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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09:06
위나라 조조가 하북을 평정한 시점부터 유비나 손권이 둘중 하나의 밑으로 들어가 완전한 연합 형태가 됬어도 위를 상대해서 이기기가 힘들었을 거라는 말들이 많죠. 실제로 후대의 송 유씨가문이 그랬고..
24/12/03 14:34
서진이 팔왕의 난 때 종친왕들이 동원한 군세가 삼국지 시절 비슷한 판도의 군벌들이 동원한 군세보다 더 컷다거나, 동진이 오나라와 거의 유사한 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조 왕조들을 상대로 계속 승리하고 한떄는 장안을 일시 탈환했던 거 생각하면 조조가 유리했던 건 아직 한나라의 하북 행정 영향력이 살아있던 걸 점거할 수 있었던 게 크지, 이후 제도정비가 이뤄진 남조 상대로 통일을 못하고 오히려 역습을 당하기도 하면서 수백년 간 끙끙댄 북조 왕조들을 생각하면 모르는 일이기는 하죠
24/12/02 09:10
삼국지는 사실 소위 청류라는 카르텔의 지방호족들의 사가라고 봐도 무방한데 많은 매체에서 이를 너무 간과하더라구요. 오나라가 호족 연합체라고 하는건 많이 알려져있긴 한데 사실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죠. 삼국 군주들이 몇가지 씩 상식적으로 이해못하는 행동들이 나오는 기반에는 당시 중국 기득권 카르텔이 기본적으로 지방호족 위주인데 본인들이 나름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나옵니다.
유표가 혈혈단신으로 형주 부임하고 괜히 채씨집안, 괴씨집안과 결탁한게 아니죠. 조조나 유비같은 초월적 카리스마를 가진 보스들조차 완전히 지방호족을 통제하는건 불가능한 시대였습니다. 대중들이 삼국지를 볼 때 가장 간과하는게 마치 조선이나 후대 중국 왕조처럼 삼국 군벌들도 중앙집권 처럼 각자 영역을 다스렸을거라는 착각인거 같습니다.
24/12/02 09:15
근세 이전의 역사는 크킹하면서 이해해야하죠 흐흐
오히려 후대의 몽골이나 유럽처럼 퓨덜하게 분할된 경우는 원가 나 유표네 같은 정도 였다는 점도 특이사항 같습니다
24/12/02 09:43
유비는 기세를 이어 관우를 시켜 양양을 쳤으나, 조조와 손을 잡은 손권에 의해 관우는 살해되었다.
=> 관우가 독자 행동을 하다가 조조 손권 올스타 연합군에게 패배해 형주를 잃고 죽은 걸로 알고 있는데.. 관우의 독자 행동이 아니라 유비가 관우 보고 시킨 건가요?
24/12/02 10:17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78303
피지알의 삼국지 전문가 글곰님은 유비가 명령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보시네요.
24/12/02 11:27
유비가 관우에게 형주를 맡길 때 재량권을 줬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유비가 한중을 먹었으니 관우는 그것을 형주쪽에서 올라오라는 신호로 생각했는데 사실 유비는 그렇게까지 직접 지시는 안한.. 그렇게 봤습니다.
24/12/02 13:10
가절월을 줬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줬다고 볼 순 있지만 이미 조인은 내려와서 자리 잡고 형남 공략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니
그에 대응한 국지전과 방어전에 대한 재량권이라고 봐야지 형주 지역 전면전에 대한 재량권을 줬다고 보긴 어렵겠죠. 설사 형주 지역에 대한 전면전을 포함한 전권을 줬다고 해도 유비가 제지하지 않았다는 건 유비의 뜻이 들어 갔다고 봐야 하구요.
24/12/02 12:49
유비 : 한중 양동작전으로 무력시위를 지시
관우 : 해보니 너무 쉬워서 혹시? 함 손권 : 이러다 조조 망하면 오는 더 망이라 뒤치기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4/12/02 14:22
관우 독자 행동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크게 보면 한중에서 같이 호응해서 공격하는 대전략이긴 한데 어느 정도 재량권을 준 상태에서 관우의 급발진 + 초기의 의외의 성과 때문에 어 이게 되나? 오판하다 망한걸로 보더라고요.
24/12/02 11:37
고평릉 직전까지 사마씨는 경쟁자인 조씨나 하후씨와 협력하면서 은인자중하던 시기였죠. 사마의가 오래살기도 했고 조비, 조예의 탁고대신인 덕분에 그 권위가 점점 막강해지긴 하고 있었기에 은연중에 견제가 들어가고 있긴 했습니다만...
24/12/02 12:48
코삼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가 장로 세력이 자동 부근... 이건 확실치는 모르겠습니다만 강 상류다 보니... 검각 정도까지라고 봐야 하나? 여튼 꽤 넓게 그려놓은 것도 인상적이고, 그 다음에 동관 동쪽은 아예 흉노라고 박아버린 것도 신기하네요. 마씨 군벌도 그냥 흉노족 취급한 건가... 그래도 넓게 봐서 안정/서평까지는 한족의 행정력이나 영향력이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이유가 있겠지만 코삼식 지도에 절여지다 보니 이런 해석이 신기하네요
24/12/02 12:55
저기 북쪽의 흉노라고 되어 있는 애들이 흉노랑 탁발부 선비들인데 병주의 서쪽 절반 오르도스를 저 당시에 후한이 포기했었습니다. 원래 코삼에 나온 병주 영역보다 한나라 병주 영역이 넓었었어요. 병주 서쪽이 이민족의 침공을 결국 견디다 못해서 폐군된 거죠. 그래서 코에이 삼국지 14 보시면 저 지역에 대놓고 '선비족' 성이 있고 거기랑 동맹을 맺거나 아니면 그 성을 점령해서 선비족을 이민족 군대로 쓸 수도 있죠.
장로 세력은 보통 한중 지역에만 있었다고 보기 쉬운데 파군 인근까지도 세력이 미쳤습니다. 그래서 유장이 방회 시켜다가 거기를 막고 그랬었지요.
24/12/02 17:40
아 저는 그쪽보다 양주쪽을 생각하긴 했습니다. 저 이미지의 원본(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4/Topographical_3K_gif.gif)에서 보면 한중 북쪽에 양주로 가는 길(youfufeng, 우부풍이라고 되어 있네요) 이쪽은 한수나 마등/마대 등의 군벌이 잘 보이네요.
24/12/02 14:11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되는 바로는 조예는 군재가 오히려 아버지보다 빼어났다고 볼 수 있고 즉위 초의 혼란을 노린 투컬러 러시를 중앙에서 견적내서 말끔히 막고 실제 전선 운영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권위를 스스로 세웠다고 보입니다. 이후 전선이 안정되어 실질적인 외부 위협이 없어지다시피하고 불우한 환경의 반동인지 모를 일이나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해도 생전에는 폭주하는 황권에 대해 감히 도전할 엄두를 낸 신하가 없었죠.
만약은 없지만 33세의 나이로 후계문제를 미궁으로 둔 채 요절하지 않고 한 15년만 더 살았으면 혹정으로 내란이 일어나 자멸할 수 는 있어도 사마씨가 나라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온전히 정권을 탈취하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24/12/02 15:15
합비와 건업에서 그렇게 투닥투닥하고 강릉과 양양 사이에서 그렇게 투닥투닥해도 결판 안나던게 5개월만에 오가 망한걸 보면 역시 군주가 멀쩡해야 버티기라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24/12/02 16:36
사실 군주랑은 별 상관이 없고요. 촉이 망해서 장강 상류 오픈된게 오한테 치명타였죠.(일반적으로 손호보다 평가가 좋은 손휴도 촉 망하니까 충격받고 오나라 미래 걱정하다 시름시름 앓다가 죽습니다.) 여몽 발안대로 영안 백제성 먹고 장강 삼협 상류를 틀어막던가 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나헌한테 막혔고...나헌이 만약에 오에 항복했다거나 하는 IF 발생했으면 이후 역사가 좀 달라졌을겁니다.
24/12/03 14:40
촉나라가 망하고도 군사적 압박은 늘었지만 한동안은 버티긴 버텼고 남북조시대에서 북조가 촉이 있던 사천 지역 영유기간이 긴데도 남북조시대 종결까지는 300년이 넘게 걸렸죠 형주의 방어라인이 무너진 데에 손호 집권 이후 엉망이었던 오나라 정세도 분명 영향은 있었을 겁니다
24/12/03 17:52
앞서 말했듯이 사천 지역 전체가 넘어가면 남조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몇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일단 사천 지역은 그냥 남북조 내내 남조랑 북조가 치고받고 싸우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북조에 사천이 넘어가던 시절에도 확실하게 남조가 버틸수 있었던건 이유는 파동군, 영안 이 지역은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북조의 구도를 보면 대부분 남조가 양양은 가지고 있었고요. 그 절체절명이라는 비수대전때도 동진이 파동군 이 지역만은 사수했어요. 이는 후세의 남송에서 몽골에 사천 대부분이 넘어갔어도 과거의 파동군-영안 지역인 합주 조어성이 남송 망할때까지 버틴 것에서도 알 수 있고요. 오히려 손호는 후대 남조마냥 양양도 없고 영안조차 없는 불리한 상황에서 16년이나 버텼다고 칭찬할 구석도 있습니다.
이런 면으로 봤을때 여몽의 양양-영안 라인 구축 대전략은 남조 천년의 방어선을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 앞서본 선구자적인 전략으로, 여몽의 대전략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4/12/03 18:03
그리고 까놓고 말하면 삼국 전체 구도가 무너진건 유비가 구축한 한중 방어선을 멋대로 강유가 바꾸고 그 때문에 촉의 방어선이 위에 너무 빠른시간 내에 뚫려서 사천 전반을 두고 촉이나 오 쪽에서 수습 불가능 상태에 빠진것에서 비롯되지 유선이나 손호 같은 군주 한 두 사람의 난정, 폭정 때문에 그런것이 아닙니다. 삼국지연의 때문에 이 부분 인식이 대중적으로 많이 왜곡되어 있지요. 심지어 손호에게 간언을 아끼지 않았던 오의 대신 화핵조차도 촉은 유비의 방어선을 충실히 따른 국가라서 그렇게 하루 아침에 멸망할지는 몰랐다고 얘기하고 오와 촉은 순망치한이니 국가적 위기라고 주장했을 정도입니다.
'촉(蜀)나라는 서쪽의 속국으로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며, 게다가 선주(先主 : 유비)의 통치 방법을 이었으므로, 그들의 수비는 오랜 시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복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입술을 잃어 치아가 시린 것(脣亡齒寒), 이것은 옛 사람들이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24/12/02 18:02
서진이 오래 못간게 이거죠.
> ???: 아이고 황제폐하 경하드리옵나이다~ 근데 폐하 등은 창으로 안뚫릴까요? > 신하들이 이런 생각 하는걸 뻔히 아는 이상 사마염은 신하들을 힘으로 억누를 수 없음 > 부패가 극에 달하고 백성들이 죽어나가도 황제가 컨트롤이 안됨 > 하다못해 황실의 힘으로 눌러볼려고 황족을 사방에 보내고 군사력을 몰아줌 > [팔왕의 난] > 서진과 삼국지 토탈워가 다같이 폭☆망
24/12/02 19:03
촉한처럼 마음 속이 어땠는지는 모를지언정, 겉으로라도 제대로된 대의명분을 내새워서 만든(&황위에 오른) 나라라면 일단 모인 맴버들도 그 대의명분을 거스르기 힘들다는 점이 참 큰 장점이라는 걸 커서 알았습니다.
제갈량 본인에게도 그럴 마음이 없었겠지만, 만약 제갈량이 진짜로 유비의 유언 듣고 혹해서 황제 자리 고려했더라도 절대로 못했을 것 같더라고요 크크 누가 그 밑에 말 들어주겠습니까
24/12/02 18:17
인상적인 부분은
1. 고간을 원소와는 별도의 세력으로 구분했다는 점 2. 장로 세력이 생각보다 컸다는 점 3. 200년 손권이 이어받은 땅을 보면 짧은 시간 동안 손책이 확장을 야무지게 해서 소패왕이라고 불릴 만 했다는 점 4. 이미 형남 4군도 별도의 세력이 아닌 유표 세력으로 분류했다는 점 5. 오환과 흉노 세력은 굉장했을 거라는 점 정도가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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