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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9/25 10:29:15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역사불판-중세사2) 사림파에 대한 재평가
역시 발제문이 길고, 논의도 따로 하는게 편할 것 같아서 따로 올립니다.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도 곧 올리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조선 사림파에 대한 평가
1)
조선시대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에 대한 평가는 오랫동안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일관되어왔습니다. 훈구파는 나쁘고,욕심이 많은 낡은 기득권세력이고, 사림파는 이것을 격파하여 역사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한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신진세력이라고...

최근의 연구경향은 이에 대해 몇가지 다른 시각을 던지면서 새롭게 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훈구파에 대한 재평가입니다.

‘훈구파는 ‘악’이고, 사림파는 ‘선’이다,라는 논리는 역사의 승자가 된 사림세력에 의해 규정되어진 것은 아닐까?’

뭐, 그런 것입니다. 조선 성리학관련 발제자료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림파는 피를 통해 성장하고 단결하고 극복했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이후 사림-서인-노론의 250년 장기집권의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훈구파는 과연 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변하고 선과 악도 그러하듯이 한때는 정의였고, 시대적 사명이었던 것이 훗날 악의 세력이고 타도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닐까요? 흔히 헤겔철학의 정수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대립물로의 전환’과정이 일어난 것,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닐까요?

2)
훈구파에 대하여 재평가하는 시각의 입구는 그들을 ‘경국대전세대’라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조선이 고려시대와 다르게 진일보한 측면은 바로 이 경국대전에 있다는 것이지요.

고려는 귀족국가였습니다. 귀족의 힘은 자신의 영역안에서는 국왕을 능가했으며, 귀족끼리 합종연횡을 통해 무력으로도 국왕을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토호세력’으로 그들이 존재하며 완전히 무장해제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중앙권력에서 귀족주의가 종말을 고한 것은 ‘경국대전’을 통해서입니다.

경국대전세력들의 정치적 지향은 그래서 ‘큰정부’입니다. 법률과 제도로써 시시콜콜하게 간섭하고, 지방관도 중앙정부에 의해 관리평가되고, 지방의 유향소를 거점으로 하는 여론주도세력의 힘은 ‘위법’한 일이 아닌 경우, 가령 ‘유교적 품위에 어긋난다’ 따위의 두루뭉실한 이유로 탄핵을 시킬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법을 만든 그들은 법을 이용해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태종-세조에 의해 피의 숙청과 함께 ‘법률’의 제정되었다는 것은 법이 가진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왕권의 정당성을 완벽하게 설득시키지 못한 채 권력을 집행하려면 ‘여론’에 눈을 감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세조로 하여금, 법률과 측근정치에 의존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조는 의정부를 믿을 수 없었고, 자신의 비서실인 승정원을 통한 ‘원상’정치,밀실정치를 시행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현대사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커보일정도로)

그러나 이런 독재적 왕정은 양반세력의 저항과 왕실이 ‘원상’의 원로들에게 휘둘리는 양면공격에 시달리게 함으로써 왕권의 위기를 심각하게 노출시켰습니다. 성종은 이것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대간’을 적극 활용합니다. 대간은 여론의 힘을 입어 의정부권력을 견제하는 일을 하는 동양식 권력분립제도에 그 기반이 있습니다. 성종은 소위 훈구파로 일컬어지는 공신세력들을 홍문관을 필두로 하는 대간들을 이용해 견제하려고 하였고, 소위 ‘풍문탄핵’을 사실상 허용합니다. 소문만 돌아도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며 ‘처분만 바라겠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지요.

대간의 힘은 여론의 힘인데요, 이 여론에 기준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대간세력이 소위 사림세력의 부흥시킬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선, 공신세력을 탄핵시킬 명분으로 삼은 것이 ‘의리론’. 그러니까 단종과 세종사이에서 ‘불사이군의 원칙’을 어긴 공신세력들은 의리를 저버린 사람, 사대부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이 이데올로기를 위해 영웅을 스스로 탄생시키는데요, 그가 바로 정몽주입니다. 그를 비롯해 사육신까지 ‘의리를 지킨 선비’들은 전부 복권되고, 반대의 경우는 모욕을 당합니다.

사실, 정몽주는 아무리 제가 뜯어보고 뜯어봐도,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학문에 높은 성취를 남겼다고 하지만 그냥 중국 성리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수재’였을 뿐이고,학자로서 자취를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이후 광해군시대에 북인의 몰락과 함께 그 계보가 사라져버린 이색과 이곡의 경우는 그 자취하나하나가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정몽주-길재-김종직-사림파 ...
이곡-이색---(서경덕)-이지함-이산해...이, 한산이씨 가문이야 말로 결국은 전설로만 남게 된 묘한 집안이 되어버렸습니다만....이들의 세계관은 이후 조선후기 노론 내 낙론과 북학파에 의해 재평가되기도 합니다.)

이런 이데올로기 작업을 마친 대간 세력은 자신의 손에 있는 간쟁권과 탄핵권을 넘어 사림의 여론,즉 공론을 무기로 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 '공론‘의 무시무시함은 조선시대를 뒤집었다 놨다하는 힘이 됩니다.

광해군의 좌절에도 공론을 보여주는 정치세력화한 유생들의 힘이 여실히 드러나는데요, 성균관의 학생들, 서울의 사부학당 학생들과 지방 서원의 유생들까지 툭하면 궐기하고 시위하며 여론을 주도해나갔기 때문에 사림파의 장기집권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사림-서인-노론 장기집권의 비밀은 바로 이 ‘공론정치’를 통한 자신들만의 기득권지키기에 대항할 다른 세력들의 정치적 무능과 정치적 세력화의 실패가 한몫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힘을 기른 세력을 사림파라고 합니다. 그들은 훈구파에 맞서 작은 정부, 즉 여론에 의해 정치가 이끌어져가고, 지방자치를 통해 중앙정부의 전횡을 막는 행정조직을 지향합니다.

3)
사림파의 경제적 배경에는 중소지주들이 대지주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는데요,이것은 제 연구로는 근거가 없어보입니다. 사림세력은 지방을 거점으로 하는 최대의 토착지주들입니다. 이들은 중앙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파괴하려는 경국대전체제에 대한 심각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점차 학연과 지연에 따라 모이게 하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이것이 조선 유림의 독특한 사승,지연관계를 낳았고요)

사림파는 훈구파와의 저항속에서 끊임없이 지방권력자로 재무장합니다.이들의 놀라운 정치적 역량은 ‘서원,향교,유향소,향약’등과 같은 지방권력거점지역을 차지하는 방식과 속도에서 보여집니다. 지방의 권력자로 등장한 그들은 경국대전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비축하게 됩니다.

훈구파도 가만히 있을리는 없었고, 그것이 피의 사화로 거듭되었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최종 승리자는 사림. 그들은 선조의 등극과 동시에 역사의 승리자가 됩니다.
사림파는 한반도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치명적 자기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데요, 그것은 나눠먹을 땅이 한정되었고, 관직도 많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상 북쪽이든 남쪽이든 어느 사방으로도 진출하여 정복활동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 투쟁의 초점은 내부로 향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내분을 통해 세력을 잘라내는데요, 동인-서인, 북인-남인, 대북-소북, 노론-소론, 등의 격렬한 당쟁을 통해 승자독식의 게임을 이어나갑니다.

한 연구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붕당정치의 경우 힘의 균형이 있을 때는 서로 조심하기 때문에 민란과 봉기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힘의 균형의 파괴, 즉 독재가 가져온 무시무시한 결말은 이미 우리는 근현대사를 통해서 보아왔기 때문에 여기서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가지,독재는 효율이 높으나 치명적으로 빈부격차를 낳고, 힘의 균형은 시끄러우나 기득권자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4)
조광조의 비극적 삶은 사태를 냉정하게 보기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는데요, 여기에서는 두가지만 얘기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논리입니다. 조선시대 내내 개혁적이거나 공격적 행정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붙는 꼬리표는 ‘왕안석주의자’입니다. 아마 현대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리가 존재한다고 여겨지는데요, 가장 가까운 개념이 ‘좌빨’이라는 이름의 색깔론이라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아마 현대사에서 다뤄지겠죠? ‘색깔론’의 탄생배경을 비롯하여 어떤 때 구체적으로 먹히고,어떻게 기성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은 논리가 되었는지)

이 급진적 개혁에 대한 ‘왕안석주의자’의 꼬리표가 무서운 것은 그가 ‘주희’의 대립항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데, 실패한 개혁의 대명사처럼 치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자초한 조광조의 정치력의 한계도 있었는데요, 그것은 사림파가 훈구파를 공격하는 무기가 바로 ‘욕심쟁이, 당신은 소인’ , ‘청렴결백한 나는 군자’라는 논리였다는 것입니다. 훈구파는 당장 조광조도 똑같은 인간이란 걸 보여주기 위해 ‘너는 늘 깨끗한가’라는 식의 정치공작을 펼칩니다. 백성 만명을 등쳐먹은 훈구파에게 아뇨, 쟤들은 사실은 만백명을 등쳐먹었어요, 했을 때의 숫자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깨끗한 군자연하던 사림파에게 “쟤들도 인간인데 깨끗할까요? 아마 털면 백명은 나올걸요?”하고 말하는 순간의 폭발력은 이미 보아온 바이니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조광조는 ‘군자-소인’대립구도로 반대파를 몰아가기 보다, 더 확실한 법률적 강제력을 장악하는 방법을 썼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사림, 분권형, 작은 정부형을 지향하는 정치가였습니다.

두 번째로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이전에 문제제기하신분의 말씀대로) 현량과에 대한 것입니다.
말이야 인재추천을 위한 새로운 등용제도라고 했지만 그 출신자는 모두 조광조일파입니다.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것은 정치적 부담을 스스로 진 꼴입니다. 천거제의 기준은 지방향촌조직의 천거입니다. 좋게 말하면 국회의원과 같은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나쁘게 말하면 지방을 장악한 사림세력의 자기 세력 진출로인 것입니다.

이런 특수성을 빼고 조광조 개혁을 평가한다면 인재추천제도는 과거제가 가지는 맹점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이미 중국도 처음으로 시행한 당나라 말기, 과거제의 폐단을 보았고, 청나라의 경우에도 그 대단하던 위세가 꺾인데에는 과거제가 가지는 향촌조직과의 긴장감 상실로 인해 외척,측근,환관정치 코스를 밟았던데 있습니다.(우리나라도 결국 이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

과거제의 항목은 변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주요출제경향문제 따위가 나와 이걸 따로 가르치는 사설 학원이 들어서고, 여기서 달달외워 합격한 관리들의 경우는 수준이 떨어지다 못해 실무능력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아 아전에 의존하느라 소위 ‘삼정문란’을 낳앗고, 지방 향촌조직의 여론에 지나치게 연연하느라 산림정치를 낳았고, 더 나아가 관리와 서원이 결탁하여 조선사회를 수렁으로 몰아넣었으니까요.

5)
어찌되었든 역사는 앞으로 갑니다. 그걸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반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사림파는 조선을 장악했고, 여론정치를 부활시켜냄으로써 당쟁을 통한 힘이 균형을 모색할 수 있는 정치실험이 가능하게 했고, 의정부서사제를 도입함으로써 왕실과 결탁한 소수세력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건전성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무너집니다. 외국의 동양사학자는 모든 나라가 그러했듯이 조선은 이때 무너졌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쟁이 목숨을 이어준거죠.

이렇게 취약해진 권력을 잇기 위해 광해군시절 인조반정을 통해 사림파는 다시 재집권에 성공하자마자 ‘비변사권력’을 통한 장기집권계획을 능숙하게 처리합니다. 정치적으로 이들 집단의 힘은 경악할 정도입니다.

‘비변사권력’은 전시에 만들어졌으나 효율이 높은 기관. 따라서 독재자라면 무조건 손아귀에 쥐고 흔들만한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조선 서인-노론 장기집권과 독재를 가능해준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권력기관만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면 노론내부에서 나눠먹는 것도 아까웠습니다.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는 이 권력기구에 의한 독재정치의 백미이자 극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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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덩이
09/09/25 11:22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말미에 적어주신, 광해군 이후 사림파의 장기집권계획은.. 마치 요즘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네요.
홍승식
09/09/25 11:55
수정 아이콘
조일전쟁 후 조선은 무너지거나 완전히 환골탈태했어야 했습니다.
광해군이 환골탈태를 위해 노력했으나 결과는 인조반정으로 인한 회귀.
안타깝죠.
Valentian
09/09/25 13:20
수정 아이콘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써의 생각과 갈리는 점이 몇가지 보입니다.
1.제목 : 조선건국부터 조선의 역사는 중세를 넘어서 근세로 평가받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세로 구분한 것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 방면에 있어서 고려의 음서제도와 과거제도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개혁하여 신분 위주의 등용보다 능력 위주의 등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이를 토대로 조선이 고려와 대비하여 사회, 경제, 문화 등으로 쭉쭉 달라지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도 중세라 표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 3)내용의 아랫부분에서, 각 붕당이 끊임없는 내분을 통해 세력을 잘라낸다는 내용은 일본의 우익과 우리나라의 극보수가 똑같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식민지 타율성론과 다를바 없습니다. 물론 붕당정치의 변질 과정에 있어서는 맞는 내용입니다. 붕당이란 명칭을 사용했던 것이 일본의 식민지 타율성론과 박정희의 유신 독재의 정당성을 혁파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지만, 일단 뒤로하고. 초기 붕당정치의 하에서는 '공존'의 미덕이란 반드시 지켜졌습니다. 조선의 미묘한 권력의 분배(예를 들어 이조전랑을 통해서, 조선의 3품 이하의 관리들이 그저 실무직으로 전락하는 사태를 막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의 원칙 하에서 붕당이란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갖춘, 꽤나 선진적인 정치 시스템이였습니다. 4)중간내용과 맞물리게 말한다면, 조광조는 '공존'의 미학을 지키려고 했던 자이기 때문에 '공자 vs 소인'의 구도를 말하였습니다. 붕당정치의 변질 과정에서 이와 같은 구도는 '충신 vs 역적'의 구도로 변질되었고, 따라서 공존의 원칙이 사라짐과 동시에 노론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더 쓰고싶은데. 시간이 없군요 크크. 항상 좋은글 잘 읽고 있으며 나중에 뵙겠습니다.
信主SUNNY
09/09/25 13:24
수정 아이콘
뜻이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만, 능력이 받쳐주지 못할 때에는 그저 아까운 사람이 되지요. 이 능력이라는게 본신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국가단위가 되면 본신의 능력이라는 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싶어지지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욕심이 있기 때문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힘을 모을 수 밖에 없지요. 지금보다도 더 절박했을 겁니다.
Architect
09/09/25 14:3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4)번에 대해 제 짧은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생이 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은 즉위초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신씨를 폐비시킬정도로 훈구공신들에게 시달려서,
그 훈구공신들의 기세를 꺾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조광조를 기용하고 불과 몇개월만에 대사헌까지 승진시키며 파격적인 신임을 보여줬으나,
소격서격파 - 위훈삭제 에서 보여지듯 조광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선 집단사직, (성균관유생의)집단휴학 등으로 중종에게 위협했으며,
그러한 조광조의 과격성이 훈구공신에게 시달려왔던 중종의 눈에는 조광조도 훈구공신과 다를바 없다고 느낀 것입니다.
중종의 신임을 잃은데다가, 위훈삭제로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훈구공신들이 중종과 힘을 합쳐 조광조를 사사시켰죠.

중종은 조광조를 스스로 내치면서,
훈구공신들은 중종이 또다시 제2의 조광조를 기용할지 모른다는 불신이 생겼고,
사림들에게는 조광조를 사사시킨것은 중종이라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
중종이 자신의 치세를 위해 선택한 길은 윤임, 김안로, 윤원형 등 외척세력과의 야합입니다.
희대의 간신이자 삼사를 자신의 언론으로 이용한 김안로, 명종조까지 조선의 등골을 빨아먹은 윤원형.
조선조를 통틀어 외척이 가장 득세했던 시기는 중종조와 조선말기의 안동김씨-풍양조씨였고, 외척정치를 거치면서 조선은 피폐해졌죠.

조광조는 스스로 자멸했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임금의 그릇과 성격을 제대로 몰랐으며,
밥그릇을 섯불리 뺏었다가는 어떠한 결과가 있을지 잘 몰랐던 것입니다.
조광조의 자멸은 조선사 최악의 비극이 아닐까 합니다.

P.s./ 조선초부터 계속 탄압받아서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린 한국불교가 문정대비 수렴청정시절 기사회생하여 조일전쟁때 승병의 활약이 가능했다는 것을 본다면, 역사는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제리와 톰
09/09/25 16:06
수정 아이콘
조선의 건국과 동시에 고려 시대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자 했던 학자들(주로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람들로써 군주에 대한 의리를 중시했던)은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조선 건국 당시에 조선의 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고려 시대부터 남아 있던 관료로서 역성혁명에 동참하고자 하던 사람들, 이성계 중심의 무인들, 역성 혁명의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던 모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마저 태종 이방원의 왕권 강화 차원에서 신권의 상징인 정도전 일파의 제거 작업으로 인해 역성 혁명 당시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던 사람들은 거의 제거되고 맙니다.
오죽하면 고려 시대의 구유신 중에 막내 뻘에 해당하는 황희가 세종의 정신적 멘토가 되었겠습니까.

태종이나 세종 모두 인재의 발굴이 시급해 집니다.
낙향했던 목은이나 야은의 제자들은 스승들의 영향하에 출사를 꺼리고 있기에 당장 집현전이라는 특수 기구를 만들어 문화 사업을 독려하게 된 것은 당시의 다급한 인재 고갈 현상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슴을 보여줍니다.
세종의 사망 후, 다시 세조의 인재 제거 정책으로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육성되었던 엘리트 학자들의 수가 급감하게 됩니다.
더구나 세조는 신권의 상징인 의정부보다는 승정원 위주의 밀실 정치를 펼치면서 인재의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력의 등장은 요원해 질 수 밖에 없었지요.
성종이 훗날 사림의 정신적 거두가 되는 김종직을 등용하기 시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정치의 상층부에서 학자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보기가 어려웠기에 긴급히 새로운 세력의 수혈이 필요해 지게 된 것이지요.
또한 이들은 대부분이 고려말의 성리학자들이었던 야은이나 목은의 영향을 받았기에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는 현실과의 타협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 겠지요.
김종직의 중앙 권력으로의 진출은 자연히 은둔하고 있는 학자들의 경세에 대한 자신감을 부추기게 되어 훗날 여러 번의 사화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완전히 사림파가 조선이라는 사회를 지배하는 계기가 됩니다.

조선 전기와 중기를 구분짓는 계기를 정치적으로 보면 훈구와 사림의 교체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훈구의 가장 큰 업적이랄 수 있는 경국대전이 만들어진 성종 대에 사림의 거두라 할 수 있는 김종직의 등장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보면 성종 시대야 말로 그러한 경향을 엿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 아닌가 합니다.
귀염둥이
09/09/25 19:56
수정 아이콘
정몽주가 웃긴게, 사림파들은 자신들의 뿌리내지 시조로 정몽주를 꼽고 있지만

정작 정몽주의 학풍자체는 훈구파였죠.
루크레티아
09/09/26 00:29
수정 아이콘
Valentian님// 붕당이 선구적인 정치 체계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정을 못받는 이유가 바로 그 견제의 미덕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의 시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선의 균형잡힌 당파 정치는 율곡 사후에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율곡이 죽고나서 곧바로 동인의 관직 독식이 이어졌고, 다음에는 정여립 사태에서 서인의 동인 독박 씌우기가 이어졌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 호란 이후 예송논쟁 시절이 균형잡힌 시기라고 역사서들이 적고 있기는 하지만 그 예송논쟁이라는 것이 전혀 쓸모없는 소모적인 언플이라는 것을 보면 이것도 딱히 설득력이 없죠.
그리고 조광조는 별로 공존의 미학에 부합되는 인물은 아닙니다. 단지 그는 자신의 세력들, 즉 사림들을 조정에 제대로 꽂아넣지 못한 상태에서 훈구 세력의 집중타를 받고 쓰러진 것 뿐이죠. 소격서를 쓸어버리고 위훈을 삭제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훈구파들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행위입니다.

사림파로서 처음 정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김종직의 의지처럼, 그리고 율곡의 사상처럼 나라를 다스렸다면 재평가고 뭐고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지 않은 인습 중의 하나인 학벌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담합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는 최악의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곧 죽어도 성리학이라는 폐쇄적 사고관도 비판받아야 하죠.
09/09/28 23:39
수정 아이콘
이런글을 보면 중등교육에서 가르치는 역사와의 괴리가 너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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