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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7/30 03:18:43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남한산성 이후 - 2. 돌아오지 못 한 이들
  BGM을 뭐로 해야 할 지 고민하다가... 그냥 모두 올립니다. 직접 선택하시길... 추게에 있는 Cand님 글 덕에 추노에 대한 글을 보게 됐네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제가 추노를 다 보지 않아서 추노 자체에 대한 평을 할 순 없을 듯 하네요.











+) 혈압 주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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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인조실록 1월 30일)

1. 돌아올 수 없는 강
매번 하는 얘기지만 청에는 인구와 물자가 부족했습니다. 약탈민족이었던 그들이 위 계급에 서기 위해서는 아래 계급이 필요했죠. 특히 복속시킨 몽골에 대해서도 많은 지원을 해 줘야 했습니다. 명을 정복하기 전, 그것을 조달할 곳은 조선 뿐이었습니다.

수십만에 이르는 피로인은 이렇게 정말 간단히 설명이 가능합니다.

청 태종은 이들 포로에 대해 하늘이 주신 것이라며 송환을 거부했습니다. 그나마 철수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붙잡은 포로들은 그것을 금지하고 송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말이 지켜질 리가 없죠. 오히려 그는 몽고군의 약탈을 방조했습니다. 청군은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서북의 주민들에게 도망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했으며, 그들에게 변발은 시켰지만 붙잡아 가진 않았습니다. 다만 도망친 자들은 죽이거나 붙잡아 갔죠. 그렇다고 그게 계속 이어진 건 아닌 것 같네요.

한양으로 돌아온 후 호조는 "여염은 모두 불타고 시체가 즐비한 가운데 남아 있는 사람은 다만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들과 70이 넘은 노인들 뿐" 이라는 보고를 올립니다.

청군이 철수한 후 상경하던 김종일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염은 모두 비었고, 인연이 없어 적막하다. 널브러진 시신들이 뒤엉켜 쌓여 눈에 밟히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 험한 길에서 어렵게 걸음을 옮기지만 도성 사람들 또한 돌아온 자가 없다. 방리가 한결같이 텅 빈 것이 지나온 곳과 똑같다."

강도록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폐허 속에서 한두 살, 혹은 세 살쯤 되는 아이들이 포개져 있는 시신들 사이로 기어 다니면서 울어댄다"

청의 엄청난 진격 속도는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재앙이었습니다. 개전 한 달 만에 경기도의 대부분이 적의 작전권에 들었죠. 임진왜란 초기에는 일본군의 정책이 나쁘진 않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은 있었기에 도망치거나 순왜가 되는 식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뭐 그 후에 끔찍한 꼴들이 많았습니다만... 청은 초반부터 약탈을 자행했죠. 더욱이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면서 도성의 문들을 전부 폐쇄했습니다. 갇힌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습니다. 한편 김경징은 김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뱃길을 대부분 끊으면서 강화도로 가려 했던 피난민들도 죽거나 포로가 됐으며, 어이없이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그 곳의 백성들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도망친 이들이라고 편할 리 있을까요. 당시는 한겨울이었습니다. 그나마 인구가 많았던 하삼도가 주 전장이 되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일 뿐이었습니다.

최명길은 전후 명에 보내는 자문에서 이들 피로인의 수를 50만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항복의 부득이함을 알리기 위해 과장되었다고 생각해야겠죠. 하지만 나만갑의 병자록 등에서 공통적으로 이들이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른다고 적고 있습니다. 최명길의 말을 최고 수치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이들이 끌려가는 길이 호화로울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죠. 최고의 우대를 받아야 할 소현세자조차도 추운 날씨에 이미 병이 걸렸다고 하며, 인조가 직접 온돌에서 자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입니다. 후에는 추위에 대비해 털옷을 청에 보냈죠. 그렇다면 일반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병자록에서는 수백명의 포로들을 열을 지어 앞세우고 한두명의 감시인을 붙여서 끌고 가는 게 하루종일 계속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들은 뭔가를 호소하려 하면 철편에 맞았고, 탈출하다 잡히면 발뒤꿈치가 잘렸다고 합니다. 정묘호란 직후부터 압록강에 뛰어들어 도망치려던 포로들이 많았다고 하고, 청군은 배에 울타리를 설치하거나 포로들을 결박하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청 태종은 압록강을 넘기 전에 도망치는 것은 봐 주지만 넘은 순간에는 도망칠 경우 조선에서 붙잡아 송환하라고 했습니다. 목숨 걸고 도망친 이들을 다시 묶어서 보내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죠. 피로인들에게 있어서 압록강은 말 그대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이었습니다.

청의 포로에 대한 집착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겨우 도망친 이들, 주회인들을 돌려보내라고 계속 협박했고, 명 정벌을 위해 파견된 조선군들을 붙잡아서 "도망친 놈들이다"고 핑계를 대며 노비로 만들려고 했죠. 이후에도 소현세자를 통해, 혹은 직접 조선에게 여러가지 협박을 가합니다. 그 중에는 인조가 직접 심양으로 입조하라는 것까지 있었고, 인조를 갈고 소현세자를 앉히려는 낌새도 보였습니다.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었죠.

청의 협박에 굴복한 인조는 주회인들을 최대한 돌려보내려 했습니다. 여기서 온갖 문제가 발생합니다. 숨어버린 주회인들을 대신해 그 가족들을 붙잡거나 걸인 등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붙잡은 것이죠. 혹은 압록강에 가기 전에 도망친 이들도 붙잡아서 보내려 했습니다. 한편 청이 요구한 귀화한 만주인, 향화인들을 돌려보낼 때 그들과 같이 살던 조선인도 끌려가기도 했죠. 정당하게 속환된 조선인이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2. 속환
반면 주회인들은 돌아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청에 끌려간 이에게 가족이 "누구는 도망쳐 왔는데 너는 왜 못 도망치냐"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게 걸려서 문제가 됐고, 사적인 편지 교환이 금지되기도 했죠. 조선에서는 다시 보내려 하고, 끌려가기는 싫어서 압록강에 뛰어들거나 자살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창성과 삭주 등지에는 이들의 백골이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자살 외에도 손발을 잘라 쇄환을 피하려 했죠. 결국 인조는 이들을 달래기 위한 유시문을 내립니다.

"슬프다. 무고한 우리 백성들이 이역 땅에 잡혀가서 골육을 그리워한 나머지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하여 돌아오기를 마치 그물을 벗어난 토끼가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듯 하였다. 그러나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조약이 엄중하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빠 이미 본업도 잃었는데, 일제히 찾아 내어 결박하여 보내기를 도적들을 대하듯 하여, 자식은 부모를, 남편은 아내를 이별하고 있다. 서로가 헤어질 때에 정리가 극도에 달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기도 하고, 혹은 일부러 굶어 죽기도 하며, 심지어는 수족을 잘라 이별을 보류하려는 자도 있다.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괴로움을 당하여, 가는 도중이나 옥중에서 죽는 자도 많이 있다. 게다가 관리들이 엄한 독촉에 쫓기고 연루될까 두려워하여 인족을 침노하는 등, 그 해독이 온 마을에 퍼지게 되었다. 심지어는 여행하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 그의 족속을 대신하여 보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기한이 급박하여 일일이 판별할 수도 없어서 원통함을 안은 채 함께 사지로 끌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오랜 병 중에서 이런 일을 차마 보게 되었으므로 밥을 먹어도 목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또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말을 하려고 하면 목이 메이며, 위를 쳐다보나 아래를 굽어보나 모두 부끄럽고 두려워 스스로를 용납할 곳이 없다"

"아, 이번 일을 당한 백성들이 아무리 나를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는 나의 죄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유민(遺民)으로서 늙은이와 자제들은 나의 본심을 알아주어 흩어지거나 영을 어길 생각을 품지 말고, 다시 안정하고 농사를 지어 조금이라도 걱정을 덜게 함으로써, 우리 이백 년 종묘 사직이 한 가닥의 명맥이나마 이을 수 있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41년 1월 2일)


인조가 아무리 미워도, "내 탓이오" 하는 게 조선왕들의 일상이었더라도, 자기 변명일 뿐이라도 이렇게 간곡하게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건 찾기 힘듭니다. 사과문은 이렇게 써야죠.


조선에서는 계속해서 그들을 돌려보내기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청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죠. 그들에게 있어 포로는 "전리품"이었으니까요. 거기다 많은 이들이 청인의 노비가 된 상황에서 주인에게 노비를 뺏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돈을 내고 데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속환이라고 합니다. 병자호란 직후인 2월에는 청 태종이 1600명을 돌려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수는 전체에 비해 극히 적었고, 아직은 초반이라서 조선을 달래는 경향이 강했다고 봐야겠죠.

너무 길어서 잘랐지만, 위의 유시문에서 인조는 "곧 돈을 내 속환할 수 있게 할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한편 포로로 끌려간 이 외에도 행방불명된 가족이 있는 이들에게도 속환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청에 가는 사신에게 자신의 가족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죠. 대사간 전식은 이를 통해 일곱 살 아들의 생사를 알게 됐지만, 돈이 없어서였는지 의주에서 만주 쪽을 바라보며 밤낮으로 근심했다고 합니다.

자기 가족이 걸린 일인데 사람들이 이를 아낄 리 없죠. 덕분에 속환가는 높아져만 갔습니다. 특히 이성구의 경우 1500금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며 속환가 폭등에 크게 이바지했죠. 전후 최명길이 이를 경계하며 가격을 고정시킬 것을 건의하는데, 이 때의 속환가가 10냥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이 정도 돈을 마련하기도 어려웠을 상황에서사대부들은 도리어 가격을 올렸을 뿐이었죠. 조정 역시 종실과 대신들의 가족, 잘 해 봐야 남한산성을 방어했던 병력의 가족들을 구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더불어 여기서도 온갖 비리가 만연했죠. 청은 피로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조선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열람할 때도 관련 당상과 색리들에게 뇌물을 써야 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이걸 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속환 문제는 조선 정부 차원에서 고위층의 개인적인 문제로 바뀌어 갔습니다. 청은 이 속환 기간을 10년으로 잡았고, 시간이 가면서 돈을 받아내기 위해 조선에 속환을 강요했습니다. 조정의 관심은 줄어드는 가운데 청은 속환을 강요하고, 백성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돈을 내지 못 해 슬퍼하는 웃기 힘든 상황이 계속된 거죠. 거기에 겨우 속환에 성공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굶어죽는 경우도 있어서 중간에 창고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자는 논의도 나왔습니다.

예조좌랑 허박은 속환을 전담하는 기구를 만들고 그 비용을 대기 위해 왕실은 물론 부자와 일반 백성들까지도 힘을 합치자고 건의했습니다. 여기에 은광 개발 및 비리 제거, 속환가 제한까지 총괄적으로 건의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3. 돌아오지 못 한 이들
시간이 흐르고 속환에 대한 조선의 의지는 약해져만 갔습니다. 효종 대로 가면 정부 차원에서의 노력은 멈춘 상태였죠. 반면 청에서는 현종 대까지도 주회인을 돌려보내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현종 6년에는 동생을 찾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가 청에 체포된 최순일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청에 적응한 사람도 많았겠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리움을 이기지 못 해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죠.

대표적으로 현종 대에 탈출했던 안추원이란 이가 있습니다. 그는 강화도에서 끌려가서 북경까지 가게 됩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 하나로 62년에 탈출하지만 산해관에서 붙잡히죠.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2년 후 다시 탈출해 결국 성공합니다. 28년 만에 돌아온 조선이었습니다.

조정은 차마 돌려보낼 수 없어서 고향인 풍덕으로 보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하지만 고향에는 그의 가족들이 없었습니다. 조정은 청에 알려질까 두려워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고, 고향 사람들도 쉬쉬했죠. 그런 그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북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고향이었지만, 더 이상 그가 있을 곳이 못 되었던 것이죠. 그는 압록강에서 붙잡힙니다. 이 사건은 커져서 청에서 정식으로 조선을 압박했고, 이를 묵인한 대신들을 죽여야 된다는 말까지 나왔죠. 이는 현종이 북쪽을 향해 무릎 끓고 직접 죄를 청하면서 겨우 무마됩니다. 사관은 이를 남한산성의 굴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안단이라는 사람의 경우 무려 1674년, 숙종 즉위년에 조선으로 도망쳐 옵니다. 포로가 된 지 37년만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청 사신들이 조선으로 오고 있는 상황이라서 의주 부윤은 그를 봉황성으로 압송하죠.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

안단의 말이었다고 합니다.

통역을 통해 청에서도 크게 인정받은 정명수나 소설 최척전에서 "조선보다 청이 좋다"고 한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훌륭히 적응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병자호란 때 붙잡힌 건 아니었지만요) 사람에 따라서, 혹은 때에 따라서 조선에서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된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겠죠. 하지만 조선인은 대부분 하층민에 배치됐고,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보다 더 큰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죠. 돌아온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역 땅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병자호란 직후인 2월 19일, 인조는 백성들에게 교유문을 내립니다. 그 내용 역시 위에 올린 것과 같이 슬프기 그지 없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7%AC%EC%97%BC&keyword=%EC%97%AC%EC%97%BC

"아, 겹겹이 포위된 약한 군졸은 백등(白登)의 위태로움보다 심했는데, 뜻을 굽히고 보존하기를 도모하여 겨우 청성(靑城)의 재액만은 모면하였다. 그러나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사람마다 원하는 바인데 지금 나는 헤진 갖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는 것이 일반 천민과 다름이 없고,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려 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인데 지금 나는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이미 북쪽으로 떠나 보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내가 매우 마음 아파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이 도를 잃은 나머지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그리하여 난을 구하러 달려온 군사들로 하여금 길이 전장의 원혼(冤魂)이 되게 하였고, 죄 없는 백성을 모두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게 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어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여 어디를 보든지 간에 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책임을 장차 누구에게 전가할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에이는 듯하여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하건대 후회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단련하여 환란에 대비할 것을 생각했지만 각 마을이 이로 인해 불안해 하였고, 미곡을 무역하여 군량을 비축하려고 했지만 민력이 이로 인해 크게 곤궁해졌던 것이었다. 명예와 절개를 포상(褒賞)함은 세상 사람들을 격려시키기 위한 것인데도 근거없는 의논이 이로 인해 더욱 심해졌고, 요역(搖役)과 부세(賦稅)를 부과하여 독촉함은 완악함을 경계하기 위한 것인데도 포악한 관리가 이로 인하여 횡포를 부렸다. 조정에는 아첨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었고, 세상에는 순후한 풍속이 결여되었다. 재앙과 이변이 번갈아 나타났는데도 나는 두려워 할줄 몰랐고, 원망과 한탄이 떼로 일어났는데도 나는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이는 실로 천성이 용렬하고 어두워 정치의 요체를 몰랐기 때문인데, 합당한 정치를 펴려다가 도리어 혼란으로 몰고 갔으니, 대군이 몰려오기도 전에 나라는 이미 병들었던 것이다. 전(傳)에 ‘나라는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법이다.’고 한 말을 어떻게 믿지 않겠는가."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이 정도의 대국민 사과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찾자면 선조가 내린 교서 정도겠죠. 이 글을 보면 인조에게도 동정이 듭니다. 그 역시 아들과 며느리를 포로로 보낸, 가족을 잃은 아버지였죠. 자기의 잘못을 낱낱이 말 하며 백성들에게 사과하고 있습니다.

뭐 "나도 이렇게 힘들다능" 이러면서 물타기라는 느낌도 들긴 합니다. 특히 그 후에 소현세자에게 보여 준 모습을 보면 저게 진심일지는 의문이 들죠.


그래도 사과문은 저렇게 써야겠죠.


왕조시대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넘어갈 수 없는 것이, 포로 문제에서 조정의 책임이 크다는 것입니다. 남한산성 출성 문제에서 대신들이 기를 쓰고 막은 것, 인조 역시 계속 버티면서 고집한 것은 화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 임금의 출성만은 막는다는 거였습니다. 심양으로 끌려간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죠. 결국 인조 자신의 안전 보장을 위해 포로가 된 백성들의 문제는 뒷전으로 미뤄 둔 것이었습니다. 최명길과 정은, 각기 척화파와 주화파의 거두들은 입을 모아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인조가 직접 압록강까지 친정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야 지더라도 조선의 힘을 보여주어 마냥 뺏기지 않는다는 거였죠. 하지만 인조는 자신의 안전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피로인 문제에서는 조선 조정이 속수무책으로 항복한 것을 이유로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강화도 함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김경징 역시 욕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는 강화도에서 방비를 소홀히 하고 결국 자기 혼자만 몸을 빼 그 수많은 포로를 만들었으니까요.

뭐... 신나게 욕했으니 조금만 쉴드를 쳐 보자면, 그나마 조선이 고려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습니다. 출성 직후부터 줄기차게 청에 송환을 요구했으니까요. 고려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이들에 대해서는 이전에 많이 얘기했으니 굳이 길게 쓰지 않겠습니다. 전쟁과 그 후에 청에 내는 세폐 및 원정군에 대한 지원을 위해 그들도 결코 쉬운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겁니다. 청에 군량을 대기 위해 부역을 시켰는데 "광해군 때보다 심하다"는 원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뭐 반대로 광해군 때의 궁궐 공사가 그만큼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는 말도 되죠 -_-; ) 특히 언제나 사건의 중심이 된 서북지역은 더 이상 남은 게 있기나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좀 나아지려니 경신대기근으로 대표되는 기근이 들이닥쳤습니다. 70~71년간 이어진 이 대기근에서 무려 100만명의 백성들이 굶어죽었다고 하죠.

4. 연못 위의 낙엽
페미니즘이고 뭐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여성 피로인들의 문제입니다. 연못 위의 낙엽, 뭔가 낭만적이죠? 전체를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바닷물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

끔찍하고 치가 떨리는 말입니다. 이것은 강화도에서 청군에게 더럽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여인들을 묘사한 말입니다. 출처는 모르겠네요. 이들은 스스로의 선택이든 (김경징의 경우처럼) 가족의 강요에 의해서든 죽음을 택했습니다.

37년 6월, 청 태종은 청군 지휘관들을 처벌합니다. 그 죄목은, 그들이 조선에서 사로잡은 여자 피로인들을 신고하지 않고 은닉했다는 거였죠. 그들 중에는 다른 장수가 잡은 여인을 뺏어 자신의 첩으로 삼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후부터 청 내에서도 조선 여인들에 대한 문제는 불거졌던 거죠.

한겨울에 포로로 끌려가는데 여자라고 남자보다 환경이 좋았을 리가 없습니다. 똑같은 고통을 당했고, 철저하게 전리품 취급 당해서 이리저리 팔려다니며 능욕당했죠. 아이가 있는 여인들은 자기 자식이 버려지거나 죽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그나마 적응이라도 쉬웠으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에겐 또 다른 적이 있었습니다. 청군의 본처였죠. 투기가 심했던 본처들은 조선 여인들에게 끓는 물을 뿌리거나 고문을 가했다고 합니다. 청 태종이 직접 그런 자들을 남편이 죽었을 때 같이 순사시키겠다고 경고했을 정도였죠.

돌아오는 길이라고 쉬웠을까요. 도망쳐 오거나 속환돼 오는 여인들에 대해 조정은 관리를 보내 직접 호위하게 했고, 특히 사대부 부녀자들을 잡아가는 자들을 효시하라는 명까지 내립니다. 이들을 납치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컸던 것이죠. 납치된다면... 그 뒤는 상상이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도 문제가 되는 것들이니까요. 자, 이런 위험들까지 다 이겨내고 그렇게 바라던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걸로 끝이었을까요?

그럴 리가요.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은 본심이 아니었으니, 그들에게 목숨을 버려 죽지 않은 것을 책할 수는 없다 해도 남편의 집안에서 볼 때 이미 대의(大義)가 끊어진 것이니, 어찌 강제로 다시 결합하게 하여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비록 그들이 의지할 데 없음을 가엾게 여겨 제 살 곳을 찾게 하고자 한 것이지만 보고 듣는 이들이 의혹하여 원근이 떠들썩하니 풍속을 해침이 작지 않습니다. 비록 일제히 이혼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더라도 재취(再娶)하거나 그대로 데리고 살거나 하는 것은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38년 5월 1일)

"부부는 인간의 대륜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은 남편의 집안과 대의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어찌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하여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은 예의의 나라인데 한 번 변란을 겪은 뒤 이런 거조가 있으니 신은 삼가 성조(聖朝)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깁니다"(5월 21일)

여기에, 위에서 자기 자식을 구하기 위해 속환가를 폭등시킨 이성구의 말을 추가하겠습니다.

"또 역적의 딸도 이혼하게 하는 예가 있는데 지금 이 오욕을 입은 부인은 역적 집안의 자손보다 더 심하지 않습니까."(38년 6월 13일)

이게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에 반대하는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 수준으로 절대 빠지지 않는 최명길의 말을 들어봅시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인조 역시 이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은 이미 본심에서가 아니었고 죽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사관은 이후 다시 합치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재혼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명길의 말에 대한 사관의 평가를 들어보겠습니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최명길은 선조 때에도 이혼한 예가 없다는 것을 들며 반대했었습니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에 뭐... 화 좀 내도 되죠?

자기들이 잘못해서, 자기들이 여자들을 지키지 못 했는데, 그게 그들의 죄라고 합니다. 그걸 바로잡자는 것을 오랑캐의 짓거리라고 합니다. 대체 이게 뭘 의미할까요?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부부가 같이 끌려간 상황에서, 아내는 청인의 눈에 들어 살림을 맡게 됐고, 몰래 은을 훔쳐 남편을 속환시킵니다. 남편은 조선으로 돌아가서 속환가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하고 떠납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감동적인 일이죠.

돌아간 남편은 재혼했습니다.

하아... 거 참...

예 뭐 그 시대에는 여자의 지위가 정말 낮았죠. 하지만, 레이디 퍼스트에서 알 수 있듯 남자는 여자를 자기보다 낮게 볼수록, 여자의 주권이 없을수록 더더욱 여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뭘까요? 청의 침략을 막지도, 자신의 여자들의 끌려가는 것을 막지도 못 한 자들이 이제는 여자에게 죄가 있다며 버리고 있습니다. 그럼 자기들은 오랑캐에게 무릎 끓고 절개를 잃었으니 마땅히 자살해야 될 것을 왜 그렇게 목숨이 아까웠을까요?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힌 여자가 가문을 이을 자격이 없다면, 오랑캐에게 무릎 끓은 그들 역시 가문을 이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모두 여자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일 뿐이죠. 그래놓고 자신들은 고상한 척 했습니다. 자신들의 이상을 펼치지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지도, 왕이 치욕을 당하는 것도 막지 못 했고, 자신의 가족, 특히 여인들이 끌려가는 것을 막지도 못 했습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는 그 여인들을 더럽다고 버린 거죠.

휴 -_- 흥분했군요.

뭐 모두 이런 것은 아닐 겁니다. 최소한 강화도 등에서 자진한 사대부들은 오히려 존경해도 될 것입니다. 강화도에서 같이 죽기로 약조했고 아내는 자결했지만, 구차하게 목숨을 건진 윤선거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이었는지 학문에만 전념하며 조정에 출사하지도, 재혼하지도 않고 조용히 살았죠. 이런 사람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와서는 화를 참을 수 없네요.

이들 "환향녀"가 "화냥년"이라는 욕으로 변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 그것까지 파고 들 필요는 없겠죠. 일반 백성들까지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교적 사대부 내의 문제로 봐야 되긴 하겠죠. 하지만... 그들의 태도를 변명할 방법도 가치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조선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편입니다만... 아니 그래서 더 열 받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여담으로 "왜구에게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식을 버리고 강으로 도망쳐서 살았다"는 전설을 얘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버렸음에도 그 여인이 "절개를 지켰다"고 칭찬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는 것두요. 이게 당시의 인식이라는 것이 참 슬프고,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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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다시 높으신 분들 얘기로 돌아가보죠. 최명길부터 임경업, 인조까지... 길면 두 개로 나누겠습니다.

이번 글의 출처 역시 모두 한명기 교수님의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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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1/07/30 03:30
수정 아이콘
한국 전쟁에 다리 끊은게 역시 전례가 있었군요. 아... 연재 글 읽으면서 이렇게 화 나는 것도 처음이네요 -_-;
11/07/30 04:20
수정 아이콘
중간중간 써놓으신 일침이 일품입니다
무리수마자용
11/07/30 05:30
수정 아이콘
저도 남자지만 참 못났네요. M으로 즐기기에도 벅찰 정도입니다.
11/07/30 09:15
수정 아이콘
인생도 글도..... 제일 중요한건 타이밍이군요. 물론 그 타이밍을 활용하는 건 개인의 재치입니다 ㅡ.ㅡ)=b
물여우
11/07/30 09:29
수정 아이콘
본문과는 크게 상관은 없지만 왠지 고등학교 때 '성리학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라는 주제로 논술쓰던 생각이 나네요.
지문이 뭐였더라... 성리학 때문에 망한다 아니다로 갈리는 아주 이분법적인 문제였는데...
호떡집
11/07/30 10:11
수정 아이콘
조선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좋은 점을 취하기 보다 문자 하나하나에 교조적으로 집착하는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을 새삼 깨닿습니다.

오늘 분량은 제 m의 한계를 뛰어넘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11/07/31 06:38
수정 아이콘
글 리젠이 하도 빨라서 못보고 놓칠뻔 했네요.
찾아내서 다행입니다!
youngwon
11/07/31 08:4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국어 전공이신지 국사 전공이신지 헷갈릴 정도로 해박하고 정통한 역사지식을 보유하고 계시네요. 부럽습니다.
요즘 박시백님의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중인데(읽기는 다 읽었는데 관심있는 편들을 서점에서 사서 다시 읽는 중입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이 시리즈가 끝난 이후에, 조선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해주실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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