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든 좋든 자라면서 무의미를 배워가는 어른과 달리, 아기들의 모든 행동에는 의미가 있다. 익히 알려져 있지만 우는 건 배가 고프거나 어디가 아프다는 뜻이다. 주변 사람이 울 때 살살 접근하는 건 당신의 형편을 알아주고 싶다, 공감해주고 싶다는 마음의(혹은 본능의) 표현이다. 곤지곤지하는 건 소근육이 간질간질 발달하고 있다는 것이고, 누군가를 유심히 쳐다보는 건 모방하여 새로운 걸 익힐 준비가 됐다는 것이다. 소리 지르는 건 짜증이든 궁금증이든 흥분이든 자기 나름 해소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먹던 걸 나눠주는 건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자기와 동일한 존재가 거기에 있음을 알고 있다는 걸 나타낸다.
이런 일정한 성장의 신호들이 모든 아기들에게서 순차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게 신비롭다. 너무 신비로워 대부분의 우리는 알아채지 못한다. 소아과 전문의나 많은 아이를 키워 본 어머니들이 아닌 이상, 아이들이 온몸으로 발설하는 단계별 언어들을 우리는 해석하지 못한다. 그냥 귀엽고 예쁘고 우스울 뿐이다. 때론 시끄럽기도 하고. 부모와 아이의 소통은 그 어렸을 때, 가장 서로를 무방비로 사랑할 때부터 삐걱대기 일쑤고, 그래서 우리의 성장은 대부분 엉거주춤하다. 그렇기에 부모와 자식 간 사랑이라도 빈틈이 많고, 그 틈 사이로 시리운 것들이 드나든다.
우리 막내처럼 그 성장의 속도가 너무나 느려, 아무리 둔감한 아빠라도 그 과정 하나하나를 놓치기 쉽지 않다는 건 축복 중 축복이다. 시릴 틈새가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 위안이나 정신 승리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아이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기쁘고 즐거운 건 아니다. 수월한 삶도 아니다. 하지만 고군분투의 하루가 마무리되어, 자는 녀석 옆에 앉아 반추했을 때 행복의 총합은 늘 거대하다. 녀석은 그 작은 몸을 가지고 어디서 이 큰 사랑을 내 안에서 찾아낸 것일까. 내 주변에 이 큰 행복은 그동안 어떻게 몸을 감추고 있었을까. 순간순간의 고통은 결국 행복의 불쏘시개가 될 뿐, 아무것도 아니다.
난 첫째 때부터 아이들 목욕시키는 걸 담당했었다. 처음부터 자원한 건 아니었다. 작은 생명 손수 씻기는 걸 생전 처음 해보는 아내나 나는 오히려 서로에게 미뤘다. 무서웠다. 작디작은 것을 다치게 할까 봐. 우리는 한 동안 벌벌 떨며 아이를 같이 씻겼다. 그러다 아이가 목을 가누고, 대야에 스스로 앉기 시작하며, 급기야 욕실 벽을 잡고 설 수 있게 되면서 목욕시키는 건 수월해졌고, 어느덧 나 혼자 충분히 책임질 수 있게 됐다. 녹초가 돼서 퇴근을 한 후에도 아이들 씻기는 건 기꺼이 내 몫이었다. 하루 종일 홀로 아이들과 지냈던 아내도 나의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다 보니 목욕에도 묘미가 있었다. 특히 머리를 감기는 게 즐거웠다. 예비 아빠들은 귀담아들으셔야 한다. 목욕탕 의자에 앉아 다리를 모으고, 모은 허벅지 위에 아이를 똑바로 눕히는 자세가 핵심이다. 아이가 내 다리 위에서 천장을 바라본 채 누워있고, 나는 그 아이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조심히 감길 때, 둘의 시선은 아주 가까이서 무수히 마주친다. 아이는 말을 배우기 전에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가 됐을 때 그 소통의 법을 상기시키는 모양이다. 두 존재는 욕실에 앉아 말없이 말을 나눈다. 아이를 떨어트릴까 봐 늘 불안한 아내는 각종 머리 감기기 도구를 가져다주었지만 난 아이들과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첫째, 둘째가 그렇게 자랐고, 이제는 막내의 차례다.
엄마들이 수유할 때 아이와 그렇게 소통한다고 들었다. 가슴의 높이에서 엄마를 똑바로 쳐다보는 아이의 눈을, 가슴 쥐어뜯기는 와중의 엄마가 마주할 때의 만족감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단다. 여자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별 한 쌍을 가슴 언저리에서 얻는다고 하는데, 남자로서는 그 세계에 발을 들일 수가 없다. 그나마 가장 유사한 체험이 목욕탕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아기 씻기기는 내 아이를 가슴에 심는 의식이었다. 그 그리운 시간을 막내가 다시 되찾아 준 것이니, 난 막내에게 한없이 감사할 수밖에 없다. 아이가 느리게 자라는 게 꼭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진다.
다만 막내의 경우 한 가지 다른 게 있다. 첫째나 둘째와 달리 눈으로 소통하는 걸 잘하지 못한다. 허벅지 위에서 머리를 감길 때, 우리 둘의 눈이 마주한 채 유지되는 때는 거의 없다. 아이는 계속 울면서 버둥거리고, 나는 계속 균형을 바로잡는다. 첫째와 둘째 때는 오늘 잘 지냈니, 뭐 먹었니, 어쩌면 이렇게 예쁘니 하는 말들을 안정적으로 소곤거릴 수 있었는데, 막내 때는 미안해, 아빠가 빨리 끝낼 게, 이것만 하면 돼, 괜찮아, 미안해를 반복한다. 어찌 됐든 대화는 대화다. 자식과의 대화는 어떤 내용이든 즐겁다는 걸 배운다. 이 녀석이 언젠가 지 누나와 형처럼 나를 오랜 시간 똑바로 올려다볼 날을 기대한다. 넌 이미 내 가슴에 별이다, 아가.
재활 의학과를 드나들다 보니 알게 됐는데, 눈으로나 행동으로나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아기의 능력 혹은 특성을 사회성이라고 한다. 막내의 존재가 무조건적으로 좋지만, 그 아이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사회성을 바라게 됐다. 그 아이가 내 허벅지 위에서 더 반짝이는 별이 돼주기를 바랐다. 나에게 눈으로 말해주는 걸 상상했다. 그러려면 막내는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 먼저는 우는 사람에게 다가가 공감을 표현할 수 있어야 했고, 자기 먹던 과자를 나눠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아내는 시도 때도 없이 아이 앞에서 우는 시늉을 했다.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엉엉 울면서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했다. 아이에게 커다란 뻥튀기를 쥐어주곤 일부러 앞에서 입을 벌리고 ‘엄마 아’를 반복했다. 한 입 달라는 건 아가씨 때부터 아내의 특기라 위화감은 없다. 막내의 무반응만 빼고는.
어느 날 병원에 있던 아내가 메시지를 보냈다. 동영상이었다. 틀었다. 아이는 손에 커다란 뻥튀기를 들고 있었고, 그 앞에 아내가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익숙한 구도다. 영상 속 아이는 뻥튀기를 입에 넣느라 여념이 없었고, 아내는 고개를 아이 쪽으로 쭉 빼고 ‘엄마 아’를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뻥튀기만 보던 아이가 흘끗 아내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 템포 쉬더니 자기 손에 있던 뻥튀기를 엄마한테 쭉 내미는 거였다. 그 방향과 각도가 어찌나 정확한지, 뻥튀기의 끝이 정확히 아내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환호성인지 흐느끼는 건지 헷갈리는 소리를 내며 뻥튀기를 입으로 떼어냈다. 거기서 영상은 끝났다.
난 놀라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도 없이 성공한 거냐고, 우연히 된 거 아니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어쩌다 된 거였으면 영상을 찍었겠냐고 되물었다. 여러 번 성공했으니 각 잡고 촬영할 수 있었던 거란다. 오늘 작업 치료 시간에 ‘아’하고 입 벌린 상대 입 속에 과자 넣어주는 걸 연습했고, 꽤나 효과가 좋았다고 아내는 설명했다. 막내가 사회성이라는 목표로 한 걸음 내디딘 것이다. 그 짧은 영상을 그날 족히 100번은 재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하는 구도와 장면의 사진 한 장이나 클립 하나를 얻기 위해 사진가들이 얼마나 많이 셔터를 누르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사진이 보편화된 요즘, 여러 번 찍고 또 찍어 원하는 사진을 기어이 얻어내는 걸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기도 하다. 아내 역시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영상 하나 확보하기 전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을지 나는 안 봐도 잘 알았다. 그러므로 내가 그날 100번 넘게 재생한 건 단 몇 초짜리 영상 하나가 아니었다. 막내의 수없이 많은 성공 사례였다. 그리고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미 본 것 같은 내 허벅지 위 반짝이는 별 두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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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남짓 된 아이에게
'우유병 좀 가져다 줄래?'
라고 했을때 머뭇머뭇하면서 우유병을 처음으로 가져다 주던 때가 생각나네요
단순히 내 말을 알아들었네 말 잘 듣네~ 라기보다
이 아이가 우유병이 무엇인지 알고, 특정 오브젝트가 우유병이라는 명명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말하는 의도를 알고 그 의도에 맞게 행동하는게 무엇인가를 안다는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밀려온 감동은 정말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다면 절대 모를 감동이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행동 하나 말 하나에 의미를 많이 두고 생각하는 편이라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요
아이가 어떤 사회적인 행동의 가장 기초적이고 가시적인 피드백이었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는데, 글쓴 선생님의 막내에 대해 그 순간을 생생히 기록해 주신것을 통해 다시 한 번 그때가 생각납니다.
상황이 어려울 수 있지만 따뜻하게 풀어주시는 필력에 다시한번 무릎을 탁 치면서 늘 좋은 글 감사하고 또 기다리겠습니다
항상 글을 써주시면 저희 아이모습이 투영되어 읽혀서 감정이 배가 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흐흐
50개월 처음으로 아이가 말한날. 그날 찍어놓은 영상은 유튜브에도 올려두고 툭하면 찾아봅니다.
아마 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져도 그만큼 감격스러운일은 없었을거예요.
8살이나 된 주제에 아무리봐도 하는 짓은 4살이상으로 보기 힘들지만, 그래서 더 귀여운 아이를 보며 와이프랑 항상 이야기 합니다.
우리한테 더 오래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더 천천히 크는거 같다고.
다른 친구들보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건 내 모습 하나하나 놓치지 말고 다 지켜보라고 하는거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