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2/22 23:41:26
Name 할러퀸
Subject 2등 홍진호

어라, 달력을 보니 숫자가 이상합니다. 2022년 2월 22일. 2가 6개 들어가는 경이로운 날이네요. 저 같은 일반인에게는 반복되는 숫자가 많은 날이구나, 하고 넘어갈 날이지만 게이머들, 그중에서도 스타크래프트 유저들에게는 기념할만한 날이라고 합니다. 특히 피지알러들에게는 의미가 깊겠네요. 네, 모두가 입을 모아 ‘콩탄절’이라고 말하는 날입니다. 만년 2등만 한 프로게이머 홍진호. 2등의 화신. ‘콩’을 담당하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 왔습니다.

사실 저는 게임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마, 관심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모든 종류의 게임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소싯적(잼민이라고 불리는 초등학생 시절) 유행했던 바람의 나라, 크레이지 아케이드, 마비노기 등등 나름 대중적인 게임들을 즐긴 시절도 있었더랬죠. 어른이 된 지금도 카드게임이나 보드게임 정도는 좋아하지만 컴퓨터 게임을 자주 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못해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해요. 피지컬도, 전략형도 아닌 저는 게임을 굉장히 못하는 편에 속하거든요. 여우와 신 포도 일화처럼, 내게 닿지 못하는 포도니까 시큼할 거야라고 포기해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승리가 주는 쾌감에 비해 널뛰는(그러나 충족되지 않는) 승부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괴롭거든요. 그래서 게임을 보는 것을 차라리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승부욕을 분출시키되, 저는 그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거죠.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응원만 보내면 되는 것처럼요. 그러다 보니 넓은 범위에서 게임에 해당하는 스포츠를 관람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특히나 이번에는 동계올림픽이라는 이벤트가 있어서 눈이 즐거웠습니다. (쇼트트랙은 언제나 짜릿하고 흥미진진한 것 같아요.)

승부의 관점에서 볼 때, 게임은 참 냉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게임은 즐겜이지~ 즐겨~ 라고 해도, 지면 부들부들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기는 쪽이 있으면 반드시 지는 쪽이 있습니다. 1등이 있으면 꼴등이 있구요. 모든 영광과 보상은 1등에게 집중됩니다. 게임이 현실의 축소판이라고 많이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반대가 아닐까 싶어요. 현실이 게임의 확장판입니다. 뭐, 그게 그건가요.
그래서 저는 2등이 항상 제일 불쌍합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 차마 마음껏 웃지 못했던 것은 그 말이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그 첫 문구처럼 우리 곁을 망령처럼 배회하기 때문이겠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고, 영광을 차지하는 이 냉정한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2등은 참, 애매합니다. 분명 많은 것을 가졌는데, 그 명예가 1등에게 가리워진 나머지 자신의 능력을, 운을 충분히 감사하게 되지 못하게 된다고 할까요. 실제로 올림픽만 해도 동메달을 딴 선수보다 은메달을 딴 선수들이 더 아쉬워하고 분개한다고 하더라고요. 2등은 참, 잔혹한 자리인 것 같습니다.

홍진호 선수는 어찌 보면 그 잔혹한 자리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입니다. 2등.. 2등..만년 2등만 하던 사람의 기분이란, 참 알 길이 없습니다. 짐작만 할 뿐이지요. 속이 쓰리기도 하고 참담하기도 하고 열등감도 느꼈을 것이고, 뭘 해도 나는 1등이 될 수가 없다는 생각에 큰 벽을 느끼고 좌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동정하기에는 큰 사람이지만, 연민할 수밖에 없는 작은 사람인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사실 그를 가지고 놀리는 각종 밈들 (황신이다, 콩까지마 등등)에도 불편함을 느꼈던 사람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겠네요. 네,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적어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이류가 아니었습니다. 2등일지언정 일류였습니다. 승부를 깨끗이 인정하고, 노력하고, 각종 방송에서도 고군분투하고, 지니어스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자신의 멋진 전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을 유머로 소비하는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그걸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그걸 보는 저의 심정은 뭐랄까, 참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뭘 아는 걸까. 등수로, 점수로, 숫자로, 저 사람의 무엇을 알 수 있는 걸까.

2등도 여러 번 하니 2등의 1등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멋진 사람. 홍진호를 응원합니다.

(이 글을 게임게시판에 써야 하나 자유게시판에 써야 하나 고민 끝에 자유게시판에 올립니다. 전 사실 스타를 잘 모릅니다 흑흑)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1-17 01:2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문재인대통령
22/02/22 23:55
수정 아이콘
홍진호 잼났죠~ 홍진호가 있어서 박성준이랑 마재윤 팬이 엄청 많았던 걸지도오~
게임은 2등일 지언정 인생은 일류
폭풍저그 홍진호가 간다~
22/02/23 00:19
수정 아이콘
두번째 댓글
오곡물티슈
22/02/22 23:58
수정 아이콘
2번째 댓글을 차지하기 위한 눈치싸움
할러퀸
22/02/23 00:01
수정 아이콘
그러고 보니 글을 두번 올렸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글을 두번 썼어야 했을까요 크크크
키비쳐
22/02/23 00:44
수정 아이콘
아, 22시 22분 22초였으면 완벽했는데...
22/02/23 00:50
수정 아이콘
아니 홍진호 만년2등 아니였다고~~~요~~
내가본 우승만 몇번인데 아오~~~
그치만..사실 예전부터 한 생각은
2등여러번한거로 쳐서 그걸로
아직까지 가끔 여기저기서 볼수있어서
좋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2/02/23 01:30
수정 아이콘
그의 우승은 전정사상 당해서...
22/02/23 01:22
수정 아이콘
2등도 잘한겁니다.
2등도 잘한겁니다.
라이징패스트볼
22/02/23 02:59
수정 아이콘
가끔 스타리그의 전성기 시절을 즐겼던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22/02/23 06:45
수정 아이콘
저그라서 좋아했던건지 플레이스타일이 좋았던건지 선수가 좋았던건지 하도 까여서 안쓰러웠던건지 기억도 안나지만 내마음속 최고의 저그는 홍진호입니다
구름과자
22/02/23 09:30
수정 아이콘
하지만 그는 지니어스 초대 우승을 하게 되고..
구렌나루
22/02/23 09:42
수정 아이콘
홍진호를 볼 때마다 꼭 1등이 아니더라도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느낌이어서 좋아요
라흐마니
22/02/23 10:55
수정 아이콘
사실은 2등도 정말 잘한거죠
양을쫓는모험
22/02/23 09:58
수정 아이콘
한창 스타보던 그 때에는 엄재경이 뭐라하든 커뮤니티에서 뭐라 부화뇌동하든 홍진호는 진작부터 꽤 많이 우승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준우승 이미지 덕에 인생이 흥한 걸 보면 오히려 엄옹께 고마워집니다. 홍홍.
KanQui#1
23/11/17 18:11
수정 아이콘
오히려 엄재경은 왕중왕전 우승자이자 1번 시드로서 최강자 이미지를 부여하고 싶어했었죠. 참가한 선수가 맘에 안 든다며 불만을 표한 건 보다 더 많은 팬의 머리 숫자였습니다.
그렇게 밀리니까 꺼낸 게 '공식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저그의 한'이라는 스토리였고요.
오징어개임
22/02/23 10:01
수정 아이콘
천하제일2등대회에 홍진호가 나가면 1등을할까 2등을 할까 아직까지 풀지못한 난제입니다
22/02/23 10:23
수정 아이콘
추천해서 19를 20으로 맞췄습니다. 다른분 2명이 추천해서 22로 맞춰주세요..
대박났네
22/02/23 10:37
수정 아이콘
말많고 탈많은 게임판에서 원투펀지 임요환 홍진호 두선수가 큰 논란없이 아직까지 건재해준게 제일 고맙습니다
설탕가루인형
22/02/23 10:45
수정 아이콘
현재 추천 수 22
현재 추천 수 22
세윤이삼촌
22/02/23 11:48
수정 아이콘
어제 경기 홍진호팀 2승하고 3:2로 패배, 상금 22만원
어제 경기 홍진호팀 2승하고 3:2로 패배, 상금 22만원
DownTeamisDown
22/02/23 12:11
수정 아이콘
지금 추천수 23이네요 불편합니다. 한분이 추천 지워주세요
지금 추천수 23이네요 불편합니다. 한분이 추천 지워주세요
VictoryFood
22/02/23 13:05
수정 아이콘
이렇게 된 이상 222 를 노린다
이렇게 된 이상 222 를 노린다
퀵소희는푼수
22/02/23 13:54
수정 아이콘
22번째 댓글은 나의것
22번째 댓글은 나의것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520 몇 년 전 오늘 [18] 제3지대1990 22/06/05 1990
3519 [15] 아이의 어린시절은 부모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24] Restar3591 22/05/31 3591
3518 [15] 작은 항구도시에 살던 나의 어린시절 [7] noname112632 22/05/30 2632
3517 이중언어 아이와의 대화에서 느끼는 한국어의 미묘함 [83] 몽키.D.루피3386 22/05/28 3386
3516 [테크 히스토리] 한때 메시와 호날두가 뛰놀던 K-MP3 시장 / MP3의 역사 [49] Fig.12599 22/05/25 2599
3515 [15] 할머니와 분홍소세지 김밥 [8] Honestly2579 22/05/25 2579
3514 [15] 빈 낚싯바늘에도 의미가 있다면 [16] Vivims3032 22/05/24 3032
3513 [15] 호기심은 목숨을 위험하게 한다. [6] Story2986 22/05/20 2986
3512 [15] 신라호텔 케이크 (부제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9] Night Watch2884 22/05/18 2884
3511 [15] 1주기 [10] 민머리요정2575 22/05/18 2575
3510 나른한 오후에는 드뷔시 음악을 들어봅시다 [19] Ellun2763 22/05/17 2763
3509 [15] 다음 [3] 쎌라비3505 22/05/17 3505
3508 늬들은 애낳지마라.....진심이다... [280] 런펭7223 22/05/16 7223
3507 착한 사람이 될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이 있는가 [27] 아빠는외계인3871 22/05/13 3871
3506 [15] 꽃으로도 때리지 않겠습니다 [18] 나래를펼쳐라!!3060 22/05/12 3060
3505 러브젤 면도 후기 [47] speechless4633 22/05/12 4633
3504 우리에게는 화형식이 필요하다. 그것도 매우 성대한 [33] 12년째도피중5228 22/05/12 5228
3503 [15] 어느 여자아이의 인형놀이 [19] 파프리카너마저4600 22/05/12 4600
3502 나는 어떻게 문도피구를 우승하였나? [77] 임영웅4328 22/05/10 4328
3501 음식.jpg [42] 이러다가는다죽어3673 22/05/10 3673
3500 [테크 히스토리] 전세계 콘센트 하나로 통일 좀 해줘라 / 전기 플러그 역사 [43] Fig.13903 22/05/09 3903
3499 [15] 아빠 차가 최고에요! [18] 두동동4494 22/05/08 4494
3498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365] 여왕의심복5240 22/05/06 524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