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7/09/12 04:58
유럽의 귀족은 서로마를 정복한 이민족 장군들이 그 시조로 아는데 중국이 그렇게 안된건 그 들을 공인해줄 '교황'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17/09/12 10:41
그런데 본문에서 나온 당나라 귀족들은 중국역사상 최고의 혼란기라는 위진남북조의 시기에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놈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거라서 조금은 다르긴 합니다.
17/09/12 08:34
전 중국 역사서들보면 허위가 많아보여요. 삼국시대
중국이라고해도 실제론 장안 낙양 주변 위아래쪽 약간 정도지...나머진창작같아요
17/09/12 16:49
실제로 중국 남부 지방은 본래 그들이 오랑캐라 부르던 이민족들이 나라 만들고 다니던 동네기도 하고..(..)
거길 자기네 영토라고 하긴 했어도 정말 제대로 행정력이 미치고 중국의 경제력을 끌어올린건 송나라떄나 가서죠 (오나라랑 촉한떄 처음으로 중원 외 지역들을 개발하기 시작하고 진나라떄 박차를 가해 당나라떄부터 조짐이 보이다 송나라떄 포텐 폭발..)
17/09/12 17:22
근데 최치원이 탈신라를 할때가 하필이면 본문에서 설명하는저런 귀족층이 몰락하던 당말이라...
저런것보다도 당대 당나라 내부사정 자체가 그냥 문제여서 겨우 외국인 출신 빈공과 합격생을 쓸 상황이 안된 탓도 큽니다. 당나라 역사 전반을 보면 저런 관롱귀족 측에서 점차 과거에 합격한 관료층과 절도사로 대표되는 지방군벌로 세력의 축이 넘어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요. 당시 절도사들만 보면 고선지, 부몽영찰, 이정기, 복고회은, 가서한, 안록산 같이 이민족, 외국계 한미한 가문 출신이 절도사가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최치원과 반대로 당나라 초에 건너가서 비록 주필산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사후 당태종이 친히 어의를 덮어주고 그 공을 1등으로 삼아 대장군으로 추증한 설계두 같은 케이스도 있고 최치원보다 한 두세대 전의 장보고만 해도 6두품인 최치원보다도 한참 낮은 평민의 신분으로 하서절도사 휘하 서주 무령군 소장으로 1천에서 5천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직책에까지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당, 신라, 일본을 넘나드는 국제적인 거물로 성장한 보면 이것도 약간은 케바케죠.
17/09/12 09:36
믿고보는 신불해님 글이로군요!!! 일단추천.
근데 주전충이 쓸어버린 거 좀 과장된 거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정부가 돌아가려면 관료집단은 놔뒀을텐데 말입니다. 후당 이후에는 모두 승자에게 복속하고, 다음 왕조도 고스란히 받아들이죠. 그러다 보니 풍도같은 케이스도 있었고...
17/09/12 10:01
주전충이 쓸어버렸다는건 일종의 상징적인 장면이고,
실제로는 물론 한번에 쫙 갈렸다기보다는 계속된 혼란과 신흥세력의 등장으로 점점 기반이 사라져가고 관료제도가 정비해져감에 따라 저물어갈 사람들은 저물어가고 적응하며 살아남는 계층은 남은 가문빨로 영재교육 시켜서 과거 합격해서 새 시대 스타일의 지배적 계층으로 옮겨가고..하는 식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가령 자치통감을 남긴 송나라의 사마광만 해도 그 사마의로부터 내려오는 서진 황족인 하내 사마씨의 후손이기도 하구요.
17/09/12 11:33
그러고 보면 사마씨 가문은 진짜 유서가 깊은 가문이네요.
위로는 초한지 시대의 은왕 사마앙부터 시작이니 사마광까지라고 하면 천년이 넘게 명문이었군요.
17/09/12 11:04
엄밀히 따지면 북위시절 육진으로부터 시작된 북쪽 수당시기 관롱귀족집단과 후한말 생겨나기 시작해 남조에서 번성한 문벌귀족은 구분되야죠. 본문의 글은 그걸 좀 뭉뚱그리는 실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후한말-남조까지 이어지던 문벌귀족은 남조 양나라 말 후경의 난에서부터 이미 어느정도 박살난 상태였고, 수-당 시절은 무진천관롱집단이 정권을 주도한 형태였는데요. 불론 북쪽에 남아서 아무리 순수한족 가문빨 어쩌고 해도 육진의 난 이후 생성된 군사집단인 관롱집단의 실권을 넘진 못했습니다. 당나라 후기 절도사들이 지방을 주도하던 시절엔 말할것도 없고요.
당장 본문에 언급된 원씨, 우문씨, 독고씨만해도 그 실상은 선비족으로부터 내려온게 아니겠습니까, 북위의 황실 원씨의 정체가 실은 이민족에 불과했던 탁발선비의 탁발씨인거야 역사를 공부하면 금방 알 수 있고요. 관롱집단만해도 당태종과 측천무후에게 대판 깨져서 세력이 침체되었다가 8세기 초에 당현종이 즉위해 개원의 치를 선포할 무렵에는 이미 황제에 충실한 관료집단화되어 있었기도 하고요. 본문에서 언급한 칠성십가는 이른바 군성(郡姓)으로 영가의 난이 일어나고도 강북에 남아서 오랑캐의 지배를 받은 귀족이고, 군성이라 부르는 까닭은 자기가 사는 군에서 확실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북위부터 강북 한족귀족의 핵심층입니다만, 북위시절 최호의 국사필화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민족 황족, 귀족에는 언제든지 쓸려나갈수도 있는 쪽이었습니다. 자기들까리 통혼하면서 순수한족이라고 잘난척은 다 했습니다만 결국 과거제의 정착과 함께 귀족층에서 관료층으로 전환한 일부 빼곤 몰락하고 말죠. 반면 무진천 관롱집단은 노성(虜姓)이라고 해서 북위의 건국 공신 문중인 팔씨(八氏), 북위 황실과 뿌리가 같은 십주(十胄)가 2등급, 세력과 존비를 따져서 3등급에 36족, 4등급에 92성이 성립되고 여기서 이주영의 난에서 살아남은 귀족과 무천진 군벌이 연합하여 관롱집단을 이루어 우문태에 의한 서위 건국부터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우문태와 동향 가문인 무천진 출신 가문들이 8주국 12대장군을 독점하면서 관롱귀족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해 서위, 북주, 수, 당의 정치적 중추 세력이였고, 특히 군권을 장악하여 무력과 정치력을 한데 아울렀으니 이쪽이야말로 실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한시절부터 서진시기에 한참 잘나나가다 영가의 난으로 남쪽으로 사마씨 황실따라 도주한 무리를 또 교성(僑姓)이라고 하는데 강남 지역의 귀족으로 오호십육국시대에 남쪽으로 내려간 피란민에서 시작된 집단(교성이란 이름도 원래 살던 군에서 떠난 귀족). 이들은 남조가 박살나면서 실제적인 세력은 약해졌습니다. 후한말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세력이지만 세력 자체는 약했고 원래 강남에서 살던 오성(吳姓)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죠. 수-당 시절의 귀족 양태를 구분짓자면 이렇게 정확하게 구분지어서 말해야지 후한말부터 이어진 귀족 체제가 그대로 이어졌다는 식의 서술은 곤란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위에서 호한체계의 융합을 언급하셨고 수-당의 성립이 이로인해 이루어진것이니만큼 이전 한족귀족이 모든걸 주도하던 후한말~서진 말까지의 흐름과 무조건 동일시 할 순 없다고 봅니다.
17/09/12 11:34
https://zh.wikipedia.org/wiki/%E5%A3%AB%E6%97%8F_(%E4%B8%AD%E5%9B%BD)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6905&cid=42975&categoryId=42975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577 넒게 보면 지역에 따라 분화되긴 하는데 기본적으론 문벌사족으로 묶기는 하는것 같아서 글에서는 뭉뚱그려 설명했습니다. 남쪽으로 피난하지 않은 사족을 일컫어 군성(郡姓), 남쪽으로 피난한 세력을 교성(僑姓)이라고 하는식이더군요. 일단 남쪽으로 내려간 세력은 제껴놓고 북쪽의 세력 중에선 말씀하신대로 실권 자체는 군벌과 결합하여 나타난 관롱집단이 더 컸지만 남쪽으로 피난하지 않고 남아있던 '산동집단' 이 관롱집단과 양대산맥을 이루고, 산동집단은 '황제도 우리보다 끗발이 더 높진 않다' 는 식의 '부심' 이 더 컸고, 반면에 관롱집단은 관롱집단대로 "예전에 쪼끔 더 잘나가면 뭐하냐, 지금은 너네 가문들 전보다 쇠락하고 우리가 한수 위인데" 한다는 식으로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남북조는 본래 주된 관심분야는 아니라서 이해가 좀 피상적이긴 하겠지만요. 아, 댓글 다는 중에 더 달아주셨네요.
17/09/12 11:51
사실상 동진을 세운 낭야 왕씨 같은 일족(왕희지의 일족)이 산동사성이었죠. 결국 후경의 난으로 개박살이 나서 망하다시피 했습니다만.
17/09/12 11:43
사실 글을 작성한 계기가 "본래 뻔히 선비족인 사람들이 엄청난 가문빨 자랑하며 한나라 개국공신들 비웃는 아이러니" 가 참 웃기고 재미있다는 식의 이야기라, 후한말기의 한족 문벌집단이 같은 흐름으로 계속 이어져내려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건 아니었는데 배경을 이야기하며 중간 과정을 설명하면서 피상적으로 건너뛰는 부분이 많아서 잘 와닿지 않게 제가 적은 부분이 있는것 같습니다.
17/09/12 11:55
그거 말씀하시는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700여년간의 흐름이 모두 다 동일한 줄기였다고 해버리면 안될거 같아서 부연 설명은 필요할듯해서요. 무례를 용서하시길.
17/09/12 12:07
크으 너무 재미있네요
근데 저 정도면 황제의 위엄이 사나요? 흔히 천자라고 해서 엄청나게 위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저 정도면 그냥 꼭두각시 수준인데 ㅡㅡ;;
17/09/12 12:20
위에서도 말했지만 한족귀족들인 군성이 아무리 잘났다고해도 선비족 출신 이민족 귀족들한테는 실권이 모자랐습니다. 그냥 '족보빨이 우리가 더 짱'이라는 식으로 말한거죠.
북위시절에 이런 군성인 청하 최씨 중에 최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북위 3대 황제 태무제 시절의 신하인데 북위의 국사 편찬 작업의 총책임을 맡아 북위 왕조가 중화문명을 받아들이기전 이민족으로서 야만적인 풍습 그리고 신조들을 서슴없이 적어논 다음에 이걸 대로에 돌로 된 비석으로 떡하니 새겨서 북위 선비족 황실의 치부를 대놓고 일반 백성들이 길가에서 그냥 볼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해 버린 짓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최호의 일족과 내외손 관계에 있었던 화북 한족 귀족 128명이 함께 숙청되었고 최호의 집안인 청하 최씨뿐만 아니라 범양 노씨, 태원 곽씨, 하동 유씨 등 한인 사족들이 죄다 화를 입었는데 이를 일명 '국사필화사건'이라 하지요. 한마디로 집안 끗발을 자랑했어도 실제로 과도하게 깝치면 실권 잡고 있던 쪽에서 개박살을 낼수 있었다는 겁니다.
17/09/12 12:29
오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실권자라면 그냥 저런 놈들 다 쓸어버릴텐데 그러지 않은게 신기하네요. 물론 아무리 실권을 잡았어도 나라를 돌리려면 인재가 필요하니 그런 기존 귀족들을 무시 할수 없었을거라는건 이해가 갑니다
17/09/12 12:33
뭐 저 전까지 최호가 북위의 신하로서 충실하게 일하긴 했으니까요. 나라의 역사를 과감하게 기록한다는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습니다만, 그렇다고해도 오늘날로 따져도 사생활 침해로 고소당할 일을 전근대 왕조시대에 황실상대로 저질렀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