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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7/05 17:08:45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runch.co.kr/@wgmagazine/164
Subject [일반] 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12) - 뒤늦은 깨달음, 경시제 유현 (4)
전편 이야기

경시제를 황제로 받들어 새로 세워진 한나라가 신나라를 곤양 전투에서 격파하자, 신나라는 붕괴되었다. 경시제는 신나라 공격에 큰 공을 세운 유연을 죽였으나 동생 유수가 몸가짐을 조심하자 그를 제거하지 못하고 도리어 지위를 높여주었다. 신나라의 수도 장안에서는 중신인 국사공 유수 등이 모반하고 한나라에 투항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장안 인근의 홍농군에서 일어난 봉기군이 마침내 장안성을 함락해 신나라를 멸했다.


왕망을 추억하는 경시제

비록 등엽 등이 이끄는 봉기군이 한군과 협력해 장안성을 함락했으나, 신나라 멸망의 혼란이 수습되려면 아직 멀었다.


우선, 등엽이 세운 교위 왕헌의 문제가 있었다. 왕헌은 신나라의 궁궐을 점령한 후 스스로 한나라의 대장군이라 일컫고 성 안을 장악했으며, 왕망의 후궁들을 차지하고 왕망의 수레와 의복을 사용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왕망의 옥새와 인수까지도 차지하고 있어, 자신이 왕망을 대신한 새로운 황제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23년 10월 9일(음력 9월 6일), 왕망이 죽고 사흘이 지난 후에야 등엽과 이송이 장안성에 입성했다. 뒤이어 한나라의 장군 조맹(趙萌)과 신도건도 도착했다. 이들은 왕헌에게 왕망의 옥새와 인수를 요구했고, 왕헌이 불응하자 신도건은 천자의 북과 깃발을 내세워 왕헌을 참수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예상 외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장안 근교에서 스스로 한나라의 장군이라 임시로 일컫고 봉기한 사람들은 한나라에서 왕망을 처단한 공로를 인정해 자신들의 칭호를 정식으로 인정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던 차에 왕헌이 죽자 이들은 자신 역시 왕헌처럼 제거될 것을 두려워했다. 더욱이 수도 장안성 주변 지역인 삼보 일대에서는 왕헌의 제거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어쨌든, 왕망의 머리를 얻은 한군은 이를 경시제가 있는 완으로 보냈고, 완에서는 왕망의 머리를 시장에 내걸어 왕망과 신나라를 공개적으로 단죄했다. 신나라와 왕망에 쌓인 백성들의 원한이 컸는지, 백성들은 왕망의 머리를 조롱했으며 어떤 이들은 왕망의 혀를 잘라서 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 왕망의 머리를 본 경시제의 반응이 뜻밖이다. 《후한서》 유현전의 내용을 살펴보자.


경시제는 이때 황당(黃堂)에 편히 앉아 있다가 왕망의 머리를 들어 보고 기뻐 말했다.
“왕망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응당 곽광(霍光)의 무리와 함께했을 것이오.”
총희 한부인(韓夫人)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이렇게 하지 않았으니, 황제께서 그 머리를 획득하신 것이 아닙니까?”
경시제는 기뻐하고, 이에 왕망의 머리를 완성의 시장에 내걸었다.


Huo_guang.jpg
곽광의 초상화. 경시제는 전한의 섭정이었다가 전한을 멸망시킨 왕망을 섭정의 모범으로 여겨진 곽광과 견주었다.


곽광이란 누구인가? 옛날 전한 소제(昭帝)의 섭정 대신으로, 소제 때에는 다른 섭정단 상관걸(上官桀)의 음모를 분쇄하고 소제를 지켜낸 공으로 모든 조정 대사를 자신에게 “관백”(關白),[1] 곧 먼저 아뢰게 하고 처리했다고 할 정도로 정권을 오로지한 인물이다. 소제가 죽은 후에는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세웠으나 그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빠르게 폐위하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선제는 곽광 사후 곽광의 아들들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곽씨 일족을 주멸했으나, 곽광 본인은 창읍왕의 패악을 징계하고 자신을 세웠다는 이유로 위대한 공신으로 대우했다.

후세에는 곽광을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으나, 선제가 의도한 대로 경시제 본인은 곽광을 한조를 지켜낸 훌륭한 신하로 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왕망조차도 곽광이 될 수 있었다면서 높이 추켜세웠다. 왕망은 한나라의 신하였을 적에 평제(平帝)와 자영(子嬰)을 모시면서 천명을 조작하고 자신의 위업을 선전했으며 이를 토대로 한나라를 폐하고 신나라를 세웠다. 그때 얻은 아름다운 이름이 심지어 신나라가 망할 때에도 경시제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의문이 들 정도다. 경시제가 들어선 이후 한나라에서는 평제를 독주로 독살했다는 선전을 펼쳐 왕망을 비난하고 신나라 공격을 정당화했지만, 경시제 본인은 왕망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던 것이다.


왕망에게 느끼는 애틋함과 유연에게 가한 잔혹함은 일견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손대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진 왕망에게는 동정을 보내면서, 자신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느낀 유연에게는 끝없이 잔혹해질 수 있었던 경시제의 태도는, 그가 정치적 위협에 과도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경시제, 유일한 천자

Xin_dynasty_people's_rebellion_유망추가.png신나라 말기의 여러 봉기군과, 경시제와 유망의 위치. 파랑은 녹림군, 빨강은 또 다른 유력 농민군인 적미를 보여준다.


신나라는 등엽과 우광의 거병으로 멸망했지만, 한나라에서도 이들에게 원군만 보내고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왕망은 곤양 전투의 패배 이후 완에서 낙양으로 바로 한군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음력 8월에 국장(國將) 애장(哀章)에게 낙양의 수비를 맡기고, 경시장군 염단과 함께 적미와 싸운 경력이 있는 태사 왕광(王匡)을 불러다 애장을 돕게 했다. 왕광은 왕망의 7촌 조카이기도 했다.


이에 경시제는 녹림군의 두 창시자 중 하나로 지금은 한나라의 정국상공을 지내고 있는 왕광(王匡)에게 낙양성을 공격하게 했다. 장안성이 함락된 9월, 마찬가지로 낙양성 역시 함락되었고, 신나라의 왕광과 애장 모두 한나라의 왕광에게 투항했다. 이들은 모두 완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또 대사마 주유와 교위 잠팽은 신나라의 양주목(揚州牧) 이성(李聖)을 죽이고 회양성을 평정했다.

신나라의 사명대장군 공인(孔仁)도 산동에서 패배해 병사들과 함께 한나라에 항복했으나, 신나라의 녹을 받았으므로 마땅히 죽어야 한다며 자결했다.

또한 조부감(曹部監) 두보(杜普), 진정대윤(陳定大尹) 심의(沈意), 구강연솔(九江連率) 가맹(賈萌) 등도 끝까지 한나라와 싸우며 저항하다 패배해 죽었다.


그러나 그 외의 고을들 대부분은 신나라에서 임명한 주목(州牧)과 태수를 죽이기도 하면서 한나라에 투항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자들 중에서는 상도대윤(賞都大尹) 왕흠(王欽)과 곽흠(郭欽)이 경사창(京師倉)을 지키다가 왕망이 죽자 항복했다.


신나라가 망조를 보이자 황제를 일컫는 인물은 경시제만 있지는 않았다. 하강병을 무찔렀으나 육수 유역에서 녹림 연합군에 패퇴한 장우와 진무는 신나라의 참패로 끝난 곤양 전투에서도 부장으로 참여했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신나라를 버리고 훗날 조조의 고향으로 유명해지는 패군 초현(현 보저우시)으로 가서 한나라가 다시 일어났다고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당시 경시제가 이미 황제로 즉위해 통치하고 있었으나, 장우와 진무는 그를 따르지 않았다. 유수가 장안에 유학했을 때 신나라의 고관으로서 유수를 만나보고 높이 평가한 장우는, 경시정권이 유능한 유연이나 유수가 아니라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유현을 택한 것에서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평림·신시병 주축으로 황제감인 황제가 아닌 자신들의 친분과 권력욕에 맞는 황제를 택했다는 것까지 자세히 알진 못했어도, 이는 장우에겐 ‘이상징후’로 인식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장우와 진무는 여남군 일대에서 거병한 옛 종무후 유망(劉望), 자 유성(劉聖)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유망은 청나라의 역사가 호삼성의 추정에 따르면 장사정왕 유발의 후예로,[2] 경시제·유연·유수와 마찬가지로 황실의 혈통을 잇는 인물이었고, 지리적으로도 강하군 종무(鍾武, 현 신양시 남동부) 출신으로 여남군과 인접해 있었다.


비록 당시 유망의 세력은 경시제보다 미약했으나, 그 성장 경로는 뚜렷한 대비를 이뤘다. 경시제가 유연·유수 형제의 기반에 의지해 황제 자리에 오른 데 반해, 유망은 친히 군을 이끌고 뒤늦게 거병했음에도 여남군 일대를 장악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이 점에서, 장우와 진무가 새 황제에 걸맞은 인물이라 기대한 것도 자연스럽다.

유망은 장우와 진무라는 옛 신나라의 고관들이 투항하자 자신감을 크게 얻었는지, 8월에는 황제를 칭하고 장우는 대사마, 진무는 승상으로 임명했다. 장우와 진무의 세력을 흡수한 유망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략 주마뎬시에서 보저우시까지 이어지는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일군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황제가 나타나자 경시제는 자신이 죽인 유연 대신 대사도로 삼은 사촌 형제 유사를 보내 유망을 공격했으나, 유사는 장우와 진무에게 격퇴되었다. 곤경에 빠진 유사를 도운 것은 유사의 조카 유신(劉信)이었다. 경시제는 유신을 분위대장군(奮威大將軍)으로 삼아 유사 대신 유망을 공격하게 했다. 유신은 경시제의 기대에 부응해 10월 여남 공격에 성공했고, 마침내 유망·장우·진무를 모두 죽였다. 이렇게 또 하나의 황제는 2달 만에 사라졌고 경시제의 세력은 관동으로 확장되었다.


장안으로, 유수는 하북으로

유망이 제거된 직후, 경시제는 낙양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유수에게 사례교위를 맡겨 궁궐과 관부를 정비하게 했고, 마침내 완을 떠나 낙양에 입성하여 유사를 승상으로 삼았다. 굳이 전한과 신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피한 것은 점점 더 심화되던 장안 정세의 불안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었다.


장안은 신나라의 옛 수도였고, 여전히 신나라 인맥과 기반이 살아 있었다.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신도건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신도건은 본래 신나라 고관 최발과 인연이 있어, 구 신나라 세력과의 협력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이 인연을 스스로 끊어내며 충성을 과시하려 하듯 최발을 죽였고, 왕망의 장인 사심(史諶), 왕연(王延) 등 항복한 고관들까지 가차 없이 숙청했다.

앞서 자칭 한나라 장군이던 왕헌을 죽여 봉기군 출신들까지 불안하게 만든 그였기에, 이번 숙청은 장안 전역에 더 깊은 불신을 낳았다


이러한 처사는 신도건의 충성을 입증하려는 과잉 행동이자, 새로운 정권의 협력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린 결과였다. 장안 일대의 군현들은 점차 한나라 명령을 따르기보다 스스로를 지키는 쪽으로 기울었고, 신도건과 이송은 더 이상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경시제에게 이를 보고하는 한편, 황제의 수레와 복식을 낙양으로 옮겨 천도를 지원했다.

신도건의 폭주는 유연 제거 이후 경시제 정권이 자기 세력조차 믿지 못하는 통치 위기의 출발점이었다.


이 무렵, 곧 23년 음력 10월 즈음 경시제를 찾아 낙양으로 올라온 한 종실이 있었다. 이름은 유영(劉永), 전한의 종실로 옛 양(梁)나라 왕인 유립(劉立)의 아들이다. 유립은 외가 위(衛)씨 가문이 왕망과의 권력 다툼에 말려들어가 제거될 때 같이 자결했고, 유영은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신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다시 일어섰다는 소식을 듣자 낙양으로 가서 경시제를 알현한 것이었다. 목적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후 경시제의 반응을 보면 양나라를 다시 일으켜 달라는 것으로 보인다.


경시제는 이 먼 친척을 외면하지 않았고, 양나라를 다시 세워주어 예전처럼 다시 수양(睢陽: 현 허난성 상추시)에서 왕노릇 하게 했다. 남양과 사례교위부(장안·낙양) 일대에 치우쳐 있는 한나라의 힘을 관동으로 펼치는 일이기도 했다. 유립이 기원후 3년에 죽은 지 20년, 양나라가 폐지된 9년 기준으로는 14년 만에 이렇게 양나라는 부활했다.


전한의 종실 제후왕들은 신나라가 세워졌을 때 일괄적으로 왕위를 잃었으나, 경시제 치세에 부활한 왕국은 양나라뿐이었다.


그리고 경시제는 이때 자신과 한나라의 길을 가르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 바로 자신이 죽인 유연의 동생 유수를 행대사마로서 하북을 순무하게 할 것인지를 놓고 망설이고 있던 것이다.

비록 유수가 유연 사후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며 경시제에게서는 인정을 받긴 했으나, 여전히 유수를 경계하는 대사마 주유 등이 반대했기에 경시제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사는 하북의 민심을 얻을 자는 유수뿐이라면서 강력하게 유수를 천거했고, 유사의 설득으로 결국은 유수를 하북으로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훗날 경시정권의 붕괴와도 맞물리면서 유수가 광무제로 등극하는 단초가 되었다.


훗날, 유영과 유수 둘 다 황제를 일컫고 누가 경시제를 대신해서 천하를 손에 거머쥘지를 다투게 된다.

Chang_Le_Gong_and_Wei_Yang_Gong_by_Bi_Yuan.jpg한나라 장안의 장락궁과 미앙궁 그림. 미앙궁은 신나라 멸망 때 파괴되었다.


경시제는 비록 낙양을 수도로 삼았으나 장안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포기하지 않아, 유사를 먼저 관중으로 보내 그곳의 종묘와 궁실들을 수선하게 했다. 장안의 백성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 왕헌 등을 죽인 신도건에게 반발하는 마음은 수그러들고 점차 황제를 맞이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이에 24년(경시 2년) 음력 2월, 경시제는 다시 낙양을 떠나 장안으로 향했다. 그런데 동관한기와 후한서 모두 이때 말이 제멋대로 달아나다가 북궁의 쇠기둥에 부딪쳐 세 마리가 모두 죽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장차 경시정권이 맞이할 취약성을 자연적인 수단으로 입증하려 하는 천인감응론의 좋은 예다.


연표

23년 음력 8월, 여남에서 유망이 황제를 일컬음.

23년, 유망이 경시제의 대사도 유사의 침입을 격퇴함.

23년 10월 6일(음력 9월 3일), 왕망 전사. 장안 함락. 신나라 멸망.

23년 음력 9월, 경시제의 정국상공 왕광이 낙양을 함락.

23년 음력 10월, 경시제가 낙양으로 천도.

23년 음력 10월, 경시제의 분위대장군 유신이 유망을 죽여 유망 정권을 멸함.

23년 음력 10월, 경시제가 유수를 행대사마로 삼아 하북 순행을 맡김.

23년 무렵, 경시제가 전한 양왕의 아들 유립을 양왕에 봉함.

24년 음력 2월,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


요약

경시제는 전사한 왕망의 머리를 받아 보고, 그 죽음을 동정하며 완의 시장에 내걸었다.

신나라의 대부분 지역은 경시제에게 투항했고, 일부 관료들만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했다. 여남에서 황제를 자칭한 유망도 경시제의 군에게 패해 사망했다.

그러나 장안의 민심을 수습하지 못한 경시 정권은 23년 음력 10월 낙양을 임시 수도로 삼고, 유수를 하북으로 파견했으며, 전한 종실 유영을 양왕으로 삼아 관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후 24년 음력 2월에야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각주

[1] 훗날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함인 “관백”의 어원이다.

[2] 호삼성은 유망을 장사정왕 유발의 현손의 아들이며 종무절후(鍾武節侯) 유칙(劉則)의 아들로 추정했다. 이 추정대로라면, 경시제나 유연·유수 형제들과 유망은 모두 장사정왕 유발의 5세손으로, 혈통상으로는 10촌 형제에 해당했다. 즉, 한나라 황실 내에서는 동등한 세대이지만, 매우 먼 남이라고 봐야 할 관계였다. 자세한 계보는 다음과 같다.

장사정왕 유발 – 장사대왕 유용 – 장사경왕(長沙頃王) 유부구(劉鮒鮈) – 종무절후 유도 – 종무절후 유칙 – 옛 종무후 유망(유성)?


사진 출처

그림 1: 왕은·왕사의, 삼재도회 중 곽광상, 1607년.
위키미디어 커먼즈, File:Huo guang.jpg, CC BY-SA 4.0.

그림 2: Jason22 제작, Xin dynasty people's rebellion.png.
위키미디어 커먼즈, File:Xin dynasty people's rebellion.png, CC BY-SA 4.0.
이 그림은 유망과 경시제의 위치를 추가하여 수정하였음.

그림 3: 화원, 관중승적도지 권4 중 ‘한장락미앙궁도’, 1776년.
위키미디어 커먼즈, File:Chang Le Gong and Wei Yang Gong by Bi Yuan.jpg,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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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是我聞
25/07/05 19:55
수정 아이콘
글 잘 읽고 갑니다
닥터페인
25/07/05 21:54
수정 아이콘
갱시정권 멸망의 단초가 보이는군요, 다음 회차가 사뭇 기대가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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