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한 대로 지난 번 포스팅 "고등고시 행정과(1950~1962) 역대 합격자 일람" 의 후속인 사법과 편을 올려 봅니다.
지금의 로스쿨-변호사시험 체계가 잡히기 전에는 많은 분들께서 기억하고 계시듯, 사법시험이 변호사 선발시험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런데 사법시험은 1963년에야 지금의 이름으로 시작된 제도로, 그전까지는 고등고시 사법과라는 이름의 사법 분야 관료(판/검사) 후보자를 선발하는 시험이었습니다. 고등고시 사법과가 있던 시기에는 별도의 변호사 선발 시험이 일단 없었기 때문에, 사법 분야에서는 공직에 진출하는 것이 기본이되, 민간에서 활동하는 변호사는 공직을 떠난 사람들이 나중에 하는 직역으로 취급 받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예외는 있었습니다. ) 그리고 사법과라는 말을 따로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법 분야가 아닌 타 분야 고급 관료 후보자는 고등고시 행정과를 통해 선발하였습니다.
고등고시가 실시되기 전, 그러니까 일제에서 갓 해방되고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까지는 모든 분야가 다 그랬지만 법조 직역 역시 혼란을 겪었습니다. 법조 직역의 혼란을 상징하는 사건이 중도에 중단된 일제 치하의 마지막 조선변호사시험의 합격자 처리입니다.
일제 당시의 법조 인력 양성제도를 훑어보면, 일본 본토의 법조인력 양성은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로 일원화하면서도 식민지 조선에서는 식민지에서만 통용되는 자격을 부여하는 별도의 조선변호사시험 제도를 추가로 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최후의 조선변호사시험 필기고사가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해방으로 시험이 중단됐고 일제 관리들과 일본인들이 쫓겨나는 판국에 시험이 속개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해당 시험 응시생들은 총독부의 책임으로 시험이 중단된 것이니 응시자 전원에게 변호사 자격을 달라 항의했습니다. 일제 당국은 합격증을 뿌렸고, 시험 응시생들은 응시만으로 일제 당국의 변호사 시험 합격증을 얻어 냈습니다. 그리고 일제 당국이 쫓겨난 뒤 들어온 미 군정에서 이들 중 일부는 즉시 미군정 사법부의 판사, 검사로 임용되었으며, 또 일부는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가 실시한 새 변호사시험의 필기시험을 면제받아 대한민국 정부의 이름으로 또 한번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및 변호사 자격을 교부 받는 데 성공했습니다. 해방 정국 법조계의 혼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더 놀라운 사실은 시험 응시만으로 변호사 자격을 얻어낸 이들이 해방된 한국의 법조 분야에서는 응시할 생각을 먹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엘리트에 속하는 그룹이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 시절에는 조선변호사시험이 본토의 고등시험 사법과에 비하면 명백한 이류시험이었지만, 그래도 법률 시험인만큼 난이도가 상당했고 일제 역시 딱히 조선의 변호사 배출을 늘려야겠다는 목적도 없었기 때문에 매해 배출되는 합격자수도 2-30명 남짓 소수에 그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해방 후 변호사 자격을 보유한 사람들이라봐야 일제 36년 간 배출된 고등시험, 일제 조선변호사시험 출신을 모두 합쳐도 수 백 명 남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조선변호사시험을 응시할 생각을 먹었다는 것만으로 나름 능력의 자신이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조차 일본인들이 증발한 사법행정의 공백을 메우기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미군정이 택한 것은 법원서기 등 일단 법률문서를 접수라도 할 줄 아는 하급 공무원이면 바로 판사, 검사로 등용하여 당장의 공백을 해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법원 9급공무원분들이 하루아침에 판사와 검사가 된 격입니다. 물론 고등교육 받을 기회가 드물었고 취직 자리가 많지 않았던 당시였으므로 전문학교(서울대 법대의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법원 서기 등의 하급 직역에 많이 있었고. 설사 중학교만 나온 사람이라도 관청에서 일할 능력을 보유하고는 있었다는 점에서 당대에서는 인텔리에 속하는 그룹이었을 겁니다. 이 분들 역시 이후에 한국 법조계의 원로가 되는 그룹이었습니다. 이밖에도 미군정은 각종 특별임용시험을 치렀고 이를 통해 이 45-47년 연간에 일제 36년은 물론이고, 이후 고등고시, 사법시험 시절과 비교해서도 그 수가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무수한 법조인이 양산되었습니다. 미군정은 훗날의 사법연수원을 떠올리게 하는 사법요원양성소 요원 선발시험이라는 교육 기반 법조인 양성 실험도 시험해봣지만 잘 작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당장 급한 행정 공백이 메워지고 한반도 남부에 새 정부가 들어설 것이 가시화되면서 새로 선발하게 될 법조인의 질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미군정 말기인 1947년이었습니다. 조선변호사시험이 이때부터 다시 개시되었고, 미군정의 사무를 인계받은 대한민국 정부 역시 시험을 실시하여 1949년까지 총 3회의 시험이 치러졌습니다. 조선변호사시험은 나름의 양과 질을 어느 정도 컨트롤하는 데 성공한 시험이었습니다. 시험마다 30-80명의 법조인이 양성되었고, 일단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다음, 관청(법원, 검찰)에 간이시험을 통해 임용되는 방식으로 사법분야 관료가 충원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변호사를 선발한 다음, 이들 중 판사와 검사를 선발하는 변호사시험 방식 대신, 정부를 주도하는 주요 간부들에게 익숙한 일본의 고등시험 제도를 되살리기로 결정헀습니다. 1949년 조선변호사시험은 3회를 끝으로 폐지되고, 일제의 고등시험을 계수한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로 통합되면서 모든 법조지망생은 법원과 검찰에서 시보생활을 거치고 임용이 된다음(갑자기 선발인원이 폭증한한두해 정도는 예외적으로 시보를 마치더라도 즉시 임용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판검사가 되어 자기의 추후 살 길을 생각하는 게 전제가 되었습니다. 이걸 바꾸려 시도한 게 사법시험이었으나 도입되고도 20년이 지나 300명 이상 뽑게된 80년대에 들어서야 가능한 이야기였습니다.
고등고시 사법과는 이후에도 일제 고등시험 시절부터 내려온 위상에 힘입어, 그리고 이전과 달리 제대로 된 고등 교육 받은 사람들의 정규 법조 등용문(사실 여전히 독학도 많았지만요)이라는 점에서도 비록 14년 남짓 짧게 시행되었지만 사법시험을 사법"고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게 만드는 등의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 고등고시 사법과를 통해, 아직까지도 우리가 쉽게 이름을 떠올리는 이회창, 김기춘 등의 유력 정치인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밖에도 사시 출신이 전면에 부각되는 90년대 전까지 한국 법원과 검찰, 재야 법조계의 주류를 고시 출신들이 차지했습니다.
[통계로 보는 합격자 면면]
- 출신 대학
위 표는 고시 사법과 출신의 출신 대학 통계입니다. 고시 사법과는 일제의 고등시험과 마찬가지로 대학 교육을 받은 자를 응시 대상으로 전제하였으며, 중졸, 고졸은 독학자라 하여 예비시험을 패스해야 했습니다. 한국법조인대관의 일부 누락자(시보를 아예 받지 않은 경우)까지 관보를 통해 복원한 고등고시 사법과 총 합격자는 664명입니다. 중퇴자도 출신 대학에 포함했습니다.
표를 보시면 알겠지만, 압도적인 서울대의 강세가 드러납니다 . 서울대의 강세라고는 해도 정확히는 법과대학의 초강세입니다. 384명 중 357명이 법과대학입니다.
그리고 지방대의 강세가 무척 눈에 띕니다. 그리고 시험마다 대학별 편차가 큰데, 고려대의 경우, 꾸준히 합격자를 배출하여 전체적으로는 2위지만, 시험에 따라서는 건국대가 2위를 차지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법학 교육을 조기에 시작한 서울 소재 사립대학도 두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육사와 여기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갑종장교 복무 중인 장교도 다수 합격했는데, 특히 이들이 군위탁교육을 통해(전두환, 노태우가 임관한 육사 11기 이전까지는 학사 학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학한 사립대학의 법 강의를 듣고 다수 합격한 것도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법원과 검찰 고위직
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는 5명의 대법원장, 2명의 헌법재판소장, 41명의 대법관, 15명의 헌법재판관, 80명의 법원장(이상 중복 포함)이 배출되었습니다. 검찰에서는 10명의 검찰총장, 26명의 고검장급 검사, 32명의 지검장급 검사(이상 중복 제외. 법원장과 달리 최종 직급을 기준으로 계산)가 배출되었습니다. 꼭 검찰 출신의 보직이라 할 수는 없으나, 13명의 법무장관도 고시 출신입니다.
- 유력 정치인들
고시 사법과는 이후의 사법시험과 마찬가지로 정치인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50명의 국회의원이 배출되었으며(행정과 36명), 이들 중에는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을 비롯해, 고령에도 현역으로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2016~2017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불명예스럽게 퇴진, 옥고를 치른 김기춘 前 대통령비서실장, 그리고 제3후보론의 원조인 박찬종 前 국회의원 등 21세기에도 정계 중진으로 활동한 이들도 있습니다. 국회의원을 비롯해, 국무총리 3명(이회창, 이한동, 김석수), 국회의장 1명(박희태) 등도 고시 사법과 출신입니다.
[차수별 합격자 일람]
* 고시 1회(1950년)
고시 1회에서는 1명의 대법관이 배출되었는데, 법원 출신이 아닌 검찰 출신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밖에도 한국 행정법학계를 정립한 김도창이 고시 1회 출신입니다. 김도창은 학자로서도, 그리고 법제 관료로서도 학계와 실무 양쪽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호남 법조계에서 일가를 이룬 고씨 집안 출신 고재량도 고시 1회 합격자입니다. 큰 형 고재호는 경성제대 법과-고등시험 사법과 출신으로 해방 후 최연소 대법관을, 그리고 동생 고재청(서울대 경제학과 졸)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대법관 고재호는 사위 등으로 이어지는 법조 가족을 이루는 중핵에 위치해 있는데, 이후의 일람에서도 고재호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박종훈은 만주 건국대 전기과정을 다니다 해방 후 경성대학 예과에 편입,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지검장급인 대검 검찰사무부장에서 퇴임하였습니다. 서정각은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 특수부장 등 검찰의 주요 요직을 밟았으나 끝내 검찰총장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안김선은 해방 후 치러진 조선변호사시험 2회 합격자입니다. 고등고시 사법과에도 합격했으나, 1950년 6월 이후 행적이 발견되지 않고 변호사도 등록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납북자 명단에도 이름이 없는데 피살된 것인 아닌가 추측됩니다.
* 고시 2회(1951년)
고시 2회는 전시 수도 부산에서 치러졌습니다. 고시는 절대 평가 채점이 원칙이었으나, 당시의 부산 지역 언론을 보면, 고시 2회는 고시 1회가 소수만 선발한 점, 전쟁 중 사법요원이 많이 필요한 점 등을 들어 채점이 관대하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고, 실제로 고시 2회는 고시 1회의 배 이상 선발하여 예상에 부응하였습니다.
정일형 前 외무장관의 처인 이태영 변호사가 고시 2회 합격자이자, 여성 최초 합격자입니다. 이화여전-서울대 법대 출신인 이태영 변호사는 고시에 합격했으나, 법관에 임용되지 못했고 변호사를 개업했습니다. 재야 법조계의 원로로서 남편과 함께 이후에도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였습니다.
정일형-이태영 부부
고시 2회에서는 허형구가 서울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에 올랐으며 법무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요새는 드물지만, 한동안 검찰총장-법무장관으로 영전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김기춘 前 대통령비서실장이 대표적입니다. 대법관과 감사원장을 역임한 서윤홍은 아들인 서동우 역시 사시 26회, 그것도 수석으로 합격한 법조가족입니다. 서동우 변호사는 수석임에도 법관 임용을 선택하지 않고 바로 변호사를 개업했는데, 이에 분개하여 서 대법관이 집에서 아들을 쫓아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행정과 편에서 소개한 고건 前 국무총리의 형 고석윤은 사법과 3회에도 합격했습니다. 상공부에 입부하여 상역국장(통상본부장격)까지 지내다 의원면직, 변호사를 개업했습니다. 이돈명 변호사는 군사정권 시기 저명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는데, 민주화 이후 모교인 조선대가 재단 분규로 혼란을 겪자 모교의 총장으로 선임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여성 합격자이자 최초의 여성 법관인 황윤석은 법관으로 임용되었으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고부갈등이 있어 남편의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고 하급심에서는 남편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최종 무죄였습니다. 남동생인 황석연도 고시 9회로 법원에 입직.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고시 3회에서는 김태현이 대법원 판사(오늘날의 대법관)를, 유태선이 광주고검장을 역임했습니다.
양과 합격자인 고재혁은 일단 상공부에 입부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자 수방사 군법회의 검찰관으로 전직, 이후 군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변호사를 개업하여 변협 부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고시 4회 수석인 정천표는 변호사의 길을 걷는 대신 예일대에서 SJD 학위를 취득하여 국제기구 아시아개발은행ADB에 입행하였고 당시로서는 한국인 최고위직인 법률국장까지 역임하였습니다.
김세배는 해방 직후 잠시 있었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부설 교원양성소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이력을 갖고 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서울지검 검사로 입직한 그는 5.16 군사정변 이후 새롭게 설립된 중앙정보부에 합류하게 되고 그 이력을 바탕으로 친정인 검찰에 돌아와서는 사국장을 맡았으며, 이후 공안통이라는 타이틀로 국회에 등원하였습니다.
이성렬은 제5공화국 시기 대법원 판사로 재임하였는데 임기 중임에도 조기 사임하여 12대 총선의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등원하였습니다. 민주화 이후 12대 국회의원 임기가 종료되자 이번에는 새 헌법에서 신설된 헌법재판소의 첫 헌법재판관으로 합류하는 등, 대법원 판사(대법관), 국회의원, 헌법재판관을 모두 역임하는 특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밖에도 대법관을 역임한 동생 서윤홍의 뒤를 이어 형인 서윤학도 독학으로 고시에 합격, 동생과 달리 검찰에 입직하였습니다.
고시 6회에서는 양과에 합격하여 내무부에 입부한 정상천과 최두열이 치안총수인 내무부 치안국장을 역임하였습니다. 특히 정상천은 치안국장 이후에도 내무차관, 관선 서울시장,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DJP 연합으로 국민의 정부에서도 해수부 장관으로 역임하는 등 화려한 정관계 편력을 자랑했습니다.
미국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오원용은 사법과 출신임에도 특이하게 검찰뿐 아니라 외무부에서도 경력을 쌓았습니다. 통역장교 복무 중 고시에 합격하였지만 외무부에 먼저 입부한 그는 다시 인천지청 검사로 전직, 미국 남감리교대에서 LLM 학위를 취특하였습니다. 그러다 귀국 후에는 다시 외무부에서 조약과장을 역임하였다가, 이번에는 법관으로 전직하여 민사지법에서 판사로 임용되었습니다. 이병호 역시 같은 남감리교에서 LLM을 취득하였습니다. 짧은 판사 생활을 마치고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서울변회장을 맡는 등 변호사로서 왕성히 활동하였으나 느닷없이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행보를 걷기도 했습니다.
이 기수는 2명의 대법원 판사를 배출하였습니다. 이 중 이정우는 대법원 퇴임 후 법무부 장관에 기용되기도 했습니다.
고시 7회에서는 30명 중 5명이 대법관을 역임하였으며, 이 중 김덕주는 대법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아울러, 대법관은 아니지만 김진우가 헌법재판관을 역임하였습니다. 유승민 前 국회의원의 부친이자 국회의원을 역임한 유수호와 채이배 前 국회의원의 부친인 채명묵 변호사도 이 기수입니다.
최고령 합격자인 전용성은 양과 합격자로 해방 전 아자부수의축산전문학교를 졸업 후 의사 고시에 합격하여 수의사뿐 아니라 의사 자격도 취득하여 개업의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 서울대 정치학과에 편입, 졸업한 후, 병원 운영과 고시 생활을 거듭한 끝에 46세의 나이로 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의사 출신 법관 1호라는 기록을 쓴 그는 이후 의학 박사 학위도 취득하였고, 변호사 개업 후에도 무소속으로 총선에도 출마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다, 고시 합격 당시의 나이의 배를 더 산 96세를 일기로 2007년에 별세하였습니다.
108명이라는 이례적으로 많은 합격자를 낸 고시 8회는 그만큼 인물도 많이 나왔습니다. 대법원장 1명, 대법관 11명, 헌법재판관 1명, 검찰총장 3명, 고검장급 6명 등, 법원과 검찰의 최고위직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세 차례 대선에 출마하였고 사반세기를 정계의 중진으로 활동한 이회창 前 국무총리가 고시 8회입니다.
이밖에도 부처님의 날 휴일 제정에 앞장선 육사 출신 용태영 변호사,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감사원장을 역임한 한승헌 변호사도 이 기수입니다. 한편, 수원지청 검사로 재직 중인 김은수는 1965년 내연관계였던 병으로 죽음이 임박한 다방 마담과 동반자살로 목숨을 끊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시 9회에서는 김용준이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했습니다. 소아마비임에도 최연소로 고시를 합격해 화제가 됐던 그는 대법관을 거쳐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했습니다. 이후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 인수위원장에 이어 국무총리로 지명되었으나 투기 등의 의혹으로 총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후보자 상태에서 사임했습니다. 이밖에도 DJ의 측근으로 헌법재판관에 합류한 정치인 출신 조승형, 대법관 배만운 등도 이 기수입니다.
관계에서는 양과 합격 후 내무부에 입부한 채원식이 치안총수인 치안국장을, 재무부에 입부한 임영득이 세관국장을 거쳐 농수산부 차관보,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한편, 외무부 주사 재직 중 고시에 합격한 조광제는 외무부에 잔류하였는데, 잠깐의 검사 생활을 거쳐 외무부에서 조약과장, 구주국장, 주스페인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고시 10회는 한 기수에 총리 2명과 대법원장 1명을 배출하는 진기록을 남겼습니다. 5공 시절 검사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한동은 내무장관을 거쳐 DJP 연합을 통해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습니다. 김석수는 비정치인으로서 대법관 역임 후 국무총리로 발탁됐습니다. 대법원장을 역임한 윤관과 함께 50명 중 단 2명의 연세대 법학과 출신이 모두 최고위직을 역임하는 진기록을 남겼습니다.
박정희 前 대통령의 처조카사위인 장덕진은 고시 10회인데 행정과 12회와 13회에도 합격하여 고시를 세 번 합격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재무부에 입부하여 이재국장(금융정책국장)을 거쳐 국회의원, 농수산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또, 김의재는 최초의 미국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김흥한(변시 3회. 김증한 前 서울대 교수의 동생)의 동서로 그와 함께 한국 최초의 로펌 김장리를 설립했습니다.
헌법재판관을 역임한 한병채는 4선 의원 출신으로 정계 인생의 마무리를 초대 헌법재판소 멤버로 마무리했습니다. 역시 헌법재판관을 역임한 이시윤은 민사소송법학자로서도 명망이 높았는데, 한동안 그의 신민사소송법이 수험서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김상형(육종 3기)과 황동준(육사 8기)은 현역 육군 장교 복무 중 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넥슨 김정주 前 회장의 부친인 김교창도 고시 10회입니다.
고시 11회는 고시 8회(108명), 고시 9/10회(각 50명)에 비해 적은 24명만이 합격했습니다. 적은 수이지만 헌법재판소장 1명과 대법관 3명, 헌법재판관 1명, 국회의원 3명이 배출되었으며, 대법관 중에서는 안우만이 퇴임 후 법무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이들도 있었는데, 조준희 변호사는 민변 초대 대표를, 강신옥은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김재규를 변호하기도 했으며 2선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고시 12회는 대법관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으나, 2명의 검찰총장(김기춘, 이종남)이 배출되었습니다. 특히 김기춘 前 대통령 비서실장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 공안통으로서의 경력을 쌓았으며 검찰 최고 요직 중 하나인 법무부 검찰국장을 거쳐 검찰총장, 그리고 법무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이후 정계에서도 3선 의원,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 등 화려한 이력을 남겼으나, 2016~17년 탄핵 정국이 이어지고 박근혜 정부가 붕괴되자 형사 입건되는 등, 불운한 말년을 겪었습니다. 아울러, 국회의원 출신 고영구가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한편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해사에 입교, 해군 장교로 재직 중이었던 이양우는 복무 중 고시에 합격, 해군 법무감을 역임하였으며 해군 준장 예편 후 국회의원에 등원하기도 했습니다.
고시 13회는 고시 8회와 함께 110명이라는 이례적으로 많은 수의 합격자가 배출되었습니다. 법조계에서는 대법원장 1명, 대법관 5명, 헌법재판관 1명, 검찰총장 1명, 고검장급 5명이 배출되었으며, 법무장관은 전원 검찰 출신으로 4명이 배출되었습니다.
특히 박희태는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 정계에서 6선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역임하였으나, 국회의장 재임 중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파동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임하였고, 정계 은퇴 후에도 성추행으로 처벌 받는 등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한편, 박희태와 비슷한 이력을 걸었지만 민주당계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검찰 출신 정치인 박상천도 고시 13회입니다. 군산지청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 동향인 DJ계에 투신한 그는 평민당 대변인을 발탁, DJ의 입으로 활약했으며, 국민의 정부 출범 후에는 법무장관을 역임하였습니다.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 시에는 민주당에 잔류하였고, 총 5선을 역임한 끝에 정계를 은퇴하였습니다. 박진영의 당숙이기도 합니다.
이밖에도 화재로 본인과 일가족이 목숨을 잃은 윤병정 판사도 고시 13회입니다.
고시 14회에서는 1명의 대법관, 2명의 헌법재판관과 1명의 검찰총장, 1명의 고검장급 검사를 배출했습니다. 검찰총장을 역임한 김두희는 검찰 3대 요직인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지검장, 법무차관을 모두 역임하고 검찰총장이라는 정점에 오르는 기록에 남겼습니다.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변호사를 개업한 김인섭은 법무법인 태평양의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이밖에도 한진 창업주 조중훈의 사위인 이태희가 짧은 판사 생활 후 변호사로 전직, 한진의 법률 담당 상무를 역임하였으며 유명 대형 법무법인 광장의 전신인 한미를 설립하였습니다. 한편, 김영균은 육사 11기(전두환, 노태우의 동기)로 서울대 법대 위탁 교육 과정에서 고시에 합격하였으며 육군 법무관을 끝으로 준장 예편, 5공 정권이 들어서자 국보위 법사위원장, 법제처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고시 15회에서는 대법원장 1명, 대법관 2명, 헌법재판관 1명, 검찰총장 1명, 고검장급 검사 2명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밖에도 부산 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문민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김광일 前 국회의원도 고시 15회입니다. 고시 14회의 이태희와 함께 유명 법무법인 광장을 설립한 고광하도 고시 15회입니다. 한편, 서울고법 판사로 재직 중 부인의 피살 사건이 벌어지자 실의에 빠져 자신도 목숨을 끊은 주환석 판사도 이 기수입니다.
마지막 고시인 16회는 35명이라는 적은 수만 선발헀습니다. 적은 기수이지만 2명의 대법관, 1명의 검찰총장이 배출되었으며, 3명의 국회의원이 등원하기도 했습니다. 행정과 14회에 합격한 고하 송진우의 양손자 송상현은 사법과 16회에도 합격했으나 법학자의 길을 걸었으며 이후 국제형사재판소장을 역임했습니다.
고시 16회를 끝으로 고시 시대는 막을 내리고 같은 해인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이 시작되면서 이후 50여 년이 넘게 이어지는,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사시 시대가 개막하였습니다. 관을 중시했던 법조계의 고전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