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저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둘러보곤 합니다. 더 가끔은 충동적으로 구매하기도 하구요. 이 책, <계산할 수 없는>도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구매한 책입니다. 책이 정식 출판되긴 한 거 같던데, 소량만 출판하고 품절인지 절판인지 된 모양이더라구요. 여튼 근 2년의 시간 동안 책장에 있다가 드디어 읽어봤습니다.
<계산할 수 없는>는 처음 생각했을 때는 기술사에 대한 책인 줄 알았는데, 더 정확하게는 기술+미디어+철학이 종합된 형태의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짧은 각각의 챕터들을 따라 기술의 역사를 다루기도 하고, 기술을 정의하기도 하며, 기술이 이뤄낸 것들을 그려내기도 합니다. (애초에 저자 알렉산더 R. 갤러웨이가 문화 커뮤니케이션 쪽 학과 교수구요)
1장 '사진'이 분절과 병렬 처리에 대한 사진 초창기의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라면, 2장 '직조'는 직조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디지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간은 관계가 있으면서도 좀 멀어보이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이어서 규칙과 방식(4장 계산할 수 있는 창조물들), 연결과 소통(3장 디지털), 일종의 알고리즘(5장 결정화된 전쟁)을 거쳐 블랙박스(6장 블랙박스)로 이어지게 되는데, 본인의 생각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와 서사과 뒤엉킨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역사로 접근하기도, 철학서로 접근하기도 좀 애매한 지점이긴 합니다만, 동시에, 두 가지를 동시에 엮어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미디어'와 '네트워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이는, 혹은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들여왔던 방식의 세상은 시계열과 단일 방향이라는 방향성이 뚜렷한 방식이었다면, 컴퓨터가 제시하는 방식의 인지는 병렬, 동시 처리와 양방향(을 빙자한 단일 방향)이기도 하거든요. '사이버네틱스 이론'이 제어와 통제에 기반한 일종의 중앙-주변의 처리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제는 뻗어나간 네트워크는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가 굉장히 모호한 방식으로 그려지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다만, 이 책이 어떤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든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저 그런 상황임을 에피소드와 생각을 엮어 언급하고 제시할 뿐 책 자체는 굉장히 가치중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이미 변화는 한참 전에 시작되었고, 이미 우리는 그 흐름을 타고 있기에 그저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계산기가 불러온 '계산할 수 없는' 미래와 새로운 지평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라고 여기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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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례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한 모음집이다 보니 저자 개인의 철학적 지평을 가볍게 소개한다는 느낌이 강하더군요. 좋게 보면 사변적 논의에서 머물지 않고 구체적 예시들에서 출발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환기시키는데 탁월하지만, 나쁘게 보면 인문학 전공자의 블로그스팟 글들을 모아둔 느낌의 이도저도 아닌...
개인적으로는 동저자가 저술한 본격적인 연구서들(라뤼엘, 들뢰즈, 사이버네틱스 등등)이 소개되길 바랍니다. 사변적실재론/신유물론 담론이 여전히 국내 인문학계에서 관심 받는 상황이다보니 갤러웨이의 이 야심찬 시도, 사변적 실재론의 선배격인 라뤼엘과 신유물론의 사상적 원천인 들뢰즈를 연결하는 기획이 소개되기 가장 좋은 시점 아닐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