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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5/16 10:22:12
Name happyend
Subject 금단의 사랑
1.

경주 남산으로 들어서는 그 곳. 소도라 불리는 그곳. 세속의 티끌도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그 입구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복숭아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신비로운 밤. 검은 그림자는 망설임 없이 소도의 숲을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신라 최고의 영웅이었던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진지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성한 숲 소도는 그의 발걸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진흥왕의 아들인 그가 소도로 향하는 것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가시바늘 같은 그 눈길을 피해 왕은 소도에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이러하옵니다. 부디 옥체를 보존하세요.”

달빛에 부서지는 복숭아꽃잎을 무심코 바라보던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하얀 옷이 섬광처럼 번뜩였습니다. 왕은 뒷짐 진 채 그녀를 애써 외면하려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어쩌면 그날, 왕은 그녀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근사한 날인가요. 복숭아꽃잎이 달빛에 부서지는 그 밤이니까요. 그녀, 사량부의 신녀인 그녀를 사람들이 도화녀라고 부르는 것도 어쩌면 다 오늘같은 날을 위한 예언처럼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만날 수 없다면, 죽어서 너를 보러 오리라.”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듯이 그렇게 말을 토해낸 왕은 발끝에 떨어진 차디찬 달빛을 서걱서걱 밟으며 숲길을 되짚어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슬픈 이별. 그러나 그는 그것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진흥왕의 아들이자 신라의 왕이었으니까요. 그녀는 그에게 사랑해선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도화녀는 숲의 여인이었고, 진지왕은 그 숲을 파괴하는 왕이었습니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6세기말의 신라는 숲을 둘러싼 전쟁의 절정을 치닫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이 운명적 사랑이 가로 놓여있었습니다.

2.

숲은 청동기시대 토템의 궁극적 실현체였습니다. 세상만물을 움직이는 어떤 힘은 산신이라는 형태로 그 마을을 보호했고, 그 산신의 권위는 어떤 동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 동물을 숭배한다면 마을은 영원토록 안녕과 번영을 보장받으리라는 사상이 산신사상입니다.

이 산신과 교감할 수 있는 제사장의 권위가 곧 마을을 지배할 권위였고 그것이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진화하여 국國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국을 이끄는 왕과 소도를 이끄는 제사장은 한때 같은 사람이었다가(박혁거세) 이윽고 분리되어 두 사람(남해차차웅과 그 누이)이 됩니다. 왕은 남자가, 그리고 소도의 신녀는 여자가.....아마도 신라는 이런 체제를 오래도록 유지해왔던 듯합니다.

그것은 신라 6부의 모든 곳에도 동일했습니다. 그들은 각자 하늘의 자손임을 표방하였고, 각각의 권위는 동등했기에 화백제도라는 귀족회의가 힘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부에는 자신들의 숲을 가졌고 그 숲을 지키는 소도가 있었고 그곳엔 신녀가 존재했습니다.

이 숲의 권위. 그리고 신녀의 힘. 이것이 신라 이사금시대의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는 힘이었으나 세상은 변하고 있었습니다.

격동의 4세기말, 가야와 백제의 성장, 왜의 압박 속에서 신라는 비로소 자신들이 고립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신라가 선택한 길은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를 등에 업은 내물왕은 이사금시대, 즉 선거에 의해 부족장을 선출하던 시대를 끝내고 왕권독점시대를 엽니다. 그렇게 해서 칸 중의 칸인 마루칸 즉 마립간의 자리에 오른 내물왕은 중국과 교류하고 고구려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신라의 후견인으로 경주 한가운데에 군사를 주둔시켰고,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 됩니다.
(그 증거가 황남대총입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쓸 기회가 있으면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온갖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단 하나, 불교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북방민족은 중국을 지배하려할 때 정통성이 약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민족 지배의 이데올로기로 ‘왕즉불’사상을 전파했습니다. 이에 따라 융성한 불교는 고구려와 백제로 넘어왔고 두 나라의 왕실은 즉각 불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거듭거듭 포교에 실패한 나라가 신라입니다. 신라에도 물론 수많은 승려들이 포교를 위해 건너왔고 일부는 살해당하기까지 합니다만 기나긴 시간동안 포교는 실패했습니다.

(이들이 숨어서 포교를 벌였던 곳을 모례네 집이라고 하는데요, 이 모례네집은 털毛의 음을 따서 만든 것으로 원래는 털례네 집이었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테라(절)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의 단순화과정을 거쳐서 ‘텰례-->텰-->절’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라왕실은 불교의 공인이 절실했습니다. 다른 여타종교보다 우월한 고급종교로서 불교가 각종 토템신앙에 기반한 전통귀족들의 권위를 억눌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족들을 보호하는 각종 산신보다 한 단계 위에서 굽어 내려보는 부처의 권위에 바탕한 왕즉불 사상이야말로 신라를 왕실중심의 고대국가로 격상시켜줄 것이었습니다.

마립간시대란 것은 사실상 따지고 보면 여러 칸들 중에 으뜸이라는 것이지, 결코 그것은 다른 칸이나 그 칸들이 지배하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립간은 소소한 칸들이 가진 금동관에 비할바없이 휘황찬란한 금관을 가진 부티나는 외모를 한 칸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립간시대에만 유일하게 무덤속에서 금관이 나옵니다.금관의 권위....그것은 또다른 숲의 권위이기도 합니다. 마립간도 숲의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고 그 상징이 금관이었으니까요.)

하지만 5세기는 정복전쟁의 시대. 고구려,신라,백제,가야는 정복하느냐 정복당하느냐를 놓고 사생결단의 상태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의사결정과정이 느리고 군사동원력이 느슨한 마립간체제로는 이 시대를 대응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두 가지의 결정 앞에 놓인 신라는 마립간시대를 끝내고 왕국으로 변화해야 했습니다.

왕국으로의 변화. 모든 진화는 투쟁의 산물이듯 신라 또한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가야에서 제철수입국의 처지였던 신라는 제철자립국의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고 나제동맹을 성사시킨 눌지왕의 외교 또한 성공을 거두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라왕실은 차츰 힘을 길렀고 마침내 지증왕대에 이르러 왕국을 표방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왕의 권위는 단지 선언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선거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는 민주주의 체제가 아닌 고대 신라왕국에서 권위는 신화에서 나왔습니다. 바로 그것이 걸림돌이었습니다 6부의 귀족들은 산신의 보호를 받는 신성한 가문들. 이들을 내리누를 길은 불교뿐이었습니다.
불교는 들어온 뒤 비밀포교를 거치면서 일부 귀족과 왕실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만 절대적인 산신숭배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신라인들은 여전히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습니다. 이 딜레마. 신화의 나라 신라가 가진 이 딜레마. 이 깊은 딜레마에 빠진 법흥왕에게 그것을 풀 열쇠를 가진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가 바로 이차돈입니다.

3.

이차돈에 대한 종교적 평가는 제 능력밖의 일이므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역사의 무대에서 이차돈은 아마도 열혈 왕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어쩌면 신라의 미래를 꿰뚫어볼 혜안을 가졌을지도 모르고요. 아니면 그저 비밀포교의 성과로 탄생한 신앙인으로 왕실의 이해와 맞아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순장 등으로 표현되었던 귀족들의 생명경시풍조에 대응한 휴머니스트였을 수도 있고요.

어찌되었든 이차돈은 법흥왕에게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귀족들을 성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것, 그들만의 신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없애겠다는 것이었지요. 그것이 ‘숲’이었습니다.

이차돈은 거침없이 도끼 한자루를 들고 숲으로 갔습니다. 그곳이 천경림. 이름 그대로 신들이 사는 곳. 신성한 숲 소도. 토템신앙의 근원지이고, 생명의 근원지이자 성지입니다. 김알지도 계림이라는 숲에서 탄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신화가 숲으로 인해 시작되고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마립간인 소지마립간은 신궁을 신성한 숲 소도에 설치합니다.)

이곳의 나무를 벌채하는 것은 신성모독. 귀족들은 펄쩍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차돈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거의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남은 것처럼 순교했습니다.

하지만 일은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천경림을 건드리면 일어나리라고 여겨지던, 아마도 지금으로 치면 휴거?정도의 큰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차돈과 불교세력들의 공언대로 천경림은 그냥 숲일 뿐이었습니다. 반대로 불교적 권위는 급속하게 퍼졌습니다. 추측컨대 아마도 승려들이 보여준 ‘의학적’ 성과가 천경림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던 전통적 무당들의 ‘푸닥거리’를 압도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불교 승려의 처방전과 조직화되고 질서정연한 종교적 체험앞에 귀족들은 결국 항복합니다. 그리고 불교승려들이 보여준 수많은 성공사례는 ‘기적’의 이름으로 빠르게 퍼졌고,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공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보상으로 얻은 중대한 정치적 성과는 상대등의 설치였습니다. 즉 왕은 귀족회의의 수장이 아니라 그 위에 군림하는 부처가 될 신성한 혈통을 가진 특별한 가문, 성골이 됩니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법흥왕부터 진덕왕까지 불교적 관념에서 성골혈통을 가진 이 시대 다시 말해 불교의 권위에 힘입어 왕실의 권위를 획득했던 이시대를 ‘중고기’라고 표현합니다.

왕은 천경림에서 베어낸 나무를 가지고 절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흥륜사입니다. 따라서 흥륜사는 신라인들에게 신성한 숲의 권위를 가진 절이 됩니다. 치료의 공간이자 기적의 공간. 그리고 숲의 권위를 아직도 믿고 있는 세력들 다시 말해 귀족의 신성성을 왕실의 신성성 아래 굽히지 않으려는 세력들과의 전쟁의 선봉장이 됩니다.

숲을 지키려는 자와 그 숲을 하나하나 파괴하려는 자간의 이 치열한 전투의 서막이 이렇게 올랐습니다.

4.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였으나 단한가지, 고대국가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국립학교였지요. 그런데 어떤 귀족도 자신의 자식을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이미 전통적인 교육방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아바타> 그리고 <원령공주>에서 표현되었듯이 숲의 전령은 여인입니다. 한 일본인 종교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어느 곰 토템을 가진 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를 동굴에 가둔 채 오래도록 놔두면, 아이는 그 공포 속에서 자아분열과정을 거치고 또 거친 뒤 아마도 감정과 이성의 저 건너편에 있는 수퍼에고에 도달하게 되면서 무녀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그 깨달음을 얻은 순간 곰의 표피를 뒤집어쓰고 동굴을 나오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곰의 전령자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조금 오래전에 읽어서, 자세한 묘사는 다를수 있습니다)

법흥왕이 파괴한 숲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의 숲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그 숲을 지키는 여인은 여전히 산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세속과 경계지어진 그 곳에서 여인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교육받아왔습니다. 그들은 오랜 훈련을 통해 집단 군무를 배워 축제와 제사의식을 진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고대에 사람들은 아이들이 숲의 신성한 힘으로 무병장수하길 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숲은 아이들을 기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법흥왕은 신라 유일의 청소년 네트워크인 그 체계를 파괴할 힘이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왕은 그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신녀에겐 원화라는 이름을 주어 체제내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법흥왕의 방식. 정복군주 진흥왕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무리지어 춤만 추는 아이들을 어디다 써먹는단 말인가요? 더군다나 신녀이든 원화이든 그들은 여전히 숲의 권위를 지키는 사람들일 뿐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그나마 남아있던 신녀의 그림자마저 지우고 만든 것이 화랑도. 신녀의 자리에는 국선 또는 화랑이라 불리는 남자를 임명합니다. 화랑은 신녀와 같은 지위를 가졌으므로 당연히 낭도라 불리는 아이들을 이끌고 군무를 추면서 축제와 제사의식을 진행해야 합니다. 전통에 따라 여장을 하고 얼굴에 화장을 한 화랑은 신이 내리는 나무를 잡고 예전에 신녀가 그랬듯이 하늘과 교감하여야 합니다.

하지만....숲을 파괴한 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숲을 지키려는 자들 즉 전통귀족들의 불만이 수면위에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화랑에게 그런 자격을 준 게 누구란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신녀처럼 동굴의 의식과 신내림 행사를 거쳐 검증되지 않은 화랑 따위가 신성한 숲을 더럽힌다고 생각한 귀족들은 차츰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냅니다.

그때,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진흥왕이 죽었고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것은 왕위계승의 규칙을 어긴 것이기도 했습니다. 나이어린 조카, 형의 아들이 장자계승원칙에 의해 왕위서열이 더 높았습니다. 성골의 신성한 혈통에 따르자면 말이죠.
하지만 그 조카(훗날의 진평왕)가 아니라 진지왕이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역사에선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전통귀족들의 저항을 우려한 진흥왕의 배려라고 여겨집니다. 진흥왕 자신이 어린나이에 오로지 신성한 혈통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왕위에 올랐었기 때문에 긴반한 나라밖 사정에 맞설 적임자로 장성한 진지왕을 선택한 것이었겠지요.
적어도 화랑에 대해서만은 진흥왕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진지왕은 화랑제도가 빠진 위기를 멋지게 벗어나는데 성공합니다.


5.

숲을 지키려는 자와의 싸움의 선봉에 선 곳은 흥륜사. 흥륜사는 화랑도를 둘러싼 전통귀족과 왕실간의 힘겨루기를 나몰라라 할 수 없었습니다. 신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해결책을 들고 흥륜사의 승려 진자가 왕을 찾아왔습니다.

진자는 다른 승려들과 달리 여행을 불교선진국이랄 수 있는 백제여행을 통해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를 가장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백제의 미륵신앙. 왜냐하면 세상에 부처는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왕즉불’사상의 딜레마를 한방에 해결해줄 이데올로기가 바로 이 미륵신앙안에 담겨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교는 부처의 권위를 이용하여 다른 전통신앙을 제압했습니다만 오히려 신녀의 권위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역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일개 인간에 불과한 화랑에게 신녀와 같은 권위를 부여하지도 못했습니다. 신녀의 권위를 빼앗아 화랑에게 부여할 이 놀라운 발상의 전환. 그것을 진자는 진지왕에게 제안합니다.

“미래에 부처가 될 사람.미륵불. 그를 화랑의 자리에 앉히시면 되옵니다.”

미륵불은 인도 최고 계급인 브라만가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귀족 중의 귀족인 브라만 가문의 미륵불은 이후 석가모니의 설법에 감화하여 지상에서 수행을 합니다. 이후 하늘로 올라 도솔천에 조용히 앉아 아래세상을 굽어 내려보다 마침내 억겁의 윤회가 이고 진 뒤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라는 나무 아래에서 성불합니다. 그리고 난 뒤 고달픈 중생들을 교화한다고 합니다. 신분부터 결국은 부처가 된다는 결말까지 화랑의 롤모델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진지왕은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온갖 소문과 퍼포먼스를 거쳐 신성한 숲 소도에 나타난 미륵불. 그가 미시랑입니다.

미시랑의 출현은 신라 귀족청소년들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자신들도 수행하면 미래의 부처가 될 수 있다는데 말이죠. 미륵불은 미래의 부처, 다시 말해 지금은 조용히 수행중인 셈. 화랑들은 이 미륵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자했습니다. 언젠가 세상을 구할 미륵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힘들고 고된 훈련을 참고 견디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에게 미륵불은 꿈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화랑들은 ‘반가사유상’의 열렬한 팬이됩니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반쯤 앉은 상태에서 아래 중생들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깊은 사색에 빠진 미래의 부처님. 그것이 화랑 자신의 모습이라고 여겼습니다.
(사실 이글은 시대별로 사랑받고 유행하던 불상의 탄생과 소멸과정을 써보렸던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도 합니다.하지만 그건 다음기회로 미뤄야 하겠습니다.
다만, 반가사유상은 태자 싯다르타가 마침내 왕자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궁을 나온뒤 자신이 입고 있던 옷과 장신구를 모두 벗어 마부 찬다카에게 들려보낸뒤  깊은 사색에 담긴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에선 태자상이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이제 진지왕은 숲을 지키려는 전통귀족들에게 마지막 피니쉬블로를 날릴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심장을 제거하는 것.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심장을 빼앗아가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왕은 경주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녀를 궁궐로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정공법. 귀족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더 빠른 길. 그것은 신녀를 개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길은 없을 터였습니다.

그렇게해서 궁궐로 한 신녀가 궁궐로 들어옵니다. 도화녀와의 운명적인 첫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6.

걸음을 걸을때마다 복숭아꽃향이 퍼지는 듯한 도화녀는 얼굴을 휘장아래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꼿꼿한 자태 속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서려있었습니다.

왕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습니다.

“부처의 법도는 크고 넓으니 따를 생각이 없느냐?”

“이미 모시는 분이 있는데 어찌 다른 이를 모시라 합니까? 비록 임금의 힘이 실로 대단하다고들 하나 그것으로도 사람의 절조를 빼앗지는 못할 것입니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습니다. 아마도 동굴의 의식을 거친 자만이 가진 초월적 음성.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울림.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왕은 부르르 떨었습니다. 일개 신녀 따위가....감히....진흥왕의 아들이자 신성한 혈통을 가진 진지왕의 자부심 따윈 관심도 없는 듯한 그 목소리에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진지왕은 칼을 빼들고 도화녀의 목에 대며 말했습니다.

“너를 죽이면 어찌하려느냐?”

“그러하오면, 이곳이 아니라 저자거리에서 모두가 보는 곳에서 저를 죽여주시길 간청하나이다.”

도화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습니다. 왕은 잘 타일러보리라던 생각 따윈 이미 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어찌 저리 당당하단 말인가. 혹세무민하는 주제에...신녀 따위가 연악한 여인네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의 다급한 말발굽따윈 본적도 없는 안온한 여인네 따위가...
분노로 이글이글타는 왕의 눈빛은 한동안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그녀를 벨 듯이 서있던 왕은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녀는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것은 금단의 사랑. 자신이 왕인 한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녀는 신녀. 신의 여인인 한은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운명적 사랑에 빠진 것은 왕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도화녀 역시 깊은 열병을 앓았습니다. 신내림을 받던 그것과는 다른 열병.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렸지만 사랑의 힘이 아무리 크다 한들 왕도 함부로 넘을 수 없는 소도의 금줄을 없앨 수는 없는 법이었습니다. 위험한 사랑의 달콤한 유혹. 진지왕은 결국 그 선을 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이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밤의 일이었습니다.

7.

궁으로 돌아온 얼마 뒤. 진지왕은 숲을 지키려는 자들에게는 신성모독의 혐의로, 숲을 파괴하려는 자에게는 배신의 혐의로 궁지에 몰렸고 곧 폐위되었습니다. 삼국유사에선 황음무도하다는 이유로 국인들에 의해 폐위되었다고 합니다.

왕은 궁을 나왔고 그해 여름이 끝나고 가을바람이 막 불어올 무렵,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도화녀는 사내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비형이라 불렸습니다. 진평왕은 자신의 사촌동생인 비형을 궁으로 데려와 키웠습니다. 비형은 신녀의 아이. 세간의 사람들은 비형을 아꼈습니다. 신성한 숲이 낳고 키운 아이였으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숲의 보호를 받는 아이 비형은 진평왕의 인정을 받았고 이후 선덕여왕을 도왔습니다. 특별히 건축술에 능력을 가진 비형은 다리를 놓았고 황룡사 9층석탑의 건립을 지휘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용수(혹은 용춘)으로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입니다.

정말로 왕은 폐위되었을까요?어쩌면 스스로 궁을 나온 것은 아닐까요?

삼국사기에는 단한줄도 왕의 폐위사실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황음에 대해서도 무도함에 대해서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부식은 열렬한 신권옹호론자로서 왕의 잘못은 차마 눈뜨고 보고 싶지 않아서, 왕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삼국사기를 지은 사람인데도 말이죠.

**덧붙여

이 이야기는 <도화녀와 비형랑>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며 제가 제시하는 하나의 가설일뿐임을 밝힙니다.

비형은 용수 혹은 용춘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두사람, 아니 세사람은 동일인물로 여기기도 합니다. 진지왕과 도화녀사이에 낳은 이 아이가 후에 김춘추의 아버지가 됩니다.
왜 비형을 용춘 혹은 용수라 하지 않고 비형이라 했을까요? 그리고 왜 신라인들은 도화녀와 비형랑의 설화를 지었을까요?
이것은 비형을 아끼고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비형. 그가 이후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였으니 실명을 거론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신녀의 아들이니까요.
아마...그래서 진지왕의 황음무도함은 김부식의 기록에선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가 황음무도해선 안되니까요....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5-2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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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브링잇
12/05/16 10:41
수정 아이콘
와아 너무 재밌어요~~~ [m]
12/05/16 10:41
수정 아이콘
그저 추천드립니다
honnysun
12/05/16 10:52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감상..
절름발이이리
12/05/16 10:5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2/05/16 11:15
수정 아이콘
요즘은 피지알이 역사연구 사이트였던가? 하는 착각이 간혹... 흐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진짜 숨도 못 쉬고 읽었네요;;
一切唯心造
12/05/16 11:1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너무 재미있네요 ^^
루크레티아
12/05/16 11:19
수정 아이콘
하앍하앍
12/05/16 11:27
수정 아이콘
우왕 재미있어요
사악군
12/05/16 11:31
수정 아이콘
모티브 잡아서 사극하나 만들면 대박칠 것 같네요..+_+
김연아이유리
12/05/16 12:12
수정 아이콘
이런건 정말 국가적인 차원의 멋진 컨텐츠에요.

유능한 사람들이 달려들수 있도록, 국사학계에 국가차원의 투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텍스트를 이렇게 멋지게 꺼내놓는일을 많아진다면,
정말 세계 어느나라의 역사나 문화도 부럽지 않을것 같아요.
감모여재
12/05/16 13:07
수정 아이콘
해피엔드님의 사랑이야기는 항상 너무 좋네요.
아우디 사라비아
12/05/16 13:17
수정 아이콘
허어.... 그냥 아련한 영상이 떠오릅니다

너무 반가운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사랑 복남
12/05/16 15:05
수정 아이콘
후아...국이 다 식었어요...
재밌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12/05/1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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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이야기입니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팔할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도 참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아요!
12/05/1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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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문장력이 대단하십니다.
저글링아빠
12/05/25 23:01
수정 아이콘
뭐하다 이 글을 이제서야 보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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