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모란 스트라이크 시리즈? 그게 뭐야? 누가 쓴건데?
코모란 스트라이크 시리즈(이하 CS 시리즈)는 현재까지 총 7권으로, 전세계적으로 50개국 이상에서 출판되어 43개 언어로 번역된, 2천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추리소설 시리즈입니다. 동 장르의 작가 중 히가시노 게이고가 100여권으로 2억~2억 5천만부 정도 팔린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권당 판매부수로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능가하는 대단한 시리즈물이지요.
물론 작가의 전작(총 7권,
판매부수 6억부+)에 비한다면 초라하고도 할 수 있겠지만요. 이쯤 짐작하셨겠지만, 이 작품은
조앤롤링 이 로버트 갤브레이스 라는 가명을 쓰고 집필한 추리소설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작가의 이름값에도 불구하고 1권이 7만부 가량 팔렸고, 그마저도 3권은 2만부 정도로 추락했습니다. 문학수첩에서 왜 4권 이후를 번역하지 않았는지 알만하죠.
#. 왜 한국에서는 안성공?
일단 한국시장에서 추리소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이너한 장르입니다. 저도 이 글 쓰려고 조사하다가 알았는데 장르문학으로 한정해도 시장의 5% 수준만 차지한다고 합니다. 일본이나 영미권에서는 문학 전체 시장에서 20~30%를 차지한다고 하니, 아무리 조앤롤링이라고 해도 성공하기 쉽지 않았겠지요.
[chatgpt가 알려준 한국과 해외에서 추리소설 시장의 정량적 비교]
게다가 아무래도 디테일한 서술이 매우 중요한 추리소설의 특성상 번역의 페널티가 다른 장르에 비해서 더 크다고도 볼 수 있겟습니다.
#. 그냥 재미가 없는거 아니냐
히가시노 게이고, 애거사 크리스티, 에드가 앨런 포, 댄 브라운, 아서 코난 도일 등 한국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해외 추리소설 작가들이 있는 것 보면, 결국 재미가 충분하지 않아서 안팔린거 아니냐.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제 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추리소설이 아니다
CS 시리즈는 일단은 추리소설로 분류되긴 하지만, 이 시리즈는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매우 다른 색채를 보입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추리소설처럼 마케팅하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추리소설이 재밌다고 하면, 기묘하고 복잡하지만 세밀한 사건이 있고, 그걸 주인공이 멋지게 해결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건이 얼마나 잘 설계 되었는지가 추리소설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됩니다.
CS 시리즈도 그런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독창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기묘하고 복잡하고 치밀한 사건 등,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매력은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CS 시리즈의 핵심 매력은 사건이 아닌 캐릭터에서 나옵니다. 조앤롤링이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보여준 적 있는 압도적인 캐릭터 메이킹 능력은 이 시리즈에서도 건재합니다. 아니 어떻게보면, 더 뛰어나다고도 생각합니다. 판타지도 아니고, 청소년을 타겟으로 한 것도 아니니 만큼 제한이 없어서인지 그야말로 살아숨쉬는 캐릭터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캐릭터들을 가지고 뭘 하냐면...
#. 사랑? 우정? 혹은... 불륜?
불륜로맨스물을 쓰고 계십니다. 두 주인공은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남녀로, 로맨스 관련해서 이야기가 끊임이 없습니다. 우선 남자 주인공(코모란)에게는 19년간 수차례 헤어졌다 다시 사귀는 것을 반복한 애증의 여자(샬럿)가 있고, 약혼까지 했었지만 작품시작과 동시에 파혼합니다. 그리고 샬럿은 파혼이후 2주만에 귀족가문 공자 - 전남친이기도 한 - 와 약혼하고, 나중에 결혼까지 하지만 끊임없이 주인공에게 질척댑니다. 코모란은 여전히 샬럿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만, 이제는 그녀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매번 그녀를 밀어내지요.
그런데 샬럿은 여주가 아니에요. 따로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로빈이고, 풀세팅하면 걸어가기만 해도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미녀죠. 그녀는 코모란과는 정반대로 작품 시작과 동시에 매우 잘생긴 회계사(매튜)와 약혼합니다. 그리고 3권 마지막에 그와 결혼하지요. 그런데 매튜가 4권에서 바람피고 있었음이 들통나고, 5권에서 공식 이혼을 합니다.
그리고 코모란과 로빈은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서로에게 감정이 싹트고, 자라나게 되지만,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숨깁니다. 표면적으로는 사랑하면 불륜이니까, 라는 이유긴 합니다만, 실제론 그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이들은 탐정일 -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을 구원하며 가해자들에 적법한 징벌을 내리는 일 - 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고, 탐정사무소의 두 대표 파트너가 연애를 한다는 건 너무 많은 리스크를 지게 되거든요. 거기에 두 주인공 모두 불우한 과거로 인해 성격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덕에 로빈이 이혼하고 코모란도 여자친구가 없는 시기에도 두 사람은 끝끝내 이어지지 않고 있죠. (일단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3월 시점까지는요)
제가 굵직한 4명만 소개했지만, 두 주인공의 연애 관련해서만 언급하더라도 조연급이 한 다스는 됩니다.
[대충 봐도 복잡한 연애 관련 인물들. 만약 연애가 아닌 우정,적대 등등의 인간관계도 포함하면 훨씬 더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한 인물관계를 조앤롤링 특유의 섬세하고 생생한 심리묘사로 풀어씁니다. 조앤롤링이 각잡고 스네이프와 릴리, 제임스 삼각관계를 글로 썼다고 생각해보세요. 볼드모트와 벨라트릭스는 어떻게 아기를 만들게 되었는지 쓴다고 생각해보세요. 상상만해도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관심을 끌기 위해 연애이야기를 잔뜩 쓰긴 했지만, 연애가 아닌 우정 혹은 가족간의 사랑, 그리고 복수와 배신으로 점철된 인간 관계도 매우 치밀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영국 런던의 잘나가는 사립탐정들의 사생활을 실제로 따라가는 기분이 들죠. 가장 최근 이야기에서는 사이비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너무 생생한 나머지 악몽까지 꾸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 작품은 추리소설임에도
사건이 아닌 사람에 중심이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됩니다.
#. 느림의 미...학? 미련?
그런데 일단은 추리소설의 탈을 쓰고 있다보니, 그리고 실제 인물처럼 서사가 쌓이다보니, 두 주인공이 각각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은 4권에서야 나옵니다. 그래서인지 해외에서도 4권 이후 평론가에게서나 대중에게서나 평가가 더 좋아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딱 3권까지만 번역되서 출간됨)
회차별로 도파민이 빵빵 터져야하는 요즘 미디어 시장에는 좀 안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저처럼 진득하게 빌드업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소설입니다. 최신 트렌드에 비하면 미련할 정도로 느려보이지만, 그만큼 촘촘하게 캐릭터의 감정선을 쌓는 소설이라구요.
속도보다는 깊이, 반전보다는 여운, 사건보다는 사람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소설이 오래 살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실 겁니다.
#. 아 그래도 느린 거 못본다고
그런 분들을 위해 짜잔! 이 시리즈는 영상화되어있습니다!
라고 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확히는 반만 맞는 말입니다. 이 시리즈는 드라마 시리즈로 나와있으며, 평가도 꽤 좋았고 뷰어쉽도 매 시즌당 600-800만 수준으로 호성적을 기록했습니다. 게다가 시즌당 2-3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미드처럼 시간을 쏟아부어야 할일도 없죠.
단, 영어로요.
제가 알기론 예전 웨이브인가 왓챠인가에서 시즌1을 볼 수 있었던 걸로 아는데, 그래서인지 시즌1만 한글자막이 있더라구요. 그외엔 한글자막 조차 없는 듯하고, 저는 그냥 포기하고 어차피 책 내용아니까 절반은 듣고 절반은 interpolation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영어가 되는데 느린 건 싫다면, 영드 Strike를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여전히 조금 느리긴 합니다만, 책보다는 더 빠르고, 무엇보다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두 주인공 캐스팅이 찰떡입니다. (작중 런던 최고의 미녀라는 샬럿 역 여배우가 좀 아쉽긴하지만... 제작비에 한계가 있었겠죠)
#. 많이 봐주셨으면 하는 이유.
제가 한달전쯤 문학수첩에 이 시리즈 4권 이후에 대해 번역 기고를 올렸고 아직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문 번역가도 아니고 영문학은 커녕 그냥 문학이랑도 관련없는 이과출신이지만 번역기고를 올린 이유는, 그만큼 이 시리즈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묻혀버린게 아쉽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화제가 되고 시리즈가 살아나서, 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떠들고 싶습니다. 제가 4,5,6,7권에 대해 번역초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까워서라도 제가 번역을 담당하고 싶긴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양질의 번역을 통해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영업글을 올려보았습니다.
여기까지 긴글 읽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