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생 아들의 5살 어린이날 일어난 일입니다.
5살이지만 1월 생이라 또래에 비해 말도 또박또박 하는 편 이었고 할아버지의 피(죽어도 제 피는 아님)를 이어 받아서 인지
어려서부터 설명충/훈수충의 자질이 충만한 아이였습니다.
어린이날 선물은 매년 또봇, 카봇류의 장난감 이었는데 엄마, 아빠 출근 중 대체 누구네 집 티비에서 광고를 본 건지 닌텐도 스위치를 받고 싶다고 하더군요.
겜돌이 남편을 둔(본인 PS4/데탑으로 위장한 게임기 소장중) 아내는 게임에 대하여 특별히 거부감은 없지만 너무 이른거 같다며 반대를 했고, 아빠는 게임하는데 나는 왜 안게임? 이론을 펼칠 어린 설명충과의 말싸움에 이길 자신이 없었던 저는 아내에게 설득을 맡겼습니다.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니 너에게 닌텐도는 아직 좀 이르다. 내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라는 엄마의 설명이 끝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바라보며 지금도 기억나는 그 멘트를 또박또박 말하더군요. “한글나라, 수학나라, 영어숙제, 양치, 김치먹기 다 잘 지켰는데 왜 내가 원하는걸 해주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무언가에 홀린 듯 부스스 일어나며 “오빠 옷 입어, 사러가자”…
하필 국전이 쉬는 날이라 신도림까지 가서 엄마의 플렉스한 현찰 박치기로 아들은 닌텐도 스위치를 Get 하였습니다.
살면서 들은 게임기 구입 썰 들은 많았지만 그 중 가장 드라마틱 한 장면이 눈 앞에서 속전 속결로 펼쳐지는 순간이었죠. 신난 아들 옆에서 같이 신난 저에게 아내는 “저건 oo이 게임기지 당신(부탁할때는 오빠, 지시/명령할때는 당신) 게임기가 아니에요, 엄한 게임 살 생각 말아요.” 그렇게 저희 집 닌텐도 스위치는 마리오 카트, 파티, 동숲 등 동글동글한 게임들로만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엄마의 컨트롤에 따라 그날 그날의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끝내야만 1~2시간 정도 게임시간을 허락 받는 것에 익숙해졌고 덩달아 저도 아이 앞에서 지나친 게임이 금지를 당해 가족 모두는 행복해(?)졌습니다. (나이 마흔 앞두고 숨어서 게임 하려니 죽을 맛, RPG 하나 클리어 하는데 5달 걸림)
쓸데 없이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모든 인간에게는 좋은 타이밍과 운이 어느 정도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에게 인생 첫 나이스 타이밍은 유년기에 닌텐도 스위치가 발매 + 젤다의 전설 BOTW(이하 BOTW)의 출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스위치 조작에 익숙해진 아이가 7살 생일에 저와 같이 국전에 가서 고른 BOTW는 이후 아이의 삶이요 빛이요 희망이었습니다.
때 마침 읽기 쓰기까지 정복한 한글 덕분에 게임을 시작한지 두어 달 지나서부터는 혼자서 유투브에 공략까지 찾아서 차근차근 클리어 하더군요 혼자 개척해 나가는 부분들이 재미있는지 잠들기 전 쓰는 그림일기는 7일중 3~4일이 일기라고 쓰고 BOTW 플레이 일지라고 읽히는 것 들 이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신수같이 어려운 부분들을 깨주거나 아이가 이해 못하는 퀘스트들을 거들어 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 아침 아이가 제게 부탁할게 있다고 하더군요. 뭐냐하고 물으니 일단 이걸 좀 보라더니 유투브로 라이넬(BOTW 최강몹) 공략법을 보여 주는 것 이었습니다. 다 보고나니 아들은 저를 보며 ”할 수 있겠어?”….
품의서를 제출하면 의심 80%를 첨가하여 되 묻는 팀장의 “할 수 있겠는가?”의 오마쥬인가 싶었습니다.
젊은 게이머들은 잘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사람이 30 후반이 되면 새로운 게임의 조작법 익숙해지는데 적어도 3일은 걸리고 3일동안 습득해도 다시 3일이 지나면 손이 꼬입니다.
신이 인간을 그리 만들었고 그래서 프로게이머들이 그리도 빠른 나이에 은퇴들을 하는 거겠죠.
아들은 히녹스, 라이넬, 신수보스등 대략 조작이 어려운 부분 클리어를 위하여 저를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지난 주말 드디어 모든 퀘스트 클리어, 모든 DLC 클리어, 모든 방어구 수집 등등등의 위업을 달성하고 둘이 함께 마지막 보스 가논을 잡은 후 둘이 끌어 안은 채 엔딩을 감상했습니다.
엔딩 후 총 플레이 타임을 보니 450시간…… 아들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그 날 그림일기를 세장이나 썼더군요 일기 중간에 발견한 문장 “아빠는 역시 최고다”… 크으 이 맛에 내가 이 맛에 젤다 한다.
COVID-19 때문에 좋아하던 키즈카페도, 공원도, 놀이터도 예전만큼 못 다니던 아이에게 BOTW는 아빠와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을 준 거 같아서 참 고마운 게임입니다.
아이가 먼 훗날 시간이 지나서도 저와 이 게임을 클리어한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좋은 면만 생각하기에는 저의 유X브 계정의 모든 추천 영상이 젤다 관련으로 뜨는 점, 아이의 모들 미술 만들기 과제의 결과물이 젤다 무기류인 점, 아이가 바나나를 싫어하게 된 점(BOTW에서 적들이 바나나를 좋아함), 외출할 때 장난감 활을 어디 서든 몸에 소지하려 하는 점 등등의 부작용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이 더 많은 게임이었습니다.
그렇게 근 1여년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마치 FF7 ADC의 클라우드 대사처럼 저는 젤다에게 ‘추억속에 그대로 있어줘’ 라고 부탁을 하며 좋게 마무리 짖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12/6일짜 아이의 그림일기에 ‘올해는 산타할아버지한테 젤다무쌍을 받아야지’라는 문구는 마치 세피로스 처럼 ‘나는 추억 따위가 되지 않는다’ 며 저를 비웃고 있었습니다. 저 진짜 무쌍류 게임 불호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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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