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04/27 05:39:57
Name Kaestro
File #1 중성마녀.jpg (106.0 KB), Download : 2537
Link #1 https://kaestro.github.io/%EC%8B%A0%EB%B3%80%EC%9E%A1%EA%B8%B0/2024/04/26/5%EB%85%84-%EC%A0%84,-%EA%B7%B8%EB%A6%AC%EA%B3%A0-5%EB%85%84-%EB%92%A4%EC%9D%98-%EB%82%98%EC%97%90%EA%B2%8C.html
Subject [일반] 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수정됨)


[5년 뒤에는 어떤 모습일 거라 생각하냐는 질문을 듣다]

최근 5년 뒤에는 어떤 모습일 거라 생각하냐는 질문을 면접을 보면서 자주 듣는 편입니다. 단순히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제가 되고 싶은 개발자의 모습이란 무엇이냐는 뜻으로 생각하고 여태 대답해왔지만, 저는 추구하고 싶은 개발자로써의 형태가 있는데도 이에 대답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삶에서 목표로 추구하는 것이 상상 가능한 형태를 이뤄내는 것을 넘어서, 제가 상상하지 못하는 영역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5년 뒤에 '규모가 10명 이상인 팀의 시니어 백엔드 개발자로써 후배들을 가르치며 성장하는 개발자'가 된다면 현재를 기준으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대기업을 가겠다든가, 트래픽이 현재의 페이스북만큼 발생하는 서비스를 유지보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강남에 집을 갖고 싶다, 결혼을 하고 싶다 이런 것을 성취하면 그것 역시도 굉장히 멋진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제가 가장 원하는 제 모습이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가치들을 부정하고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이렇게 정량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정성적이고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제 인생에 있어서 추구하는 형태의 것이 없는 것이 아닌데 이를 남에게 말하는 것이 힘든 것을 보니, 제가 이에 대해 아직 잘 알고 있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고민을 하기 시작하게 됐습니다.



[외부를 기준으로 목표를 정하던 5년 전의 나의 모습]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각이 닿은 지점은, 5년 전의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었느냐 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9년의 저는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수업을 듣거나, 네이버 클라우드 플랫폼에서 인턴을 하고 채용 전환에 실패해 실망하기도 하고, 과정에서 면접에 나올 법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완벽하게 습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면접을 보게 될 때 어떤 질문이 나와도 완벽하게 답변할 수 있을 정도로 학습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을 상반기의 공채 전까지 완료한 뒤 제 주변의 다른 친구들만큼 좋다고 평가받는 대기업 혹은 중견 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습니다. 지금 와서는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생각하지만, 그 때는 서류와 코딩 테스트를 통과하고 면접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어서 이를 보완하는 데 시간을 쓰자는 생각에 도달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당시에 제가 추구하던 목표들은 제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를 기준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회사를 가니까, 어떤 시험을 볼 때 나한테 현재 모자란 부분은 어떤 것이니까, 보통 언제까지는 다들 취업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활용하면 되는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장 내가 공부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눈을 돌렸고 컴투스라는 당시의 저에게 과분한 회사에 취업했음에도 2년도 채 안되어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5년 전의 내가 바라보고 있을 지금의 나]

5년 전의 제가 현재의 저를 바라본다면 제 인생을 실패했다고 규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원하던 만큼 좋은 랩과 대학원에 들어가서 박사 학위를 얻은 것도 아니고, 그 진로를 포기했는데도 제 주변의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사회적으로 뒤쳐졌다고 할 법한 직장에 힘겹게 취업했는데, 그조차 2년도 안되어 퇴사했고, 그보다 더 긴 공백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 5년 전의 제가 아니라도 현재의 저를 보고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꽤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겨우 좋은 대학 나와놓고 참 안타깝네.'와 같은 시선을 받을 것이란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의 모습에 꽤나 만족스럽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운동하고, 관심 있는 일에 글을 쓰고, 나를 이해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고, 집에 와서 이전에는 하지 못했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제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5년 전의 제가 생각했을 때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던 것이나 얻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 어느 것에도 도달하지 못했고, 제 손에 쥐어진 것들은 어린아이의 잡동사니들로 보이는 것들 뿐이지만 저에게는 그 하나 하나가 모두 너무 소중한 보물입니다.



[인생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란다. 그래서 재밌는거 아니겠어?]

이전의 저는 외부의 기준을 바탕으로 인생의 계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능력이 나름 좋은 편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게도 제가 가지고 있는 역량이 사회에서 좋게 봐주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노력을 통해 괜찮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잠들어 있던 폭탄은 대학교 졸업을 앞둔 시기에 터졌습니다. 강한 번아웃, 무기력증, 그리고 우울증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원하는 학점을 받지 못하고 원하는 대학원에 가지 못했을 때 이를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더 노력하고 몰아 붙여야 한다. 너는 그럴 능력이 있다'라는 자만심에 스스로를 계속해서 몰아붙인 저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방 밖을 나서기 조차 싫은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빠져나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제 능력이 아니라, 주변에서 저를 가엾게 여기고 밖으로 이끌고 나와 위로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준 소중한 인연들 덕분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을 지나오고 나니, 이제 인생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지게 됐습니다. 사실, 인생이 자기 생각대로 된다면 그것은 정말로 재미없는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제가 가지고 있는 조막만한 시야에서 나오는 상상의 산물을 시간을 지나서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생에서 발전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볼 때 내용들이 다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서 나오면 뻔해서 하품이 나오는 것처럼, 인생이 계획대로만 되고 있다는 것은 내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너무 안전한 길을 걷고 있는 중이란 증거라고 요즘의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보다는 제 생각대로 되지 않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제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5년 뒤의 이상적인 저의 모습은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식견이 아직 너무나 좁기 때문입니다. 그걸 말로 풀어놓으라 하면 아마 '시니어 백엔드 개발자가 돼서, 구글 같은 빅테크에 취업해, 좋은 동료들과 일할 수 있는 환경에서, 훌륭한 품질의 코드를 통해 성공적인 상품을 런칭하고, 젤다의 전설 같은 즐거운 신작 게임들을 플레이하면서, 지금 같은 블로그 글을 더 잘 쓰고 싶다."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보다 더 바라마지 않는 것은 5년 뒤엔 현재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개발자 중에서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아예 다른 직업을 갖는다거나, 게임이 아닌 다른 취미 생활을 즐길수도 있고, 블로그가 아니라 유튜브 혹은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여기 있는 것들은 아직까지 제 상상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니 이것을 뛰어넘는 아직 모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하고 있는 제가 된다면 그것이 가장 원하는 5년 뒤의 모습입니다.



[마치며]

현재의 제 모습은 분명 5년 전의 제가 원하는 것도, 상상했던 것도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의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5년 뒤의 저 역시도 지금을 되돌아보면서 대화했을 때, '나도 내가 지금 이러고 살 줄 몰랐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4/04/27 06:2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4/04/27 07:46
수정 아이콘
모자란 글 읽어주시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찌빠
24/04/27 08:50
수정 아이콘
글이 너무 좋네요. 나의 아저씨 엔딩을 떠올리게 해요. 평안함에 이르셨으니 이제 날아오르시길, 글쓴님의 하늘로요.
24/04/27 09:25
수정 아이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날아올라 봐야죠
24/04/27 09:08
수정 아이콘
외부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숙했다는 의미입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중요합니다.

길게 보면 5년 전, 5년 후라는 숫자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자신을 보게 될겁니다. 지금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겁니다.
24/04/27 09:26
수정 아이콘
말씀대로 성숙하고 내면의 소리에 듣게 되려면 일단은 현재에 집중하는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그러기 위해 일단은 지금 한순간 한순간에 집중하고 살려합니다.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360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9) 시흥의 열한째 딸, 시흥 [3] 계층방정18390 24/04/28 18390 8
101359 [일반] <범죄도시4> - 변주와 딜레마. [39] aDayInTheLife9577 24/04/28 9577 4
101358 [일반] [방산] 마크롱 : 미국산이랑 한국산 무기좀 그만 사 [84] 어강됴리17968 24/04/28 17968 5
101357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8) 시흥의 열째 딸, 군포 [9] 계층방정21294 24/04/27 21294 4
101356 [정치] 일본 정부는 한국을 적성국으로 보겠다는 건가 + 윤석열은 뭐하나? [34] Crochen10885 24/04/27 10885 0
101355 [정치] [단독] '이전 추진' 홍범도 흉상…'육사 존치' 적극 검토 [25] 주말10188 24/04/27 10188 0
101354 [일반] 삼성 갤럭시 S팬의 소소한 기능 [34] 겨울삼각형15799 24/04/27 15799 0
101353 [일반] (락/메탈) Killswitch Engage - My Last Serenade (보컬 커버) [5] Neuromancer8191 24/04/27 8191 3
101352 [일반] 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6] Kaestro9897 24/04/27 9897 4
101351 [일반] 키타큐슈-시모노세키-후쿠오카 포켓몬 맨홀 투어 [11] 及時雨10302 24/04/26 10302 13
101349 [일반] 인텔 13,14세대에서 일어난 강제종료, 수명 문제와 MSI의 대응 [63] SAS Tony Parker 16023 24/04/26 16023 9
101348 [일반] [개발]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完) [4] Kaestro9119 24/04/26 9119 5
101347 [일반] 테일러 스위프트 에라스 투어 도쿄 공연 후기 (2/7) [5] 간옹손건미축10972 24/04/26 10972 12
101346 [일반] 민희진씨 기자회견 내용만 보고 생각해본 본인 입장 [325] 수지짜응25190 24/04/25 25190 10
101345 [일반] 나이 40살.. 무시무시한 공포의 당뇨병에 걸렸습니다 [51] 허스키16338 24/04/25 16338 10
101344 [일반] 고인 뜻과 관계없이 형제자매에게 상속 유류분 할당은 위헌 [40] 라이언 덕후12751 24/04/25 12751 1
101343 [일반] 다윈의 악마, 다윈의 천사 (부제 : 평범한 한국인을 위한 진화론) [47] 오지의10775 24/04/24 10775 12
101342 [정치] [서평]을 빙자한 지방 소멸 잡썰, '한국 도시의 미래' [22] 사람되고싶다8569 24/04/24 8569 0
101341 [정치] 나중이 아니라 지금, 국민연금에 세금을 투입해야 합니다 [62] 사부작9888 24/04/24 9888 0
101340 [일반] 미국 대선의 예상치 못한 그 이름, '케네디' [59] Davi4ever15445 24/04/24 15445 4
101339 [일반] [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20] *alchemist*10936 24/04/24 10936 13
101338 [일반] 범죄도시4 보고왔습니다.(스포X) [48] 네오짱12538 24/04/24 12538 5
101337 [일반] 저는 외로워서 퇴사를 결심했고, 이젠 아닙니다 [27] Kaestro12678 24/04/24 12678 1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