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이었다. 기말고사 마지막 시험도 끝났다. 나는 단과대학 뒷문에서 발을 이리저리 놀리며 시간을 죽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물에서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가끔 뛰듯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도 몇 있었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내 감이 이제 그녀의 아주 작은 기척을 느낄 정도가 된 걸까?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나오고 있었다. 검은 블라우스에 청바지. 시크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도 여전했다. 나를 보더니 눈을 게슴츠레 뜬다. 그녀 입에 살짝 미소가 걸리는 걸 느꼈다.
“기다렸어?”
“많이.”
그녀는 그저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내밀었다. 그녀는 가방을 뒤적이다 말고 내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한 대 펴.”
“내가 너한테 담배 맡겨 놨었나?”
이렇게 놀라는 모습은 오랜만이다. 나는 작은 쾌감을 느꼈다.
“나도 최근 피기 시작했거든. 이건 그동안 얻어 피운 것에 대한 보상.”
그녀는 내가 내민 담배 곽에서 담배를 한 까치 빼며 웃었다.
“짜식, 예의바르긴.”
내 가슴치를 툭 치며 농담했다. 나도 그저 미소지었다.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건물 옆의 구석진 곳으로 간다. 그녀가 말없이 먼저 발을 뗐고 나도 거의 동시에 따라 움직였다. 나는 낯선 곳에 놀러가서도 그녀가 언제, 어디서 담배를 피고 싶어 할 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대학생활 들어서 배운 능력 중 가장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그녀는 아주 훌륭한 능력이라고 칭찬하곤 했지만.
그녀가 담배를 피는 동안 나도 한 까치 물면서 새삼 생각을 돌렸다.
“벌써 한 학기 끝이구나.”
“군대 갈 준비 해야지?”
“쉣~”
그녀는 뭐가 즐거운 지 그저 웃었고 나는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피울 때 볼이 좁아지는 그녀 표정은 여전히 못났지만 나를 설레게 했다. 나에게 자연스럽게 담배를 건네려다가 내 손에 담배가 쥐어진 걸 보고는 멋쩍은 듯 다시 마저 폈다. 새삼 내 말을 툭툭 치곤했다.
“아야~”
“뭐가 그리 아프다고.”
“장난아냐. 너 고소할거야.”
“고소해라 고소해.”
힘을 담아서 다시 나를 툭툭 치려고 한다. 나는 몇 발짝 후다닥 떨어졌다. 서로 시덥지 않게 웃다가 다시 마저 담배를 폈다.
그녀와 함께하며 또 하나 깨달았던 게 있다. 간접키스나 가벼운 스킨십이 꼭 호감의 증거는 아니라는 거다. 나를 남자로 보지 않으려는 그녀의 행동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녀와 나누는 시간이 나를 설레게 했지만 그녀가 명백이 벽을 세워두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내 한학기는 그녀로 가득찼다. 나는 그녀만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와 만나지 않는 시간에는 그녀와 무엇을 할까 무엇을 좋아할까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녀와 만나거나 만나려 연락하기 전까지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며 버티는 나날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조용한 분위기에 은은하고 향긋한 차 냄새가 나는 카페,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 싸게 술과 안주를 즐길 수 있는 술집 등 많은 곳을 알 수가 있었다. 공통점은 어떻게 해서든 담배를 필 수 있는 곳이었다. 수업이 끝날 때쯤에 나는 그녀에게 카톡했고 그녀는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이상 항상 받아주었다.
담배를 비벼 끄고 이번에는 서로 별 말 나누지 않으며 걸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교정이 깊은 황혼의 색으로 물들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 걸어가다 학교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빼면 감동도 미련도 없는 한 학기였구나.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쪽으로 들어가 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작게 칸막이가 테이블마다 걸려있는 가게였다. 생과일 찹쌀떡과 차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시험이야기, 동기 이야기, 그 밖에 실 없는 이야기를 몇 번 나누었다.
무슨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가끔은 내 운명을 미래 알고 싶기도 하고 그래. 실제로는 그렇기 힘들지만 위안이라도 얻고 싶을 때가 있지.”
그러면서 그녀는 특유의 게슴츠레한 표정을 지으며 따뜻한 차를 마셨다. 나는 진한 딸기 찹쌀떡을 입에서 오물거리다가 말했다.
“운명을 알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하자면 그런 거지.”
“너 내가 손금 볼 줄 아는 거 아나?”
“네가?”
“학교 안왔으면 내가 저기 굴다리 옆에서 천막 차리고 장사하고 있었을 걸?”
“헐~ 여자들이 네 얼굴 보면 다 도망갔겠는데. 장사가 되겠냐?”
“그러지 말고. 용하다니까~”
하면서 그녀 옆으로 갔다. 뻔한 수작일까? 하지만 그녀는 입에 미소를 그저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아주 작게나마 진전이 있었다.
“네 운명을 한 번 봐줄게.”
그녀는 1초 쯤? 말이 없다가 승낙했다.
“그래.”
잠시 말이 없던 1초 동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한 걸까? 항상 이상한 여지를 만들어 주는 그녀의 ‘1초’가 묘했다.
“손 한 번 내밀어 볼래?”
이제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손을 내민다. 표정에는 “얘가 뭘 하나 볼까?” 이런 약간은 호기심에 찬 미소가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뒤집어서 손바닥이 보이도록 했다. 그녀는 네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돈 줘.”
“시끄럽고 가만히 있어.”
살짝 손을 잡으며 손바닥이 훤히 보이도록 만들었다. 작고 하얗다. 손가락이 조금은 섬뜩할 정도로 가늘고 길기도 하다.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에 있는 선을 짚었다. 손금을 보면서 생명선이 이러쿵, 금전운이 저러쿵 말하면서 말하면서 잡았던 손을 살짝 내렸다. 거부감이 들지 않는 선에서 자극을 주며... 그러다가 그녀의 손 소매가 내려갔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모르다가 단박에 깨달았다. 흉터들이었다.
“......? 아 이거.”
그녀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빼고는 소매를 더 아래로 내렸다.
“고등학교 때 쫌 그랬었거든.”
오히려 잘 보라는 듯 보여주기까지 한다. 나는 역시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재미없는 말이나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거 막 보여줘도 되는거야?”
“괜찮아.”
"요즘은 괜찮고?"
"비교적."
"...좀 놀랐어. 네가 뭔가 어둠의 자식인 건 알았지만."
애써서 과장해본다. 그녀는 웃었다.
"사실 너무 쉽게 말해서 놀랐어.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괜히 돌려서 잔소리를 덧붙인다. 소매를 정리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학교에 다른 애들에게는 쉽게 말을 못하지. 너니깐 그러려니 하고 보여주는 거지.”
나는 머쓱해져서 잠시 있다가 웃으며 받아줬다. “그러니까 나를 더 잘 모시셔.” 이 정도로 받으며 옆에 있기도 왠지 뻘쭘해져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큰 벽이 있고 다시 어떤 부분에서는 그녀에게서 너무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다가가기도 힘들고 멀어지기는 더욱 힘든 이런 관계가 벌써 한 학기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나는 제대로 당기지를 못하고 그녀는 나를 완전히 밀어버리지도 않는다. 이상한 힘의 균형 때문에 나는 빙빙 돈다. 이대로면 3년이고 10년이고 이럴 것만 같은....... 나는 그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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