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3/08/31 01:27:34
Name ijett
Subject [넋두리] 나의, 젊은 거장에게.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건 술만이 아니군요.

존칭 존대말 다 생략한 정말 발칙한 글이네요. 임테란보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삭제 여부는 운영진의 판단에 맡깁니다. )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건 우리 집 낡은 TV 화면 너머에서였지. 스타 한 번 해본 적 없던 내게도 당신의 그 눈빛, 승리에 목마른 그 무서운 눈빛은 충격이었지. 당신을, 당신의 세계를 발견함으로 해서, 내 삶에 어떤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예감이 들었지.
몹시도, 애처롭게 젊은, 찬란한, 눈 아프도록 현란한, 화려한, 극적인, 그래서 지극히 불안하고 위태롭고 낯설었던, 당신의 세계.
당신의 경기, 당신에 대해 쓴 글, 그 모든 것을 샅샅이 뒤지며 하얗게 지새웠던 수많은 밤들.

전설, 꿈, 낭만, 그런 것 모두 포기해 버린 내 삶에, 감동도 눈물도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내게,
당신은 보여 주었지. 그런 거짓말 같은 일이, 그런 동화 같은 얘기가 이 세상에 실제로 있을 수 있다고....
몹시 힘들 때마다, 당신이었다면 - 여기서 gg 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혼자 속삭였었지.

그래, 고백하지. 나는, 주책없게도, 그런 당신을 좋아하게 되고 말았어.
....물론 곧 후회하게 되었지만 말야.
다른 선수들이 이긴 경기는 감탄하면서 봤지만, 당신이 이긴 경기는... 주먹 불끈 쥐고 소리지르며 봐야 했으니까.
다른 선수들이 진 경기는 한숨 쉬면서 안타깝게 봤지만, 당신이 진 경기는 도저히 다시 볼 수가 없었으니까.
다른 선수들의 경기는 눈과 머리로 보았지만, 당신의 경기는 가슴으로 보아야 했으니까.

-나의 박서.

내 기억 속에서, 당신은 언제나 혼자였지. 단기필마로 적진을 사정 없이 휩쓸 때에도, 불바다가 된 전장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다 끝내 쓰러지는 순간에도.
그래, 기억 나. 당신은 언제나 혼자였지. 당신이 서 있던 정상은 몹시 좁아서,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었지. 가파른 절정의 인생. 파랗게 날이 선 긴장으로 가득 찬 나날들. 99.9%의 사람은 못 보고 죽는, 바로 그 가혹한 정상에, 당신은 언제나 홀로 서 있었지.

그래도 정상이란 참 묘한 곳인가 봐. 정상처럼 외로운 곳은 없지만, 정상처럼 외로움을 느낄 틈조차 없는 곳도 없으니까. 어느덧 느끼지 못했던 스산한 바람을 깨닫는 것은, 이미 자신이 더 이상 정상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 영원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서 있는 그 곳이 정상이 아님을 알았을 때 나도 몹시 쓸쓸했었지. 그리고 새삼 그런 당신의 모습이 몹시도 안쓰러워 보였지. 왜일까? 나도, 늘 혼자였기 때문이었을까?  게임 연습에만 몰두하다 보니 친구가 없어서 쓸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소속팀을 구하지 못하고 있단 기사에, 가슴 한켠이 몹시도 아렸던 건.

그래서, 당신이 처음 <팀>의 일원으로 등장했을 때 그 모습, 몹시 낯설고 멋쩍어 보이면서도, 참 속으론 좋았어.
'임요환 원맨 팀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연습상대다' 그 말이 이상하게 상처가 되었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
이윤열 선수가 KTF의 <에이스>라면, 당신은 동양의 <기둥> 이라는 그 말이 몹시 와 닿았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
기둥이란 건...<건물을 지탱한다>는 스스로의 목적에 - 철저하게 솔직할 때에만,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이거든.


그리고 오늘 보았어.
당신은... 정말 동양의 기둥이었음을.




혹시, 장영주가 연주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어 본 적이 있어?
어려서부터 바이올리니스트가 꿈이었지만, 결국 되지 못했던 작곡가 시벨리우스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최고의 비르투오소를 위하여 작곡한,
수많은 작곡가들의 그 많은 바이올린 협주곡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곡으로 악명이 높은,
....명곡이지.

그 곡 마지막 부분을 들을 때마다, 난 당신을 떠올렸었어.
웅대하고 중후한 오케스트라 - 그 거대한 바다를 뚫고 섬광처럼 솟아오르는,
유리조각처럼 현란하고 불꽃처럼 뜨거운 바이올린 선율.
그것이 바로 당신이라고, 지금껏 생각해왔어.

그런데...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오늘의 당신은, 가슴을 찌릿 울리게 하는, 그 바이올린의 강렬한 멜로디이기도 했지만,
가슴만이 아니라 오장육부를, 온몸을 진동시키던, 그 깊고 웅대한 오케스트라 반주이기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콘체르토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말이야.



나의, 젊은 거장.
이젠 어엿하게 어른의 자리에 서서, 혼자가 아닌 자리에 서서,
당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
참 멋진 일을 이루어낸 나의 박서.

참.... 장해.
당신... 참 좋아 보여. 참 행복해 보여.
그래서 나도 정말, 행복해.

아 씨...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감기약 기운이 퍼지는 모양이야. 조금씩 눈이 감기고 있어.
오늘밤만큼은,
당신의 꿈을 꾸었으면 좋겠어.

당신... 정말 멋졌어, 박서.

축하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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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31 01:28
수정 아이콘
박서는 이미 게이머를 넘어선것 같습니다... 축하드려요...
Ace of Base
03/08/31 01:29
수정 아이콘
늦은 질문이겠지만...슬레이어즈 박서가 무슨뜻일까요?
하늘호수
03/08/31 01:36
수정 아이콘
ijett.... 당신도 멋지네요. ^ ^
다크고스트
03/08/31 01:40
수정 아이콘
박서는 권투선수를 뜻하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복서라고 불리던데요. 그리고 슬레이어는 게임큐에서 임요환선수가 말하길...박서는 길드활동할때 쓰던 아이디고 거기에 슬레이어즈를 붙인것은 고수킬러가 되고싶은 마음에서 슬레이어즈를 붙였다고 하더군요.
Ace of Base
03/08/31 01:42
수정 아이콘
다크고스트> 그렇군요.....박서라는 길드가 있었네요^^ 길드가 뒤에 붙어서 전혀 몰랐네요......
Dr.protoss
03/08/31 01:47
수정 아이콘
Ace of Base님//길드명 자체가 박서는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길드명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길드 내의 테스터(길드원들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를 'Boxer'라고 불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layers라는 것은 그 강렬한 이미지를 임요환 선수가 좋아해서 붙인 것으로 알고요^^;
03/08/31 01:53
수정 아이콘
첨알았습니다 그런뜻이있는걸...
산너뫼
03/08/31 01:54
수정 아이콘
박서에겐 언제나 님같은 팬이 있어 행복할겁니다.
저도 박서 열혈팬인데 언제쯤이나 이런 글을 올릴수 있을런지...
오늘 동양팀 모두의 승리입니다...
주훈 감독님 이하 선수여러분 정말 추운 날씨에 고생 많이 하셨고
우승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항상 건승하세요...^.^...
tongtong
03/08/31 01:59
수정 아이콘
아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글이네요...
어쩜 이렇게 내 마음과 일치하는지...
저두 박서의 경기를 눈과 머리로 보고 싶지만 도저히 그게 안되더군요..
그래서 박서가 진 경기는 두번 다시 못봅니다 ㅠㅠ...
박정석테란김
03/08/31 02:16
수정 아이콘
Ace of Base//길드명은 FOREVER(대소문자 구분 안됨--)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개사용자
03/08/31 02:17
수정 아이콘
아... 감기약 먹고 취하면 글 쓰신 분처럼 솔직하면서도 예쁜 글 쓸 수 있게 되나요?
후후후... 그렇다면 저도 언제 시간나면 감기약 먹고 이렇게 멋진 글이나 하나 올리고 싶네요.^^

p.s.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글의 제목에 들어가는 '넋두리'란 불만이나 불평을 혼잣말처럼 하소연 하는 것을 말하는 걸로 압니다만...
감기약에 취해서 잘못 쓰신 거겠죠?...^^
ssulTPZ_Go
03/08/31 02:19
수정 아이콘
아...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체네요..^^ 좋은 글입니다...
안전제일
03/08/31 02:23
수정 아이콘
오늘의 임요환선수는 정말 멋있었습니다. 동양팀도요..
03/08/31 03:12
수정 아이콘
감기 빨리 낫기를 바랍니다~
(감기 걸려도 좋으니까 이런 멋진 글 함 써봤으면... 부럽습니다...)

지난번에는 편성표에 없었어도 새벽에 재방송하던데...
1경기를 못봐서 지금도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밤 꼴딱 세워도 좋으니까 재방송 해줬으면 좋겠네요.........

너무너무 졸립지만........
한시간만 더 기다려볼려구요.............................

ijett님 지금쯤 주무시겠네요... 푹 쉬고 빨리 나으세요...
felmarion
03/08/31 03:34
수정 아이콘
아름답고 화려한 미사여구로 점철된 글들보다도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와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한줌의 가감도 없이 고스란히 전해질때, 저는 이렇게 외칩니다.
"따봉"
03/08/31 03:41
수정 아이콘
따봉+_+
고자마린
03/08/31 03:58
수정 아이콘
Slayers_`boxer`
제가 알기로는 임선수 무명시절에 길드를 하나 만드려고 했고, 길드이름을 slayers 로 하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복수를 뜻하는 's를 붙인거구요..
그런데 길드원모집에 실패한듯..
제대로 모집되었다면 slayers 길드의 `boxer`가 되었겠죠?
03/08/31 06:50
수정 아이콘
얼마 남지 않은 기간 임요환, 그가 떠나기전에 조금 더 그의 훌륭한 치세를 기릴 수 있도록 좀 더 많은 업적을 남기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ijett님과 같은 너무 좋은 팬이 있으니 박서를 굳이 응원하지 않을랩니다 ^_^(농담입니다)
박서는 내 마음 속에 늘 있었습니다. 굳이 밖으로 임요환이 장하니 훌륭하니 멋졌니 하지 않았다하여 그가 내 안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모습에 오해를 사서 임요환선수를 응원하기 껄끄러워진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사람을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유하
03/08/31 10:24
수정 아이콘
저는 술먹고 취하면 헛소리만-_-늘어놓게 되는데 님은 너무 이쁘게 글을 쓰시네요^^
정말 ljett님 같은 팬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그런 팬분들의 글을 직접 보니까. 정말^^ 기분이 좋아지네요^^
BlueSoda
03/08/31 12:51
수정 아이콘
'Slayers'라는 단어가 길드의 이름인 것도 맞지만,
Slayers_`BoXer`라는 아이디 자체의 뜻도 따로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복싱에서 '슬레이어즈 박서'라는 단어는
'사람을 때려 죽이는 박서-_-'의 뜻이 있다더군요.
올림푸스 4강에서의 3:0 패배이후, 한동안
임요환 선수가 앞의 슬레이어즈를 떼버리고 'Boxer'만 아이디로 사용했었습니다.
'나는 이제 살인박서가 아니라 평범한 박서다'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다잡기 위한 의미였던듯.
달팽이관
03/08/31 14:45
수정 아이콘
임요환선수의 팬이되면..정말 눈으로 보는 경기가 아니라..가슴으로 보는 경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어쨌든..요환님...정말 어제 너무너무 멋있었답니다...이제껏 임요환선수를 좋아하면서...정말 가장 기뻤던 날중 하나가 어제가 아니였나..합니다...
03/08/31 23:54
수정 아이콘
아~~아름다운 글입니다. 정말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은 울림이 있군요.TT ijett님의 마음이 읽는 이의 가슴을 칩니다.
03/09/01 00:41
수정 아이콘
그를 보러갔었습니다.
쏟아지는 빗속의 그의 모습을 보고있으니 목이 메어오더군요
얼마만의 결승전인진
얼마만의 소감인지...
그의 얘기에 또한번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미안하다는, 부끄럽다는...
그에게 늘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03/09/01 05:34
수정 아이콘
-cata- 님// 감사합니다. 몸살끼 있던 건 많이 나았는데, 아직도 기침이 ㅠㅠ
안개사용자 님// 넋두리가 그런 뜻이었군요. 잡담이라 하기도 뭐하고, 말머리 안 붙이기도 뭐해서 그렇게 붙였는데. ^^a 역시 감기약의 엄한 기운 탓... 아참! 폭투혈전 다음 편, 써주실거죠 +_+

그나저나 정신 좀 들고 나서 읽어 보니... 조금은 낯간지럽네요. ^^;
감히 pgr에서, 감히 임테란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다니... 후후.
그날... 비 속의 결승전에, 감기약-_-에 취하긴 많이 취했나봅니다.........
늦었지만 동양팀(특히 이창훈 선수) 정말 축하드리고, 재균 감독님과 한빛팀 선수들 역시 힘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_ _)
03/09/01 15:08
수정 아이콘
뒤늦게 읽었지만...정말 감동적인 글입니다. ijett님....
박서의 팬으로서.. 뭐랄 말할 수 없는 뭉클함이 느껴지네요.

혼자가 아니라...팀원들과, 든든한 감독님과 함께
무대에서 승리의 기쁨에 차 환하게 웃고 있는 박서의 모습이
그렇게 보기가 좋을 수가 없더군요.

박서...
화이팅입니다!!
페널로페
03/09/01 22:28
수정 아이콘
왠지 모르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이네요..전 언제쯤 이런 글을 쓰게 될런지..의문입니다..^^ 요환선수의 경기를..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는 팬으로써 멋진 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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