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주원장이 외지에서 승승장구를 하며 세력을 키워가는 동안, 호주에 남아있던 곽자흥은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었을까.
시간을 다시 한번 과거로 되돌려보자. 가로가 호주를 공격하기 직전, 호주를 공동지배하고 있었던 5원수 중 손덕애를 필두로 한 4원수는 곽자흥을 심하게 견제했었고, 곽자흥은 이들의 정치적 공격에 시달려 성 내의 일상적인 군무(軍務) 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집에서 두문불출하게 됐다. 이후에는 조균용에게 납치까지 당해 죽을 뻔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 이후의 극적인 변화라고 해봐야 주원장이 호주를 떠난 일 정도다. 현상의 유일한 변화가 자기 측근이 사라진 일이니, 결국 곽자흥의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악화일로만 걷고 있던 셈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주원장이 곽자흥의 곁을 떠난 몇 개월 뒤, 곽자흥의 신세는 비참한 수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호주는 외지에서 온 조균용, 팽대의 세력에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부족한 정보와 기록 탓에 자세한 정치적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곽자흥은 물론이거니와 그와 한참 대립하던 손덕애 및 다른 원수들의 존재감은 이때에 접어들어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당시를 다룬 짤막한 기록 중 하나를 살펴보면,
“곽자흥이 팽, 조에게 자신을 낮춰 굴복하다가, 마침내 그들의 지시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時子興屈己下彭、趙,遂為所制) (1)
라는 구절이 있다. 이래서야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도 알 수 없다. 직접적으로 ‘굴복 당했다’ 고 언급된 곽자흥 외에, 초창기만 하더라도 제법 영향력이 있었던 손덕애 역시 앞서 말했듯 이 무렵 아예 언급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그 역시 외부 세력에 밀려 명령을 듣는 위치로 떨어진 듯하다.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서로를 제거하려고 했던 두 명의 원수가 결국 사이좋게 남의 부하 신세가 되었으니, 실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 아닐까.
두 실력자, 팽대와 조균용은 너 나 할 것 없이 스스로 왕을 자칭했다. 서수휘도 왕을 칭하고, 한림아도 왕을 칭하고, 장사성도 왕을 칭하며 누구라도 목소리만 낼 수 있으면 제 기분껏 왕위를 주장하던 시대니 그것 자체는 특별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이제 막 전쟁이 끝나고 피폐해진 호주의 세력을 서수휘, 한림아, 장사성의 그것과 비길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같은 지역에 두 명이나 되는 왕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이때의 참칭(僭稱)은 제대로 된 무장 군벌 집단이 내세우는 강고한 권위라기보단, 일개 산적 때가 ‘나는 앞산의 왕. 너는 뒷산의 왕’ 이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는 모습들에 불과했다.
이 당시의 호주는 한마디로 말해서 디스토피아(dystopia) 그 자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치안은 혼란하고, 먹을 것은 없고, 전쟁의 여파로 모든 것이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으며 이를 수습해야 할 지도부는 숫제 마적 떼나 다를 바 없었다. 약간의 부하가 모이면 대장으로 행세하고, 무슨 무슨 왕이라며 번드르르한 호칭를 단 채, 여기저기로 약탈을 떠나 그날 하루 주린 배를 채우면 그뿐이었다. 미래에 대한 원대한 계획 따윈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주원장이 이런 마경(魔境)에서 일찌감치 몸을 빼낸 건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런 호주 이두정치(二頭政治)의 행사자인 팽, 조 중에서 좀 더 힘이 실리는 쪽은 조균용이었다. 그 무렵 팽대가 갑자기 죽어버렸던 탓이었다. 팽대의 남은 세력은 아들인 팽조주(彭早住)가 이어받긴 했지만, 아무래도 애송이인 팽조주로서는 조균용의 그것에 비하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숫제 마도(魔都)가 된 호주라는 도시의 최고 실력자, 조균용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전에 언급했다시피, 조균용은 지마이가 일으킨 서주 홍건군 봉기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이었다. 지마이와 조균용 등이 주축이 된 서주 홍건군은 단 8명으로 서주를 장악하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한 적 있다. 다만 그런 위업과는 별개로 조균용의 성격은 영웅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것 같다.
조균용의 성격에 대해 명사에서는 ‘狠’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狠에는 흉악, 잔인, 악독, 모짐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앞서 이 무렵 호주의 군벌은 사실상 마적 떼나 다를 바 없었다고 했는데, ‘흉악, 잔인, 악독, 모짐’ 이라고 하니 정말로 마적단의 괴수 같은 느낌이 든다. 이 흉악한 狠으로 가득 찬 조균용을 바로 옆에서 상대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곽자흥이었느 것은 그(곽자흥)에게 있어 정말로 불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균용은 수차례 군사를 동원해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하루는 우이(盱眙)를 공격했고, 다음날은 사주(泗州)를 공격하는 식이었다. 큰 전략적 계획도 없고, 어떤 확고한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이곳 저곳을 찔러보는 하이에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승냥이 같은 전투, 제 혼자서만 한다면야 무슨 불만이 있었겠느냐만은 그는 전투에 나설 때마다 곽자흥을 동행시켰다. 모든 권한을 빼앗긴 곽자흥은 조군이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짐짝처럼 끌려다니며 조균용의 지독한 성격을 다 받아주어야만 했다. 가히 죽을 맛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죽을 맛 정도로 끝나면 다행인 셈이다. 조균용은 아예 실제로 곽자흥을 죽여버리려는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 마수가 곽자흥에게 미치기 직전, 저주의 주원장이 보낸 사람이 호주에 도착했다.
주원장이 보낸 사람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들어나 보자 하고 조균용은 사신을 맞이했다. 사신은 주원장을 대신해 말을 전했다.
“대왕이 예전 궁핍하던 차에 문을 열고 받아들여 주신 것이 곽자흥 원수 아닙니까. 그 덕이 실로 두텁습니다. 만일 대왕이 이를 보은하지 않는다면 소인들은 '결국 손을 써버렸구나' 하고 떠들어 댈 것이니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호주 호걸들의 마음도 대왕을 떠날 것이고, 여기에 더해 호주에는 원수가 거느린 부곡들이 많지 않습니까? 만일 원수를 죽인다면 이런 문제가 있으니, 후회한들 달리 무엇을 얻는단 말입니까?” (大王窮迫時,郭公開門延納,德至厚也。大王不能報,反聽細人言圖之,自剪羽翼,失豪傑心,竊為大王不取。且其部曲猶眾,殺之得無悔乎) (2)
주원장은 조균용이 조만간 손을 쓸 것 같다는 정보를 듣고 이를 만류하려고 했던 것이다. 흉악하고 난폭하기 짝이 없던 조균용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나자 어쩐 일인지 머뭇머뭇하며 알았으니 생각해보마 하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물론 그가 새삼스레 주원장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균용은 주원장을 내심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저주의 병세(兵勢)가 수만에 달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호주에서야 마음대로 왕 놀이를 할 수 있지만, 이따위 도적 집단으로는 진짜배기 실력자 앞에선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그 눈이 멀진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주원장이 보낸 사절은 조균용의 최측근들에게 듬뿍 뇌물을 뿌린 것도 주효했다. 조균용의 성격을 고려하면, 수하들이 대책 없이 외치는 강경책에 충동적으로 마음이 동해 일을 저지를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 자체가 주원장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뇌물을 받은 부하들 역시 곽자흥 처형에 모두 미온적이다 보니 누구 하나 앞장서서 ‘해버립시다’ 하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고, 이 일은 자연히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짐승 같은 조균용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곽자흥은 호주를 떠나 주원장이 기다리고 있는 저주로 향했다. 호주의 부곡 중 무려 1만 명이나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들은 곽자흥을 따른다 하는 의미도 있겠지만, 호주에서 피난한다는 성격도 있었던 것 같다.
추방자와 피난민으로 이루어진 초췌한 일행은 저주에 도착하자 깜짝 놀랐다. 저주에는 무려 정예병 3만이 호랑이처럼 버티고 있었고, 각 병마의 깃발이 당당하게 나부꼈으며, 병사들의 군율 역시 질서 정연했다.
곽자흥을 반갑게 맞이한 주원장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병권을 고스란히 내놓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좋게 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곽자흥이었다. 호주에서는 조균용의 노리갯감 신세까지 되었던 그였지만, 이제 와 다시 3만 군대와 저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하물며 이 모든 게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고 하늘에서 굴러떨어졌다. 좋아하지 않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확실히 이때 곽자흥은 기분이 크게 좋아졌던 것 같다. 저주에 도착한 그는 갑자기 “왕이 되고 싶다.” 는 말을 꺼냈다. 호주에서는 팽대와 조균용 같은 사람들이 좁쌀만 한 군대와 넝마가 된 관사(官舍)만 있어도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다. 그런 꼴을 보며 수난을 당하다 이제 대군의 주인이 되었는데, 나라고 왕이 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원장은 시기 상조라며 이를 만류했다.
"저주는 사방이 산이고, 배와 상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온종일 편안하게 있을 곳은 못 됩니다.(滁四面皆山,舟楫商旅不通,非可旦夕安者也)" (3)
왕을 칭하기에는 아직 기반이 견고하지 못하다. 이 무렵 주원장이 생각하고 있던 이상적인 수도 상은 말할 것도 없이 남경이었다. 왕이 되고자 한다면 저주 같은 곳보다는 남경에서라는 이미지가 그에게는 확고하게 그려져 있었다.
주원장의 의견을 경청한 곽자흥은 크게 미련을 가지지 않고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 왕이 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이후에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실제로 곽자흥이 왕이 된 것은, 그 자신이 죽고도 15년은 지난 후였지만 말이다.
그동안 주원장은 일군의 중심으로서 움직였지만, 이제 군단의 중심은 곽자흥이었다. 주원장은 곽자흥의 많은 부하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부하였을 뿐이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었던 주원장은 다시금 명령을 받드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