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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28 14:17
딱히 구라는 아니라고 봅니다.
일본 전국시대 때는 무사 계급이 농민들을 딱 먹고 살 수는 있을 정도로만 살려두고 쥐어짜기 바빴던게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나마 관동의 후호죠 가문 영지 정도가 농민들이 살만한 동네이기는 했는데, 거기 세율도 조선에 비하면 매우 높은 편이었고요. 국뽕은 모르겠는데, 당시의 일본 지배 계층이 민란 일어날 수준으로 농민들을 쥐어짰던 것은 확실히 맞습니다.
18/09/28 14:17
(수정됨) 조선초 1결당 수확량은 80~400두 정도로 예상
과전법 : 수확량의 1/10세 -> 공법(세종) : 1결당 4~20두 -> 실제 세율은 4~6두(16세기) -> 인조때 1결당 4두로 고정 광해군때 대동법이 1결당 12두로 걷자.. 였죠. (물론 대동법은 토지세가 문제가 아니라 폐단이 있었던 공납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만..)
18/09/28 14:48
의병의 의미가 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뻥이라고 하기는 어려운게 처음 왜병에게 여러가지 이유로 투항했던 순왜들이 시간이 지나서 저항하고 봉기하는 계기가 가혹한 세금 징수 때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18/09/28 17:58
“백성들이 연공을 체납한다면 가토 기요마사 자신이 현지에 가서 처리하라는 도요토미의 명령이 있었지만, 자신이 움직인다면 안변의 백성들이 동원되기 때문에 미혹할 수 있으므로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츠다[津田] 등에게 법도를 확실히 지켜 해당 지역의 지배를 견고히 하라”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일본군에 의해 성진 지역에서 연공 수탈이 이루어졌지만 그들의 지배가 점차 불안정해졌던 것 같다. 또 ‘백성들이 연공을 체납했다’는 것은 지역민들이 일본군에게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타쿠의 기록에도 “함경도 지역민들이 처음에는 일본의 號令에 따라 産貢을 납부하고 조세를 부지런히 냈지만, 후에 조선의 舊領으로 돌아가 정들었던 곳을 거절하고 산과 들로 숨어 창과 방패를 방자하게 하고, 활을 쏘는 데에 전념했다”라 하였다.
그동안 일본군에게 협조적이었던 지역민들이 이제는 태도를 바꾸어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역민들의 태도 변화는 정문부를 중심으로 하는 의병활동과 윤탁연을 중심으로 하는 관군의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군에 대항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역민들의 태도가 변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http://www.academia.edu/1508497/%EC%9E%84%EC%A7%84%EC%A0%84%EC%9F%81_%EC%A0%84%EB%B0%98%EA%B8%B0_%EA%B0%80%ED%86%A0_%EA%B8%B0%EC%9A%94%EB%A7%88%EC%82%AC%EC%9D%98_%EB%8F%99%ED%96%A5_%E6%88%B0%E5%8A%9F%EC%9D%98_%EC%9C%84%EA%B8%B0%EC%99%80_%E8%AC%9B%E5%92%8C%E4%BA%A4%E6%B6%89%EC%9C%BC%EB%A1%9C%EC%9D%98_%EA%B0%80%EB%8A%A5%EC%84%B1_A_Study_on_the_Movements_of_Kato_Kiyomasa_in_the_Early_Days_of_Imjin_War_-_A_crisis_in_military_merits_and_the_possibility_of_peace_negotiations_
18/09/28 17:36
의병이 세율때문에 일어난건 아니지만, 정부가 붕괴된 상황 속에서도 의병이 유지되는데는 크게 한 몫 했을 겁니다.
당시 일본 전국시대 분위기는, 영주가 그냥 생긴게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사내는 전부 참수하고 여자는 죄다 강간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막장이라... (일본 특유의 복장 통일 문화나 나서지 않는 문화가 여기서 유래됐다고 일본 친구가 이야기하더라고요. 눈에 띄였다가 괜히 개죽음 당하니까.) '백성들은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먹으면 된다' 가 실제 마인드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조선은 국경 지대에서의 소규모 분쟁을 제외하면 평화 그 자체였죠. 그런데 매번 국경지대에서 약탈과 살인, 강간을 일삼던 왜놈들이 갑자기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고, 임금을 해하려 들고, 세금은 4배로 뻥튀기해서 뜯어먹는 일본이 좋게 보일래야 보일 수가 없죠.
18/09/29 00:02
근데 딱 그때가 조선역사상 가장 세율이 낮았을때라..
오공오민이면 엄청 성군취급받던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할일이죠 크크크 육공사민은 일상이었습니다.
18/09/28 14:40
의병의 결성 동기라고 보기는 힘들고, 의병이 확대된 동기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는 있다고 봅니다.
일본군이 현지 통치에 성공적이었다면 당시 의병 활동이 그렇게까지 활발하지는 않았겠죠.
18/09/28 14:50
전국시대 일본의 세율은 꽤나 높았고 (5할만 되어도 저세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 덕분에 농민 반란이 자주 일어났죠.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에도 대충 세율이 6할에 달했습니다. 다만, 이 6할이라는 것은 고정세율로서 그 매기는 기준은 산출될 것으로 기대되는 곡식의 일정 비율인가 그래서, 농민이 추가적인 산물이나 쌀이 아닌 산물 등을 얻을 경우에는 과세대상에 잡히지 않아 실질세율은 그보다는 조금 낮기는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로 넘어간 후에는 대충 4할 정도의 세율을 기록했던 것으로 알고 있고... 18세기 초에 이르면 고정된 양으로만 세금을 매겨 그런 농민의 인센티브(?)를 장려하려는 개혁 시도를 하기도 했던 것으로 압니다. 아울러 조선의 세율이 1할이라는 것은 전세만 따져서 그렇고, 환곡 등을 감안한 실질적인 세율은 거의 3할까지 올라가기는 할 겁니다. 아무리 올라가본들 일본보다 세율이 낮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세율이 높고 낮음과 실질적인 농민의 소득 수준이 높고 낮음은 차이가 있긴 하겠죠.
18/09/28 15:03
조선 조정은 가난을 미덕으로 봤다고 봐야 할 정도라서요...
그러고보면 매 끼니마다 고기를 부르짖으신 세종대왕님은 참으로 헤픈 분이셨군요?
18/09/28 15:16
이런거 보면 성리학 사상으로 국가를 만들고 운영하고 교육하고 체화시킨걸 수백년을 이어가다니 정말 조선이란 국가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근데 그런거 치고 창업군주는 워로드인데..... 이게 다 정도전 때문인가
18/09/29 05:47
공납, 군역... 그리고 말기의 환곡이라고 쓰고 초고율 이자놀이, 그리고 세금못내는 백성들이 도망가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총액제로 때려버려서 백골징포,황구첨정이 유행하고 애절양이라는 시까지 지어딘 걸 보면 조선이 헤븐이었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네요.
18/09/29 09:44
대동법 실시 전에는 공납 부담이 미친듯이 심했습니다. 현물 납부하려는데 서리들이 꼬투리 잡아서 못받겠다고 하고 지네들이 마련한 물품을 100배 가격을 사서 바치라고 해서 엄청난 부담이었죠. 1/10만 내면 되는 전세는 그냥 애들 장난이구요.
18/09/29 10:27
그런걸 모두 감안해도 최소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보단 조선이 나았다는겁니다. 일본과 조선의 농민반란 숫자를 보세요. 조선도 후기에 가면 가혹해지지만 임진왜란 시기엔 일본보단 나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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