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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5/30 14:50:07
Name 수금지화목토천해
Subject [일반] 열역학 제2법칙과 소통에 대하여
"소통이 어렵다니 갑자기 웬 사회 부적응자 같은 소리야?"
나는 나란히 함께 걷던 J에게 되물었다. J가 말했다.
"그러니까, 열역학 제2법칙은 소통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말이야."
"열역학 제2... 뭐? 친구야. 사회 부적응은 이겨낼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J에게서 돌아온 말이 한층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어서 그를 놀리자 J가 소리 없이 웃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 중에 '테넷' 안 봤어? 그 영화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열역학 제2법칙이야."
"아아, 그 감독 알지. 과학적인 테마가 있는 영화를 잘 찍는 감독이잖아. 그래서 열역학 제2법칙이 뭔데?"
"열역학 제2법칙이란, 쉽게 말해서 에너지는 낭비되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뜻이야."
"...... 정말 완벽하게 이해했어."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걸었다. 오늘 밤공기는 제법 차다. 시기적으로는 3월 중순을 지나 곧 낮과 밤의 시간이 같아지는 춘분이 다가오는 봄이지만 밤의 산책을 위해서는 여전히 두꺼운 외투가 필요한 날씨다. 겹겹이 입은 옷으로 체온을 보호했지만 내 몸에서는 여전히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게 열역학 제2법칙인가.
J는 오늘 밤 날씨가 추운 탓에 열역학 뭐시기 같은 말을 한 걸까?

J가 말했다.
"그리고 그 법칙은 소통의 과정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말이야. 생각할수록 소통을 잘하는 게 참 어려운 일 같지 않아?"
맞아. 녀석이 처음 말하려고 했던 건 사실 소통 이야기였다. 나는 대답했다.
"너랑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소통이잖아. 하긴, 아까 네가 사회 부적응자 같은 말을 했을 땐 좀 어렵게 느껴지긴 하더라."
J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나를 바라봤다. 사회 부적응자로 놀리는 건 그만해야겠다.
J가 다시 말했다.
"너랑 내가 나누는 대화도 물론 소통이지만, 소통의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아. 쉬운 과정은 더더욱 아니고."
"예를 들어 내가 너와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속 진의 중 너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골라 문장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미 내가 가진 진의 중 일부가 탈락하거나 변형되겠지."
J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들으며 생각해 보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ㅡ배려나 용기 부족, 또는 내 진의를 나조차도 모름으로 인해ㅡ 내가 원래 전하고 싶었던 진심을 모두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분명 있다. 아니, 어쩌면 대부분이 그럴지도 모른다.

"표현을 세심하게 고르고 골라 진의의 대부분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했더라도 그것을 네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또다시 그 진의는 변형되거나 탈락할 가능성이 있겠지. '그것 참 잘하는 짓이다'라고 반어적으로 말했는데 '나 정말 잘했지? 고마워'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상상해 봐."
"그래서 우리 인간은 '비언어적 표현'이라는 것도 함께 사용하잖아? 제스처나 어조, 표정 같은 것 말이야."
저 편 전봇대 앞에 놓인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봉투를 건드리는 고양이가 보였다. 아마 동물들이 사용하는 의사소통은 비언어적 표현이 대부분을 차지하겠지. 자신이 꺼낸 이야기에 내가 흥미를 보인다는 것이 즐거운지 J가 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맞아. 하지만 생각해 봐. '통화 포비아'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시대야. 어떤 사람들은 문자로만 대화하는 걸 더 선호하기도 해. 카톡으로 어떤 비언어적 표현이 가능하겠어?"
"글쎄, 그런 거 있잖아? 키읔의 개수로 파악하는 심리 같은 거. 키읔의 개수에 따라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고."
J의 소리 없는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그가 말했다.
"그래, 그건 예외로 하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소통이 어렵다는 거야. 그리고 나는 거기에 더해 냉담해지지 말자는 생각도 해."
"냉담해지지 말자고? 냉동 삼겹살은 맛없으니까 만들지 말자 뭐 그런 건가?"
"재미없으니까 적당히 해...... 냉담해지지 말자는 건, 소통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야."
오늘따라 J가 진지한 이야기만을 하는 탓에 공연히 농담을 해봐도 그는 우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이것이 오늘 J가 선택한 소통의 방식인 걸까.

"내가 한 말이, 힘들게 꺼내 보인 진심이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 같을 때면 때로는 섭섭함에 상대에게 실망감과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심지어 상대방과 다시는 소통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거야. 하지만 그래서는 안돼. 냉담해져서는 안돼. 따뜻함을 잃어서는 안돼."
"너 웅변대회 나가냐?"
힘껏 딴죽을 걸어보았지만 J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J가 하고 싶었던 말은 거기까지였던 듯, 우리는 잠시간 말없이 밤거리를 걸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누며 J가 나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오늘 나는 J에게 시답잖은 농담만을 건넸다. 문득 오늘 미처 전하지 못한 진의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오늘이 아닌 아주 예전부터 전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꺼내지 못했던 진의가.

내가 말했다.
"맞아...... 하지만 그러는 너는 왜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니?"
나란히 걷던 J가 멈췄다. 나는 몇 발 더 걸어가 그를 뒤에 둔 채로 멈춰 섰다.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졌다. 겁이 났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가 예전부터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널 많이 좋아하는 거, 알잖아. 하지만 알면서도 그렇게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건 이제 싫어. 소통이 어렵다고?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지금도 네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널 뒤에 두고 말하고 있어. 하지만 진심을 너에게 전하고 있어. 이게 내 진심이야. 너는 그렇지 않니?"

온몸에 열이 오르는 듯한 기분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열역학 제2법칙이 뭐랬더라? 에너지가 낭비되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고? 체온 유지에 필요한 열을 넘어 온몸에서 열이 오르는 지금 내 신체 상태는 열역학 제2법칙의 증명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J가 영영 떠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진심을 다해 소통하는 일은 원래 이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불안에 떨며 생각하던 중 J가 소리 없이 다가와 말없이 부드럽게, 하지만 힘 있게 나를 안아주었다.
그의 포옹에는 말이 없었지만 어떤 말보다도 진실한 그의 진심이 담겨있는 듯 따뜻하고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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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바꾸다
23/05/30 14:51
수정 아이콘
어라?
유목민
23/05/30 14:58
수정 아이콘
첫소절 읽고
막줄에 열효율 좋은 보일러 이야기겠거니 하면서 점프했는데.
아니네요..
23/05/30 15:08
수정 아이콘
이거 건담이네요
23/05/30 15:16
수정 아이콘
효율 좋은데요...
23/05/30 15:1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서술트릭을 사용한 추리소설처럼 나와 J의 성별을 일부러 숨긴건가 싶네요. 오묘한 느낌이 납니다.
jjohny=쿠마
23/05/30 15:21
수정 아이콘
또는, 서술상 성별이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연애감정은 이성 간에도, 동성 간에도 가능하기도 하고요)
No.99 AaronJudge
23/05/30 15:17
수정 아이콘
나는 왜 둘 다 남자라고 생각했을까......공대생 둘끼리 겨울밤에 길거리 거닐면서 나눈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엇네용...

엔트로피 낭비 오졋다...
jjohny=쿠마
23/05/30 15:33
수정 아이콘
아닐 수도 있지만, 아닌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백으로 남겨두어도 좋은 부분 같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3/05/30 15:45
수정 아이콘
마치 석양...
-안군-
23/05/30 15:22
수정 아이콘
이게 정통무협이지
괴물군
23/05/30 15:30
수정 아이콘
엇 먼가 심오하게 읽어 내려가다가 으음?? 빌드업 좋습니다.
티오 플라토
23/05/30 15:49
수정 아이콘
어... 원래 이런 류는 마지막이
["하지만 따뜻하기만 한 대화는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어서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니니?"
"으..응 맞아"
"마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나처럼?"
그 말을 마치고 여친은 스르륵 하고 사라졌다. 공대생은 고개를 푹 떨구고 한참을 흐느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 눈에는 계속 혼잣말을 하다가 고개를 떨구고 우는 공대생만이 보일 뿐이었다.]

여야 하는게 국룰 아닙니까!!!
애플프리터
23/05/31 01:08
수정 아이콘
"열역학 제2법칙이란, 쉽게 말해서 에너지는 낭비되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뜻이야."
"...... 정말 완벽하게 이해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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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역학 제1법칙이 뭔지 아세요? 에너지 등가교환 즉, 에너지 낭비는 없다가 핵심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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