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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8/12/18 23:46:09
Name 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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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So1 <2>




 

 배우들은 모두 무대에 오르다


  프로토스의 분투, 저그의 몰락, 테란의 영광. 그로써 8강은 완성되었다.

  투신을 제물로 3전 전승의 가도를 달린 카이저(Kaiser)는, 이미 3년 전 전승 가도를 달리며 결승에 진출한 그를 무너뜨림으로서 전설을 이어간 적수 : 영웅 박정석을 상대로 다시 한 번 전설에 도전하게 되었다.
  신참자의 반격을 분쇄해버리며 조 1위를 확보한 패왕 최연성은, 과거 자신이 걸어야 함이 마땅했던 영광의 길(Royal Road)을 앗아갔던 상대이며 저그의 마지막 보루 : 투신 박성준과 칼을 맞대게 되었다.

  이는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그 위에서 군림한 사제(師弟)에게 있어 하나의 관문과도 같았다. 요컨대 과거, 최고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그 순간을 좌절시켰던 상대들과 다시 맞붙음으로써 2005년 가을의 왕좌를 거머쥘 자격을 시험받는 것이다. 각자 걸어온 시간을 다를지언정 한 시대를 지배했던 패자로서 영웅담을 써내려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실로 고마운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반면 두 사람의 신참자들은 이제 첫 전쟁의 기록을 써내려가야 한다. 한 명의 게이머로써 자신의 영웅담을 써내려가기에 앞서 그들에게는 프로토스라는 종족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라는 사명이 주어졌다.
  그 적수는 ‘퍼펙트 플레이어’ 서지훈과 ‘골든 보이’ 이병민.
  일찍이 황실의 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나 일각의 왕좌를 차지하고 기염을 토해내었던 틀림없는 테란 제일의 제후들이었다.

  So1의 근간이 되는 테란과 프로토스의 항쟁.
  제국의 기사들이라면 누구든지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간편한, 그럼에도 더없이 효율적인 합리의 극치 - 전가의 보도 FD를 상대로 각자의 방식으로써 맞서는 젊은 신예들의 분투. 이제야말로 본격적으로 그것이 시작된다.

  그렇게, 마침내 모든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옴으로써 제 2막은 막을 올린다.






 왕좌의 싸움

「성공한 자는 모든 것을 용서받는다.」
                                                                                                                                                        - Frank McLynn, 「전사들」


  FD - 즉 Fake Double은 일반적으로 6마린 + 1탱크 + 1벌쳐(마인 업그레이드)의 러쉬 혹은 움직임으로 프로토스를 경직시키고 자신은 빠르게 앞마당을 가져가는 전술이다. FD의 탄생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설이 인정받고 있다.

  첫째, V-건담 조정현이 구사했던 이른바 조정현식 대나무 조이기가 변형되었다는 설.
  둘째, 차재욱이 KT-KTF 프리미어 리그에서 구사한 것이 널리 퍼졌다는 설.
  셋째, 임요환에 의해 완성되고 보급되었다는 설.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은 차재욱 시초설이지만 그조차도 차재욱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최연성이 주도한 수비형 테란 풍조의 하나로 이윤열이 가미한 2아머리의 메카닉 업그레이드가 덧붙여짐으로써 그 위력을 더했으며, 임요환이 다름 아닌 So1에서 톡톡히 그 효과를 증명했으므로.
   방어의 종족 테란은 다른 두 종족보다 경직된 움직임을 보인다. 테란의 운영이라는 것은 마치 블록을 조립하는 것과도 같다. 딱딱 맞아 떨어지는 합리성을 갖추었고, 설명서만 있다면 그 누구라도 따라할 수 있다. 이것이 테란의 강인함이다. 놀랄만한 합리성을 갖춘 전략이 그 간편성으로 인해 빠르고 널리 보급되며 그럼으로써 한 명의 걸출한 테란의 등장은  황가(皇家)와 제후들은 물론 일반 유저들에 이르는 테란 제국 전체의 강성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수많은 프로토스들이 이 FD에서 시작된 막강한 테란 기갑부대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회전(會戰)에서 탱크와 벌쳐의 포화를 견뎌낼 게이트웨이 유닛은 없었다.
  오랜 시간을 돌아 전설 앞에 마주 선 두 명의 천왕 - 그 장중한 싸움이 그를 증명했다.

  전설의 전장에서 이상하게도 박정석은 처음부터 임요환을 노리고 있었다. 조지명식에서 종족 배분의 문제로 고를 수 없는 임요환의 이름을 떼었다가 다시 붙여놓았을 정도로.
  가을의 전설, 그 두 번째 주인공이었던 그였기에 3년 전 그 때의 상대와 다시 한 번 승부를 겨루어 초심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시대를 다투었던 위대한 전우와의 마지막 만남을 직감했던 탓일까.
  비록 16강, 박정석 자신의 손으로 그와의 전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으나 전설의 전장은 결국 그들에게 스타리그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허락했다.


  1경기 R-POINT.
  이른바 제국령(領), 이후로 더욱 위명을 떨칠, 임요환 불패의 전장.

  임요환은 마린+탱크+벌쳐의 전형적 FD를 구사한 뒤 예의 그 한 끗의 타이밍을 잡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박정석의 기지 코앞에 조이기 라인을 건설했다.
  벙커와 탱크, 벌쳐로 구성된 조이기 라인 앞에서 박정석의 저항은 간단히 막혀버렸다. 3년 전 황제의 꿈을 불살랐던 사이오닉 스톰은 등장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시종일관 임요환에 의해 주도된 일방적인 승부였다.
  

  2경기 815.

  좁은 입구. 메카닉 병력의 출입을 봉쇄하는 변수는 6머린 1탱크 1벌쳐의 FD까지도 봉쇄시켜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이번만큼은 전가의 보도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원 위주의 방어전이다. 기본적인 뼈대는 그대로였다.

  양쪽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확장전.
  테란은 골리앗과 함께 두 개의 섬멀티를 점거하고 프로토스는 발맞춰 두 개의 지상 미네랄 멀티를 차지한다.
  그러나 프로토스가 확보한 것은 미네랄 멀티에 불과했다. 두 개의 가스 멀티를 확보한 테란과는 비교되지 못한다. 투 아모리가 돌아가고, 드랍쉽이란 날개로 기동력마저 극복한 기갑부대의 포화 앞에 게이트웨이 유닛은 다시 한 번 무력함을 드러낸다.

  하늘을 뒤덮는 드랍쉽.
  골리앗의 미사일이 그리는 푸른 궤적.
  불을 뿜는 시즈 탱크.

  마지막 하이템플러 드랍까지도 무위로 돌리고 테란은 프로토스의 기지를 몇 번이고 대파한다. 공격다운 공격도 없었다. 한껏 웅크려서 몸을 불린 뒤에야 일어서는 테란의 큰 한 방 한 방을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박정석이 자랑하는 신랄한 백병전. 움직임을 예측하는 사이오닉 스톰. 틈을 노리고 내달리며 덤으로 마인까지 끌어오는 질럿. 오직 그만이 구사할 수 있었던 현란한 용기병의 움직임 : 드라군 드라이브.
  그 어떤 것도 구사할 수 없었다.
  영웅의 병사들은 산화했다. 제3 제국의 기갑군을 향해 진격하던 ‘윙드 후사르’처럼.


  테란 제국의 철저한 승리.
  카이저는 전장에 남기 위하여 자신의 후학들이 찾아낸 해법을 답습하고 시대의 흐름을 필사적으로 쫓는 쪽을 택했다. 결국은 승리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 그는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누가 ‘본좌’였건 아니건 그건 중요치 않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웃는 것이다.”
                                                                                                                                      - 2005년 9월 29일, 박정석과의 8강 1차전 후


  이제 그의 프로토스전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강하게 보였다. 영웅이 일찍이 프로토스에 요구했던 것을 오히려 임요환이 받아들여 행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그의 방식의 싸움인가를 묻는 질문에는, 카이저 스스로도 고개를 저었지만.
  어쨌거나 결과는 2:0. 황제는 남고 영웅은 물러난다.
  최저 승률의 우승자. 젊은 ‘희망’으로 왕좌에 등극한 이래로 에버 2004에서, 아이옵스에서, 오랜 시간 홀로 프로토스의 명맥을 지키며 어느덧 구(久) 3대가 된 영웅. 이제 더 이상 그의 방식은 테란 제국을 거스를 수 없었다. 또한 낡은 방식을 바꾸기에 그의 손은 옛 검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두 사람은 스타리그에서의 마지막 만남을 그렇게 끝마쳤다.
  그 때 그들이 그를 알았더라면 숙적을 향하여 서로 더없이 씁쓸하게 웃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쫓은 자와 쫓지 못한 자 - 어느 쪽이든 그들의 낡은 방식은 사형 선고를 받은 셈이었으니.






 팍스 테라나(Pax Terana) : 제국의 진화

“팬들이 박성준과 나를 라이벌로 묶는데, 나는 저그와는 라이벌이 되고 싶지 않다.”
                                                                                                                               -2005년 9월 29일, 최연성. 박성준과의 8강 1차전 후


  순살(瞬殺).
  그 스승인 카이저가 숙적을 상대로 선보인 필살의 발도술(拔刀術). 그는 세 번 빼어들었고, 홍진호는 세 번 베였다. 보통이라면 한 경기를 치를 시간 정도나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저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왔다며 임요환이 마치 있어서는 안 될 금기를 깨워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실제로 수많은 테란 유저들이 이 황실의 보도를 휘둘러 저그를 베었다. 그러나 투신은 침착하고 태연하게 그를 막아냄으로써 경악의 발도술을 일개 곡예로 돌려보냈고, 그로써 광풍은 곧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약 1년. 물량전과 방어전의 대가인 패왕 최연성이 다시 그 칼을 빼어들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이번에야말로 박성준은 의표를 찔렸고,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 누구도 그가 영광의 길을 걸을 것을 의심치 않았던 바로 그 때 노도와 같은 맹공으로 그를 거꾸러트린 투신(鬪神).
  틀림없는 난적이건만 최연성은 그를 적수로조차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영종의 도전을 분쇄시키고 박성준을 상대로 벙커링을 성공시킨 지금에야말로 최연성의 자신감은 최고조에 올라있었다.

  기세를 타고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그는 단 한 번의 굴욕조차도 용납할 수 없었던 남자였다.


  -  8강 2주차, 최연성 VS 박성준 in Neo Forte.


  박성준은 9드론 저글링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최연성은 이에 대해서‘만’은 방어로 일관했다. 저글링은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것이 박성준이 공격의 주도권을 쥔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 변성철에서 홍진호로, 홍진호에서 박성준으로 내려온 초공격형 저그들이 신봉하는 단 하나의 패러독스. 트릭스터 최연성은 투신으로부터 그것을 강탈했다. 그리고 그것을 복수의 칼날로 삼아 몰아쳐 저그의 공격을 봉쇄해버렸다.

  최연성이 묵직한 첫 진출로 저그의 입구 해처리를 날려버린 이래 박성준은 뮤탈리스크로 맞섰다. 본진을 할퀴고 11시 멀티를 물어뜯었다.
  최연성은 그의 살점을 모두 내주었다.
  대신, 모두가 무모하다고 외치는 가운데 저그의 본진으로 파고들었다. 뚫지 못할 것이라는 지배적인 예상과는 달리 공방 1업의 머린들이 저그의 뼈를 바수어 놓았다. 박성준의 성큰 콜로니가 무너졌다. 뮤탈리스크가 산화했다. 앞마당까지 내주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승부는 명백했다. 최연성의 맹공은 말 그대로 살을 내주고 뼈를 쳤다.
  뒤이어 머린, 메딕, 베슬이 맵을 누비며 저그의 숨통을 조였고 결국 박성준은 무력하게 패배를 선언했다.
  창과 방패의 대결이라 여겨졌던 이 대결, 방패가 창을 찌름으로서 끝나버렸다.

  최연성의 자신감은 이 경기 이후 절정에 올랐다.
  그를 발판으로 로열로드를 노렸던 오영종. 8강을 넘어 우승자 징크스를 깨겠다 호언한 박성준. 최연성은 그 둘을 상대로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압도적인 위용을 뽐냈고 ‘패왕에 대적하는 자’들의 말로를 보여주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저그는 나의 숙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가을의 왕좌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프로토스의 영광. 가을의 전설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누가 뭐라고 해도 패왕 최연성, 그야말로 이미 한 번 가을의 전설을 무너뜨린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일진일퇴

  1

   한 자리에는 전설을 넘으려는 자가 있었다. 전설은 그가 무너짐으로써 태어났고, 그는 이후로도 몇 번이고 전설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무너졌다.
  다른 한 자리에는 전설을 정복한 자가 있었다. 그의 스승이 전설을 만들었지만, 그는 전설을 무너뜨렸다. 그가 스승을 꺾음으로써 전설은 그의 손에 정복되었다.

  이제 두 자리가 남았다.
  한 편은 저항과 반역의 종족이라는 프로토스이며 그들에 대적하는 자들은 테란의 황금기를 다진 일급의 제후들이다.
  16강에 진출한 4인의 테란이 4강을 채운다.
  그야말로 팍스 테라나. 테란의, 테란을 위한, 테란에 의한 평화.
  이 경악스러운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가림토가 아니었다. 악마가 아니었다. 몽상가가 아니었다. 영웅도 아니었다.
  신출내기 프로토스 두 사람이 그 열쇠를 쥐고 있었다.


  815에서 박지호가 뽑아든 칼날은 투셔틀 폭탄 리버드랍이었다. 박지호는 멀티조차 두지 않고, 그러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모든 것을 그 한방에 걸었다. 자칫하면 본진 SCV가 모조리 산화하고 팩토리에서는 나오는 유닛마다 총 한 번 못쏴보고 터질 수도 있는 상황. 이병민에게 있어서는 절체절명이었다.

  내 생각이지만 이병민은 So1의 815에서 상당히 천운을 탔던 것 같다. 16강에서 송병구가 들고 ‘선 스타팅 멀티’는 이후 815의 프로토스들을 비상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는 전략이었다. 구룡쟁패 듀얼 토너먼트의 송병구는 무난하게 선 스타팅 멀티를 성공시켰고 뒤이어 이윤열의 심장에 할루시네이션 리콜을 몇 번이고 작렬시키며 프로토스의 위대한 고향 - 아이어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병민이 들고 나온 건 치즈러쉬였다. 빠른 멀티와는 완전한 극상성이며 송병구 입장에서는 ‘이것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을 바로 그것이었다. 이병민은 그를 통해 송병구를 쉽사리 공략했다.

  그리고 8강.
  815의 폭탄 셔틀 드랍 전술은 이후 오영종이 그 위력을 증명한다. 그 어떤 테란이라도 완전 침묵으로 몰아넣는 핵폭탄과도 같은 전술.
  헌데 박지호의 리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잇다른 스캐럽 불발. 리버 드랍은 허무하게 막히고 이병민은 식은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넘어온 승기를 다시 내준다는 것은 테란의 제후들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승부는 그대로 이병민의 것이 되었다.


  이 날은 스타리그의 8강의 첫주차로, 두 천왕의 결투, 최연성의 ‘역적 토벌’, 그리고 박지호와 이병민의 일전까지. 모든 승리가 테란에게 돌아갔다.
  네 번째에 이르러 최후의 저항자가 일어섰다.
  상대는 WCG의 출전권을 거머쥔 ‘퍼펙트 테란’ 서지훈이었다.

  서지훈이 사용한 것은 6머린 1탱크. 그러니까 전형적인 FD는 아니었다. 서지훈은 두 팩토리를 확보하면서 탱크와 벌쳐를 확보했다.
  이미 보이는 것은 몰아칠 맹공의 기세. 오영종은 빠져나갈 길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음을 직감하고 병력을 앞으로 몰았다.
  스파이더 마인이 반응했고, 뒤이어진 폭발에 휘말린 것은 드라군만이 아니었다.

  시즈탱크가 마인과 함께 산화한 뒤 오영종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본진까지 파고들었다. 서지훈은 당황했다. 결국 이제는 오영종의 심볼이 되어버린 유닛 - 다크템플러가 보이지 않는 망토를 휘날리며 들이닥치자 패배를 시인했다.

  두려움이 없었다. 호기로운 장담과는 달리 결국 16강에서 패왕의 철옹성을 넘지 못했음에도. 오영종의 그 패기는 300경기에 걸친 엄청난 연습량으로부터 비롯된 테란 빌드의 철저한 파악에 있었다. 그는 서지훈이 택할 수 있는 가짓수를 모두 계산했다.
  프로토스를 위협하는 전가의 보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6머린 1탱크 FD에 대하여)그 전략은 이제 기울어져가는 전략이라고 본다. 오늘 상대가 6머린 1탱크 전략을 해주길 바랐는데.”
                                                                                                                                         -2005년 9월 29일, 서지훈과의 8강 1차전 후


  그로서는 다시 한 번 배짱을 부린 셈이다.
  조지명식의 조심스러움은 이미 모습을 감추었고, 로열로드의 후보생 오영종은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FD는 없노라.
  지금 눈앞에는 서지훈이 그의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2
  
  2주차.
  많은 사람들이 라이드 오브 발키리즈에서의 박지호 스피릿을 예상했다. 반섬맵 형태인 815는 그렇다 치자. 그러나 R.O.V.는 맵 한 가운데 넓디넓은 스테이지가 마련되어 있다. 질럿들이 달릴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2인용 맵이니까 자원을 확보하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사람들이 박지호에게 기대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게이트웨이, 압도적 물량,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상식 외의 유닛 회전 속도였다.
  그러나 박지호가 대적하는 것은 이병민이다.
  또한, 합리의 극치를 이룬 테란이다.

  더블커맨드에서 시작되는 탱크, 벌쳐의 메카닉 병력은 아머리를 통해 그 힘을 몇 배로 배가시킨다. 공격력을 한 번 업그레이드 할 때마다 다른 종족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엄청난 수치가 급상승하며,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반드시 먼저 한바탕의 포화를 쏟아 부은 뒤에야 전투를 시작한다.
  역설적이게도 박지호가 사랑받는 이유, 그 호쾌함은 그런 페널티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물량으로 테란을 격파하기에 나오는 것이지만 박지호는 로얄로드 - 영광의 길을 위하여 자신을 한단계 진화시켰다.
  박지호가 뽑아든 카드는 지금껏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중재하는 자’. 최전방을 내달리는 전사 박지호의 이미지와는 어쩌면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유닛. 프로토스의 귀족, 집정관 아비터였다.

  이병민은 일찌감치 더블 커맨드를 시행한 뒤 몸을 움츠렸고 그에 대해 박지호는 트리플 넥서스로 맞서면서 아비터를 확보했다.
  뒤늦게 심상찮은 움직임을 알아챈 테란의 기갑군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비터의 가호를 받는 질럿과 드라군은 앞마당에서 이병민의 병력을 격퇴했고, 뒤이어 팩토리 지역에 리콜 쇼를 선보였다. 한 마디로 압승이었다. 고개를 들이박고 움직이지 않는 테란을 상대로, 비록 ‘꼬라박지호’는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통쾌함을 안긴 프로토스의 한 방. ‘박지호 스피릿’이었다.
  또한 이후의 프로토스들에게 이어질 크나큰 가능성을 제시한 한 방이기도 했다.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오영종이 테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즉 오영종식 테란 해법은 간단했다. 또한, 프로토스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테란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
  그게 전부였다.

  서지훈은 원팩 더블커맨드 이후 투 아모리 체제를 선택했다. 결국 테란은 어떻게든 더블 커맨드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업그레이드와 메카닉 물량으로 이어진다.
  박지호의 화려한 리콜 쇼 다음에 이어진 것이라서 그런지 서지훈의 움직임은 더욱 경직되고 답답해보였다. 이미 오영종은 저번 주에 그런 서지훈을 상대로 마인 역대박을 유도해서 무너뜨렸다. 프로토스가 테란을 상대로 들고 오는 해법은 항상 화려하고 스펙터클하다. 그 밑바닥에는 물론 거기까지 이르는 고통이 따르지만.

  오영종은 그에 대항하여 다크템플러 드롭을 감행했다. 2포지를 건설해서 업그레이드 차이를 두지 않으면서 저번 경기의 교훈을 그대로 실천했다.
  활로가 있다면 그것은 뒤에 있지 않다.
  오영종은 시종일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고 서지훈은 막아내기 급급했다. 조금의 빈틈만 보여도 오영종은 파고들어 뒤흔들었다. 심지어 벌쳐 게릴라로 생기는 병력의 틈새조차도 오영종은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약 10분 간 끊임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공격과 방어의 균형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물밑으로, 양측의 병력은 모두 공방 3업을 마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측의 자원줄 역시 빠르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결국 먼저 무릎을 꿇은 것은 오영종이었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던 서지훈의 기갑군은 마침내 최상의 형태로 가다듬어질 수 있었고 프로토스의 병력은 결국 그 가공할만한 방어선을 뚫는데 실패했다. 이 승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난 번 오영종의 ‘배짱 인터뷰’에 대항하기라도 하듯이 서지훈은 ‘무난한 승리였으나 자신의 잔실수로 길어졌을 뿐’이라고 맞불을 놓았다. 그러나 오영종은 기가 죽지도 기본적인 마인드를 바꾸지 않았다. 어떻게든 초중반에 테란에게 칼을 꽂아 넣어야 한다. 그것만이 프로토스가 수비형과 FD, 투아모리에 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다만 그 칼을 극한까지 예리하게 갈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엘 이네스테라도 <예측할 수 없는 자> -  2

「누구도 멈출 수 없게 될 거요, 폭주하는 시대를……!」
                                                                                                                                              - 오다 에이이치로, 「One Piece」


  한 번 놓친 승세는 다시 내주지 않으며 한 번 당한 전략에는 다시 당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김정민, 서지훈, 이병민에 이르는 테란의 제후들이 왕좌를 차지한 비결. 반복된 연습과 오랜 경험으로 다진 안정성과 탄탄함이다.
  테란 제후의 힘은 기존의 것을 가다듬고 가다듬어 완벽한 형태를 구축하는데서 나온다. 유지와 개선, 연마가 그들의 힘이다. 그렇기에 이번에 이병민은 천적과 맞닥뜨렸다.

  그들이 대적하는 자들의 이름은, 신(新) 3대 프로토스, ‘엘 이네스테라도.’
  예측할 수 없는 자.
  테란은 개혁한다. 그러나 프로토스는 혁명한다.

  그 변화의 압도적 속도는, 테란의 제후로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최후의 일전에서 박지호는 우선 패스트 다크템플러를 내보였지만 그 마지막 카드는 다시 한 번 아비터였다.
  이병민은 과연 마지막까지 매서웠다. 불굴의 메카닉은 집정관이 전장에 나서기를 기다리지 않고 맵의 중앙을 파고들었고, 이미 한 번 당한 리콜에 다시 한 번 당하지 않겠다는 듯 생산 시설 일대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병민은 리콜을 확실히 봉쇄했다. 하지만 박지호는 스테이시스 필드라는 두 번째 송곳니를 드러냈다.
  드라군과 질럿, 본래 박지호의 심볼이었던 노도와 같은 순수한 힘의 포화를 상징하는 유닛들. 박지호는 그들 위에 아비터를 선사했다. 아비터는 아군의 모습을 장막 아래 감추고 적들을 멈춰진 시간 속으로 몰아넣으며 프로토스 지상군에게 가호를 내렸다.
  ‘꼬라박’ 스타일은, 아비터와 함께 ‘스피릿’으로 우화(羽化).
  테란은 첫 패주(敗走)와 맞닥뜨렸다.

  제국에 반역하는 검투사. 사리를 벗어났으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맹렬한 검, 그의 이미지는 과거 로마 제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검투사 반란의 주모자 스파르타쿠스와도 닮았다. 그런 그가 연달아 뽑아든 아비터는 어찌 보면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다. 막대한 가스를 먹어치우며 주변 투명화라는 빵빵한 기본 어빌리티부터 리콜, 스테이시스 필드에 이르기까지. 럭셔리 프로토스의 절정, 그 화려함의 절정이다.
  하지만 그 아비터야말로 ‘꼬라박’을 ‘스피릿’으로 격상시키는 데에 있어서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으며 영광의 길을 노리는 그가 ‘예측할 수 없는 자’로서 보여준 혁명적 진화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또한 프로토스의 전략가들이 대대에 걸쳐 제시한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파나소닉배 - 포비든 존. 임성춘, 송병석과 더불어 세 사람의 프로토스로 불린 프로토스의 아버지, 김동수가 ‘카이저’를 상대로 패스트 아비터와 패스트 리콜 시도.
  스프리스배 - 패러럴라인즈, 강민. 3대 토스의 한 사람이며 전략가의 대명사인 꿈의 프로토스. 이병민을 상대로 할루시네이션 아비터 리콜이라는 초유의 장관을 연출.

  그리고 So1.
  박지호, 클로킹 필드와 리콜, 스테이시스 필드라는 아비터의 모든 것을 활용하여, 게이트웨이 유닛들의 지상 회전에서 아비터의 가능성을 제시.

  이제 바야흐로 바턴은 신 3대의 것으로 넘어왔다.


  오영종에게는 선택지가 있었다.
  다크템플러나 리버, 혹은 그 외 게이트 유닛의 무모할 정도의 진격을 통해 초중반의 테란을 뒤흔드는 방법 - 이것이 지금까지 그가 즐겨 썼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맵은 815.
  좁은 입구 초유의 요소가 가미된 사실상의 반섬맵.

  서지훈이 안겨준 패배 이후 극한까지 갈고 닦은 암살자의 예도를 오영종은 잠시 내려놓았다. 박지호가 새로운 최종병기 아비터의 존재를 천명하며 테란 제국을 뒤흔들었다면 오영종은 친절하게도 기존 프로토스 최종병기도 여전히 건재함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줄 모양이었나보다.
  그가 뽑아든 카드는 캐리어였다.

  다크템플러와 캐논을 통한 전격 방어 속에서 오영종은 빠른 속도로 캐리어를 확보했다. 서지훈은 클로킹 레이쓰로 대항해왔지만, 오영종은 침착하게 그 저항조차 분쇄시켰다. 결국 1시 멀티를 내주면서 서지훈은 패배를 인정했다. 오영종이 4강 대열에 합류하면서 플러스 출신의 두 프로토스가 로열로드를 겨루게 되었으니, 당시의 조정웅 감독으로서는 이 시점에서 이미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어쨌든 아비터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캐리어의 아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태형 해설위원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프로토스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제시된 셈이었다.



- So1 <3> 에서 계속
* 라벤더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2-21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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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토만세
08/12/19 00:0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추천합니다
JesteR[GG]
08/12/19 00:01
수정 아이콘
오오오오오....또다시올라왓네요...
로랑보두앵
08/12/19 00:06
수정 아이콘
글잘봤습니다~ 오늘따라 겜게에 글이 많이올라와 왠지 흐뭇하군요 흐흐
08/12/19 00:11
수정 아이콘
크... 저때 참 테플전 가지고 말 많았던 때죠... 믿었던 박정석이 임요환선수에게 패하면서 속칭 프징징이 등장하고, 815맵이야기가 나오고 말이죠... 경기 안팎으로 참 이야기거리가 풍성했던 리그였죠.
RedOrangeYellowGreen
08/12/19 00:13
수정 아이콘
글 잘 봤습니다.
확실히 so1은 정말 재미있었던 리그인듯 합니다.. 명경기도 많았고 이슈거리도 많았고 논란도 많았고.
08/12/19 00:23
수정 아이콘
16강부터 결승전까지 이렇게 완벽했던 대회는 역사상 찾아보기도 힘들것 같네요. 게다가 선수들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더 날이 서있는 경기도 많이 보여줬던것 같고요.

정말 그립네요..... 그때가......
08/12/19 00:24
수정 아이콘
최고입니다....추게로!!
Ihateoov
08/12/19 01:05
수정 아이콘
fax terana -> Pax Terrana 아마도...
08/12/19 02:11
수정 아이콘
박지호 vs 이병민의 라오발 경기의 명장면은 역시 1시지역의 몰래게이트가 아닌가 싶네요 크크
저도 정말 박지호 선수가 지는줄 알았는데...
갑시다가요
08/12/19 02:11
수정 아이콘
기다리고 었는데 드디어 나왔네요 ~ 이 글을 보고 So1 리그를 다시 한번 또 보고오게 되네요..
허느님맙소사
08/12/19 02:21
수정 아이콘
그런데 현재의 아비터 운용을 처음으로 이끌어낸 선수가 박지호 선수인가요?
태연남편
08/12/19 02:38
수정 아이콘
허느님맙소사님// 깜짝 전략이 아니라 현재와같은 최적화에 가까운 운용은 박지호선수가 처음으로 알고있습니당
Hellruin
08/12/19 02:56
수정 아이콘
추게로!~ 박지호 스피릿.. 그당시 대단했었죠 ㅜㅜ 하지만 지금은..
08/12/19 03:22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추천~~
테페리안
08/12/19 03:38
수정 아이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추천~!
레빈슨
08/12/19 05:41
수정 아이콘
리그만큼 재밌는 글입니다~~!
한니발
08/12/19 06:12
수정 아이콘
Ihateoov //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콧의늑대
08/12/19 08:06
수정 아이콘
즐겁게 읽었어요.. 추천~~
08/12/19 12:44
수정 아이콘
아우 소원리그 다시보는방법있나요?
도달자
08/12/19 13:00
수정 아이콘
SO1에서 영웅이 그렇게 무력하게 무너질때.. 그때만큼 프징징이 일어났을때가 있었을까요..
그 당시 영웅의 몰락은 프로토스의 몰락이었으니까요.
ㅇㅓ흥
08/12/19 14:21
수정 아이콘
진짜 재미있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토마토
08/12/19 17:58
수정 아이콘
기다렸습니다 ^^ 잘읽었어요
연성연승
08/12/19 18:25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감상~ 이런글의 특징이죠...

조금 읽다가 바로 추게 달렸습니다... 멋진 글이네요
Hellruin
08/12/22 00:26
수정 아이콘
그당시 테란 4명이 4강이 될수 있었는데.. 다행이었죠
무려 테테전만 최대 20경기 나올수 있었던 아찔한 상황 !
괜히 신의 리그가 아닌듯..
08/12/22 19:10
수정 아이콘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에도 가장 안습인건 저그였는데 저징징이 아니라 프징징이 들고 일어났던게 의아합니다.
박성준의 포스가 남아있고 마재윤이 부상하던 시절이라 그런걸까요?
Hellruin
08/12/23 04:10
수정 아이콘
곰님// 토스가 그당시 저그한테는 완전 나오면 1경기 쌩큐였고, 테란은 최연성과 그의 빌드를 연구한 후학들(?)에게 된통 당하던 시절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맵도 머큐리..;; 등등 토스가 더블넥 먹기 힘든맵들이 좀 많았죠.
리그에 박정석선수만 달랑 올라간 리그도 있었고..
08/12/23 15:16
수정 아이콘
Hellruin님// 좀 잘못알고 계시네요.SO1이 벌어졌던 2005시즌엔 저플전 차이가 많이 좁아져서 저테,테플,저플중에 가장 차이가 적었고 토스승률보다 저그승률이 안 좋았습니다.머큐리는 퇴출된 이후구요.SO1만 해도 저그는 일찌감치 조용히 쓸려나간 리그였죠.
물론 대중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그런식의 플징징이 대세였긴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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