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2/09/19 17:16:29 |
Name |
황무지 |
Subject |
단상 : '사랑'의 언어 |
'나는 - 너를 - 사랑해'라는 문장에는 여러 가지 외교적인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난 사랑하지 않아요', '난 당신의 말은 한 마디도 믿지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등등, 그러나 진짜 거절은 '대답 없음'이란 말이다. 나는 청원자로서 뿐만 아니라 발화자로서도(적어도 그 의례적인 표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부인되기 때문에 더 확실히 취소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부인된 것은 내 부탁이 아닌, 내 실존의 마지막 수단인 내 언어이다. 내 부탁만 거절하는 것이라면, 나는 기다렸다가 그것을 다시 시작하거나 재개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질문할 권리마저도 빼앗겨 버린 나는 영원히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에서)
그러나... 사실은...
이를테면
어느 남자가 어느 여자를 생각하며, 앞에 둔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하며 '사랑해'라고 말한다 해도, 독백한다 해도. 사실은 그것은 독백은 아니다. 적어도 '사랑의 언어'에서만큼은 '독백'이란 없다. 거절이든, 회피이든, 긍정이든... 실제적인 대답 이외에도 다른 형태의 대답이 있는데 그것은 발화자가 상정한 대상이 그 '상정한' 관계와 그 관계가 만들어 내는 공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대답이다. 그는 항상 어떤 종류의 응답을 전제하고 독백한다.
이쯤되면 알만하다. 결국 그는 미친거나 다름없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랑에 빠진 자'는 미친 자이다. 독백이 아닌 독백을 중얼거릴 수 있는 자. 허공 중에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 어두운 방구석에 귀신도 아닌 존재를 그려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
'사랑'은 관계이다. 감정이기도 하지만 '관계'가 아닌 '사랑'은 없다. 그 관계는...'사랑의 언어(실제적인 언어이든, 그저 감정 감상일 뿐인 것으로 입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든)의 교차...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며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이다. 순수하게 독백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언어는 없다. 모든 사랑의 언어는 '대화'이다. 짝사랑에 빠진 소녀가 일기장에 눈물어린 글을 적는다 해도
결국 그녀는 '그'가 자신의 '눈물어린 글'을 읽어주기를, 우연한 기회에 자신도 모르게 읽어 주기를, 그래서 어떠한 종류의 응답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응답을 기대하는 독백은 독백이 아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문장에는
'당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응답은 돌아올 것이다.
그 응답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는 다른 문제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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