가가 줘야겠지요. 국가가 직접 임금을 주는 공무원들 수가 충분히 많아야 할 테고요. 그리고 세금을 합리적으로 거둘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수학 및 측량기술의 발달과 함께, 아마도 화폐일 것 같고요. 쌀이나 천을 화폐로 쓴다는게, 조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 25/10/04 01:11
(수정됨) 뭐 적장자 계승은 초기때부터 안지켜졌는데...2번은 별 상관 없을거같기도하고...
서자도 아니고 그냥 친척 방계를 입적시켜서 계승하기도하던거니까...
+ 25/10/04 02:04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에 조선의 왕은 영조(1694')와 정조(1752')였던 걸로 압니다. 국사책에서 영조와 정조를 훌륭한 왕이라고 배웠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저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추측하는 것입니다만, 세도정치로 들어서기 전, 영조와 정조 때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된게 아마도, 영조가 서자 출신의 왕이었던 점일 거라 생각합니다. 영조가 당대에는 정치를 나름 잘 했을지 몰라도, 조선 양반들의 정신과 그들 사이 담론에 어떤 영향을 미쳤겠냐는 것이지요. 중간에 사도세자도 끼어있었죠.
그들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감안해야 할 하나는, 양반집에도 서자가 있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차별과 무시, 또는 갈등이 있었을 테고, 그때마다 영조와 그 후손을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천주교가 탄압된 신유박해가 영조 ・ 정조와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주목해볼 포인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인들과 활발히 교류를 하면서 이것저것 배워야 할 시기였는데요. 조선말 고종 ・ 대원군 ・ 명성황후를 보면서 한탄하지만, 신유박해를 하고 세도정치에 들어선 이상, 그걸로 조선은 끝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 25/10/04 02:14
명예로 흥한 세력이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되면 망하게 되는 것이고,
연민으로 흥한 세력이 잔인해지면 망하게 되는 것이고, 도덕으로 흥한 세력이 정당성을 잃으면 망하게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망하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야만 또는 물질주의 부정부패를 보게 되기 쉬울 테고요.
25/10/04 00:29
댓글을 참고해서 AI와 대화를 나눠봤습니다.
Q. 조선은 어떻게 작은 정부로 지방까지 통치할 수 있었나? A. 중앙 정부는 강력한 정치적 통제 아래에서 (1) 최소한의 세금만 걷고, (2) 최소한의 관료만 파견하여 행정 비용을 절감했습니다. 대신 도덕적/사회적 통제 기능을 지방의 사대부에게 넘김으로써, 적은 비용으로 전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독특한 통치 시스템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Q. 사대부는 어떤 이익이 있어서 그런 걸 해주나? A. 사대부 계층에게 향촌 지배는 경제적 실리 + 사회적 명예 + 정치적 출세 가능성을 모두 보장해 주는 **'합리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에 500년간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Q. 그 사대부의 이익은 결국 백성을 수탈한 것 아닌가? A. 결론적으로, 조선의 향촌 사대부 및 향리 계층이 누린 경제적 이익은 백성들의 고통을 기반으로 했으며, 이 고통은 500년간 끊임없이 민란과 저항을 통해 표출되어 왔습니다. 조선은 질서가 잘 유지된 조용한 나라가 아니라, 계층 간의 수탈과 저항이 만연했던 나라였습니다. Q. 그렇다기엔 백성들의 저항이 별로 안 보이는데? A. 즉, 조선 초·중기에도 탐관오리와 향촌 지배층의 수탈은 끊임없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와 저항은 대규모 군사적 봉기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며 저항의 규모가 전국 단위로 확대되고 개혁적인 이념이 결합했을 뿐, 백성들의 불만과 수탈에 대한 저항은 조선 500년 내내 지속된 구조적인 문제였습니다. Q. 조선 초중기에는? A. 따라서 조선 초·중기에도 민란이 적었다는 것은 규모가 전국적이지 않았거나 기록이 미비했을 뿐, 지역적 항쟁, 대규모 도적 집단의 출현, 유망(流亡) 등을 통해 백성들의 불만이 끊임없이 표출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19세기에 행정력이 급격히 붕괴하며 전국적인 민란으로 터진 것은, 오랜 기간 누적된 사회 모순이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최종적인 결과였습니다. Q. 백성들은 왜 더 크게 분노하지 못했어? A. 결론적으로, 백성들은 수탈의 고통을 분명히 알고 분노했지만, 공포심, 생존 본능, 그리고 내면화된 순종적 이념이 결합되어 대규모 조직적인 혁명을 막았습니다. 이 장벽이 무너지고 **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정치적 각성)**이 생겨났을 때, 비로소 19세기에 전국적인 민란으로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Q. 공포를 유지하려면 돈이 드는데 적은 비용으로 유지했다며? A. 결론적으로, 조선은 평소에는 재정 부담을 최소화한 '작은 상비군' 체제를 운영했지만, 위기 시에는 전국적인 동원령과 정예 지휘부의 존재를 통해 압도적인 '강력한 관군'의 힘을 발휘하여 물리적인 공포를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즉, 강력한 관군 = 상시 유지되는 대규모 군대가 아니라, 강력한 관군 = 통제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순간에 효율적으로 동원 및 투입 가능한 군사력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Q. 효율적인데 왜 임진왜란 등에선 그렇게 쉽게 무너져? A. 결국 조선의 관군은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고 소규모의 국지적인 위협을 막는 데는 효율적이고 '강력'**했지만, 장기적인 대비 없이 평화에 안주한 '작은 정부'의 한계와 부패로 인한 군사력 약화가 겹치면서 대규모 전면전에는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Q. 결국 조선이 유지된건 외부가 안정적인 운 때문인 건가? A. 네, 조선 전기가 200년 가까이 비교적 평탄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내부 통제력의 견고함과 함께, 동아시아 정세라는 '운(運)'의 요소가 매우 크게 작용했습니다. 즉, 내부 모순이 폭발하기 전에 외부의 큰 위협이 없었기 때문에 체제를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25/10/04 00:38
대개 명제끼리 모순이라면 한쪽 명제가 거짓인거죠.
작은 정부로 지방통제 어케했냐? -> 못했다 가 역사적 진실에 가까울 거란 사실... 반역할 이유가 있는 집단에게서 반역할 힘을 뺐고, 반역할 힘이 있는 집단에게서 반역할 이유를 빼았는 건 현대 북'조선'에서도 잘 사용하고 있는 통치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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