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1/11/12 21:47:05
Name madtree
Subject 밀리언달러베이비


생애 첫번째 기억은 어디일까...

컴컴하고 좁은 곳, 엄마의 낮은 숨소리와 어느새 잠이든 동생의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엉거주춤 뻗은 손끝에 꼼지락 꼼지락... 낯설고 보드라운 옷가지들이 만져진다.

어디일까?

네모난 방의 한쪽 모서리. 옷걸이 뒤 다.

우리집이 아니다.

내가 큰엄마라고 부르던, 그러나 전혀 나와 친인척 간이 아닌, 이웃아주머니 집이다.

멀리 (실은 아주 가까이였을테지만) 술에 취한 아빠의 알수없는 고함과 내가 큰아빠라고 부르던, 역시 전혀 나와는 친인척 간이 아닌, 옆집 아저씨가 아빠를 타이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나는 아빠가 잠이 들길 기다려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었던가? 어쩌면 그대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둘 다 일수도 있다. 우리가 큰엄마네집 옷걸이 뒤에서 숨죽이고 있었던건 그날만이 아니었으니...

아빠는 몇번이고 술에 취해 온동네 사람이 다 몰려오도록 구경거리가 되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저기 벌건 얼굴로, 신세한탄인지 욕설인지 모를 괴성을 지르고 있는 사람이 내 아빠란 사실은.

해가 밝은 다음날 아침. 동네아주머니들이 별일 없었는지, 집에는 언제 들어갔는지 안쓰러운 듯 물어보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동정을 받는 것도 싫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구경하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좋아한다.

다들 참... 시간이 많으시군요.




삶이란 얼마나 너저분한 것인지...

누구에게나 사람좋은 아빠가 저렇게 가족을 향해 술주정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의 너저분한 삶으로 아빠를 이끈 사람이 엄마와 나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가수가 되고싶었댔다.

재수학원비를 삥땅쳐 드럼을 샀다.

친구들과 밴드(아빠는 늘 그룹사운드 라고 했다)를 만들었다.

"보컬 겸 드럼 겸 리더" 라는 나로써는 반쯤만 믿음이 가는 포지션으로 시내의 나이트클럽 무대에 오르고, 간간이 시골 축제에 초대가수 겸 반주자로 초빙되어 가기도 했다.

그저 그런 흔한 얘기지.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그냥 그렇게 살았다는 건.

한집 건너 한집. 누군들 그런 꿈을 가진 사람이 없었을까.

아빠도 그랬다. 가수가 되질 못했다.

그건 빽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실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쨋건, 그렇게 그렇게 맘을 접고 살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빠는 남들처럼 그렇게 곱게 맘을 접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빠는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어렸다. 엄마는 어렸고, 왜인지 모르게 그땐 별로 똑똑하질 못했다.

훗날 엄마는 후회하며, 아빠는 자랑스럽게 말했듯이 엄마는 아빠를 죽자고 쫓아다녔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아빠의 꿈과 엄마의 젊음을 갉아먹을 내가 태어났다.

사실 아빠는 엄마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밴드를 그만두었었다.

기억이란건 묘하게 편집되기 마련이다.

아빠의 기억 속에선, 어느새 엄마와 뱃속의 내가 아빠를 가수의 꿈을 접고 현실에 주저앉혀버린 훼방꾼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언제나 "내가 이모양 이꼴로 사는건" 내 탓이었다.

고작 스무살에 변변한 직업도 없고 술버릇이 고약한 남편과, 낮밤이 바뀌어 빽빽거리는 딸을 갖게된 엄마는 늘 불행했다.

꿈을 잃은 아빠도...

불행한 아빠와 불행한 엄마 사이에서 자연스레 나도 불행해졌다.

아빠와 엄마가 싸우고 난 뒤면 어김없이 뒷통수에 꽂히던 눈길.

세숫대야에 고개를 처박고 있어도, 책가방을 싸고 있어도 뒷통수가 따끔거렸다.

당신들의 가난, 당신들의 불행, 꿈과 젊음을 잃어버린 당신들의 망쳐버린 삶...

너 때문이라고, 거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바로 너 때문이라고

쏘아보는 눈길들이 내 뒷통수에 친절히 아로새겨주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모두 내탓이 된 것일까?

엄마가 친구들처럼 영화를 보러, 옷을 사러 다니지 못하는 것도,

아빠가 조용필처럼 가수가 되지 못한 것도,

모조리 내탓이 되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나는 그걸 반박할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엄마는 꽤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판단력이 좀 흐렸었던 것 뿐.

엄마는 주정뱅이 남편 뒤에서 눈물이나 짓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스물한살이 되었을때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이제 아빠와 동생은 니가 돌봐주라고...

내가 뱃속에 있을때부터 엄마는 나를 스무살까지만 키우고 아빠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고 한다.

나 때문에 싫은 사람과 20년을 살았다고 하는 엄마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마고 했다.

엄마가 남인 것 같았다. 여지껏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살았던 것 같았다.

20년의 세월을 거쳐 똑똑해진, 책임을 다한 듯 홀가분해 하는 엄마를 놔주기로 했다.




그날부터 나는 술주정뱅이 아빠와 고3짜리 동생의 보호자가 되었다.

인사불성이 된 아빠를 데리러 파출소에 가는 것도,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동생을 마중나가는 것도

모두 내 몫이 되었다.

세상은 참 시시하고 우스운 곳이다.

내눈엔 그랬다.

파출소에서 경찰을 붙잡고 횡설수설하는 아빠에게 악다구니를 쏟아붓고, 걷지도 못하게 취한 아빠의 멱살을 끌어 택시 안으로 밀어넣으며,

자정이 가까워오는 으슥한 골목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 겁이 많은 동생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오며

나는 점점 더 모질고 독해졌다.

어려운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다.

무서운 건 더더구나 없다. 아무도 무섭지 않고,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 너는 이게 무섭냐?

극장을 나서며 얼굴이 새파래진 친구에게 핀잔을 준다.

- 돈 아까워. 이게 뭐야.

피칠갑을 하고, 갑자기 어디선가 퍽퍽 튀어나와도 나는 눈하나 깜짝할 줄을 모른다.

- 코미디가 좋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이런건 다 시시해.

착하고 순한, 그리고 나 말고는 친구가 별로 없는 내친구는 온갖 구박을 다 듣고도, 또 나와 영화를 보러 간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영화래.

- 어. 저 여자 그 여자네. 소년은 울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날의 극장에서, 세상에서 제일 길고 무서운 두시간을 보냈다,

소리를 지를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공포.

울진 않았다. 울지도 못했다.

힐러리 스웽크의 썩어가는 다리가, 굳은 살이 배겨 질기고 단단해진 내 심장 한구석을 비집고 들어와 후벼파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볼 수가 있을까?

나더러 어떡하란거야.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한대.

나는 누군가의 불행을 구경하고 싶지도, 어딘가에 있는 다른이의 불행을 알고싶지도 않다.

거짓말이라도, 유치해도,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알고싶다.

당신들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긋지긋한 것인지...

나는 슬픈 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 언니 나 오늘 '도가니' 보러 갈거에요.

- 어

- 사실은 요새 너무 나초가 먹고싶어서, 영화보다 나초 먹는게 더 땡겨서 가는거에요.

- 글쎄 그게 나초나 먹고 앉아있을 그런 영화가 아닐텐데...

눈이 크고, 애기들을 좋아하는 그 동생은 한시간도 못되서 극장에서 뛰쳐나왔다고 했다.

세상이 무섭고 사람이 싫어서 더는 보고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랬잖아.

나는 알고있다.

내가 아는 슬픔이, 내가 겪은 불행이 다가 아니라는 걸.

누군가에겐 분명 내 이야기가 시시하게 들릴테지.

시시하고 간지럽고 우습게 들릴테지.

그래도 이것만은 어쩔 수 없다.

- 난 그 영화 못봐. 슬픈 영화 못봐.

- 왜? 왜 못보는데?

- 무서워서

- 이거 무서운 영화 아닌데?

- 무서워. 무서워서 못봐. 그런 줄 알아.

나는 불행한 엄마 아빠의 딸.

독하고 모질고 그리고... 슬픈 영화를 못보는 사람이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13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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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12 21:51
수정 아이콘
좋은글...이라 말씀드리긴 미안하고.. 여운이 남는 글 잘 봤습니다. 두 번 정독했네요.
절름발이이리
11/11/12 22:0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올빼미
11/11/12 22:10
수정 아이콘
슬픈 영화는 위로가 됩니다. 엄마와 아빠의 인생을 불행하다고... 단정짓지마세요. 미친나무님이 태어난 그날 누구보다도 행복했을분들이니까요. 그리고 누구나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교차하니까요.
Tristana
11/11/12 22:16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많은 생각이 드는군요.
11/11/12 22:16
수정 아이콘
뻘 댓글 같지만... 왠지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글이네요...
11/11/12 22:20
수정 아이콘
...제가 이영화를 봤을 때는 지금 글쓴 madtree님과는 다른 느낌으로 봤습니다. 아마 동일하다고 느꼈다면 뭐랄까 다 큰 20대 남자애가 혼자서 영화관에 와서 정말 소리만 안내고 끅끅대며 한참을 울었던. ...돌아가신지 정말 얼마 안되는 할아버지의 추억과 오버랩된 때문이었을 겁니다. 뭐, 영화란 게 그런것 같아요. 진심으로 몰입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면 어느 새 그 안에서 감정선이 폭발하게되고. 무서운영화만큼이나 슬픈 영화도 한방이 세죠. 후유증도 확실히 있었네요. 다른 느낌은, 아마 살아온 방향성이 다른 탓이겠지만요.

...그래도 오래간만에 추억이 떠오르네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건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글 잘 봤습니다.
tannenbaum
11/11/12 22:5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타인의 불헹을 즐기는 사람들 많습니다. 타인의 불행을 즐기면서 자신들을 위안하는 인간들... 어쩌면 본성일지도 모릅니다.
어둠의 무법자
11/11/12 23:03
수정 아이콘
여러 생각이 교차하네요. 느낌이 묘해요..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따라 무언가에 대해 느끼는 것이 달라 지는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논트루마
11/11/12 23:0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소름 돋았어요.
11/11/12 23:25
수정 아이콘
잘 보았습니다...
Hindkill
11/11/12 23:2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주호민 씨의 웹툰 "신과 함께 - 이승 편"이었던가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행복한 건 아니니까요..."

더 나은 하루하루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힘내시구요
이상철
11/11/12 23:30
수정 아이콘
저도 슬픈 영화 드라마 다큐같은거 잘 못봅니다. 저와는 다른 케이스일 수 는 있지만 어떤기분일지 알 것 같네요 [m]
11/11/12 23:32
수정 아이콘
재주가 부족해서 그런지... 어쩐지 글이 신세한탄으로 보이네요.
마냥 불행한 건 절대 아니죠.
이젠 내가 짊어지고 있는 가족이 버거울만큼 어리지도 무능하지도 않구요.
다만 어느 순간부터 병적이라 할만큼 슬픈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이건 참 치료가 안되네요. 책은 아무리 슬픈 얘기래도 곧잘 읽는데 말이죠. 밀리언달러베이비의 트라우마가 너무 컸나봅니다.
뭐 딱히 함께 보러갈 남자가 없어서 그런 건... 제길.
그나저나 올빼미님 댓글 읽다 헉! 했습니다. 제 닉네임이 정말 이상하군요. 다음 변경기간에는 꼭 바꿔야겠어요.
싸이유니
11/11/13 00:47
수정 아이콘
처음에는 그냥 일상적인 글이려니 햇는데.....
읽고나니 묘한 감정이 일어나네요...약간의 소름도 돋고...
먼가 제자신이.....다시한번 생각해봐야겟군요
아레스
11/11/13 02:37
수정 아이콘
글 잘쓰시는데요..
whoknows
11/11/13 05:19
수정 아이콘
글 정말 잘 쓰시네요... 몰입해서 봤습니다. 행복한 일만 있길 바랄게요. 진심이에요...
신조협려
11/11/13 05:58
수정 아이콘
아 정말 얼마만의 로그인인지...... 저도 과거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너무 감명깊게 봐서 무슨 이야기일까 하고 들어왔는데 보다 더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글을 읽었군요. 부디 좋은 일이 가득하시길 빌겠습니다.
저도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고 울었지만 제가 울었던 이유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마음을 짐작하며 너무 슬퍼서 울었었는데요 여러모로 다시금 영화를 보게 만드는군요.
정용현
11/11/13 20:31
수정 아이콘
마음이 짠하네요. 제 어렸을적도 그렇게 행복한 시간만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저랑 텔레파시하세요?..
정확히 엊그제에도 글 안올라오나.. 궁금해서 작성자 검색을 그 새벽 다섯시에 해서 예전글들을 읽어봤는데.. 이번이 두번째네요! [m]
내려올
11/11/14 15:43
수정 아이콘
휴우.... 제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비슷하군요.

가족이란 뭘까요?
왜 우리는 한 명 때문에 다 같이 침몰해야만 할까요?
나에게는 왜 욕망과,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자유가 없을까요?
사는 게 왜이리 지긋지긋 할까요?
저는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그런지 독해지기 보다는 다 때려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종교도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고요. 오히려 역효과만 나더군요....

madtree님에게도 빨리 자유가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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