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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8/30 15:09:13
Name SAS Tony Parker
Link #1 서울대
Subject [기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서울대 졸업식 축사 전문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 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 십오 년 전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축하받기 위해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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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핑키
22/08/30 15:19
수정 아이콘
마치 정성껏 준비한 '그간 축사를 고사한 이유' 같네요
러프윈드
22/08/30 15:23
수정 아이콘
글도 잘 쓰시네........................
에이치블루
22/08/30 15:27
수정 아이콘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니 왜 글도 잘 써요 크크
터치터치
22/08/30 17:37
수정 아이콘
시인지망생이기도 했고

어떤 시를 한 과학자가 읽어주는 것을 듣고 그 시에 대한 생각을 전한 글을 썼는데 그 전부가 한편의 시였다는 에피소드를 들은 적 있네요
에이치블루
22/08/30 15:30
수정 아이콘
...와 근데 글 진짜 잘 쓰네요. 이건 평소에 훈련을 좀 했는데?
부모님이 무슨 문과 교수님도 계시다고 하셨죠? 역시 결국은 유전자 빨...
SAS Tony Parker
22/08/30 15:33
수정 아이콘
모친이 서울대 러시아어과(노어) 교수..
라흐마니
22/08/30 15:52
수정 아이콘
원래 시인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즈카르야
22/08/30 15:30
수정 아이콘
논리와 수리를 참 멋지게 사용하시면서 말씀하시네요.. 대단하세요...
22/08/30 15:32
수정 아이콘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이 구절 참 좋네요. 전 이미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었습니다만..
22/08/30 15:41
수정 아이콘
뜨끔
작은마음
22/08/30 16:09
수정 아이콘
이 부분이 너무 안 읽혀져서 웹소설에 너무 길들여졌나?하고 뜨끔했습니다. ㅠ
악튜러스
22/08/30 15:34
수정 아이콘
시인이 되려고 고교도 자퇴하셨다고 본 거 같네요.
하프-물범
22/08/30 15:35
수정 아이콘
내용이 좋은데... 이게 왜 연예 게시판에? 크크
SAS Tony Parker
22/08/30 15:36
수정 아이콘
자게엔 이미 제가 글을 2개나 써서 기타로 크크..
Broccoli
22/08/30 19:06
수정 아이콘
잘 몰라서 그런데 자게도 글수 제한이 있나요?
이런 좋은 글은 자게에서 더 많이 나눠졌으면 해서요 흐흐
명문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AS Tony Parker
22/08/30 19:25
수정 아이콘
제한은 없는데 3개씩 한페이지에 올려두긴 눈치가 크크크
22/08/30 15:39
수정 아이콘
코난의 축사도 다른 의미로 레전드인데 요 분의 축사도 정말 한국어의 맛?을 잘 살려서 잘쓰셨네요
역시 사람은 배워야...
22/08/30 15:42
수정 아이콘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담백하면서도 가득하네요.
도들도들
22/08/30 15:50
수정 아이콘
사유의 깊이가 어마어마하네요.
김승남
22/08/30 15:52
수정 아이콘
아오 좋은 말, 멋진 말 같은데 어렵네요. 글로 봐도 어려운데 현장에서 제대로 전달하려면 웅변능력도 상당해야할 듯 합니다
강동원
22/08/30 15:53
수정 아이콘
와...
22/08/30 16:18
수정 아이콘
이분 필드상 타신분이 아니라 노벨 문학상 타신분 아닙니까? 글까지 잘쓰시네.
SAS Tony Parker
22/08/30 16:20
수정 아이콘
문과 + 이과 덜덜
니시무라 호노카
22/08/30 16:18
수정 아이콘
문학적 능력을 갖춘 이과의 끝판왕다운 글이네요
SAS Tony Parker
22/08/30 16:20
수정 아이콘
사기캐..
차라리꽉눌러붙을
22/08/30 16:22
수정 아이콘
나랑 동갑 같은 학번인디......
22/08/30 16:31
수정 아이콘
너무 좋다...
소환사의협곡
22/08/30 16:36
수정 아이콘
오 되게 참신한 거 같아요
22/08/30 17:23
수정 아이콘
너무 현실적이어서 냉혹하지도, 너무 낭만적이어서 대책없이 보이는 빈말 같지도 않은 정말 좋은 글(말)들이네요. 저도 위로받고 동기부여하고 갑니다. 좋은 문장들 전해주셔서 글쓴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김연아
22/08/30 17:59
수정 아이콘
역대급..

아니 이보다 더 좋은 축사를 본 적이 없네요
22/08/30 18:19
수정 아이콘
글 진짜 좋네요.
실제로 들었으면 감동이 어마어마했을 듯...
살려야한다
22/08/30 18:21
수정 아이콘
뭐야 왜 말도 잘해요
대박났네
22/08/30 18:22
수정 아이콘
그러니까 이 정도 써야 필즈상인지 뭐시긴지를 부상으로 준다는거죠?
SAS Tony Parker
22/08/30 18:23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
22/08/30 18:28
수정 아이콘
시간 좀 지나서 자게도 올리면 좋을거같습니다.
스연게는 정게만큼 이용자가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종종 들더라고요
SAS Tony Parker
22/08/30 18:32
수정 아이콘
그러겠습니다
아수날
22/08/30 18:38
수정 아이콘
크크크 선게 정갤급으로 보이는닉만 보이는 스연갤
또 핫한이슈터지면 눈팅은 많이하더군요
22/08/30 18:33
수정 아이콘
축사인 걸 떠나서봐도 글이 참 좋네요
호랑호랑
22/08/30 23:52
수정 아이콘
정말 좋네요..졸업 축사로 너무나 잘 어울리고요
씹빠정
22/08/31 00:42
수정 아이콘
머야…..어우…극과 극은 통하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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