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2/10/12 20:58:52
Name 자급률
Subject [일반] 근세 유럽의 한 곰 괴담 (수정됨)
(이 글은 성적 불쾌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편하실 것 같으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17세기 초 유럽,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접경지대에 있던 사보이 공국의 나브 지방 마을에 피에르 퀼레라는 부유한 농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겐 앙투아네트라는 16세의 장녀가 있었는데, 농장일을 하는 가족을 돕기 위해 봄에는 종종 양들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으로 몰고 가 방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1602년 4월경, 저녁이 됐는데도 앙투아네트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찾기 위해 온갖 방법이 동원됐지만 전부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녀가 늑대의 먹이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이도 있었습니다만, 기이하게도 양치기보다 더욱 직접적인 공격대상이 되었을 양은 한 마리도 사라지지 않고 모두 돌아온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기이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어떤 실마리도 발견되지 않은 채 3년이 지난 1605년 초의 어느 날, 나무꾼 셋이 큰 나무를 베려고 평소 가던 곳보다 더 멀리까지 가게 됩니다. 나무를 베기 위해 도끼질을 하던 이들의 귀에 누군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가 들려오던 곳은 큰 바위가 입구를 막고 있는 동굴이었고 그 안의 목소리는 자신이 앙투아네트라고 밝히며 밖으로 꺼내달라고 애원합니다. 나무꾼들 중 한 명이 도움을 청하러 마을로 다시 내려갔고, 곧 여러 명이 함께 올라와 바위를 치웠습니다.

바위를 치우고 들어간 동굴 안에서 발견된것은 야만적인 몰골을 한 소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부친의 집으로 데려가 씻기고 머리카락을 자른 뒤 옷을 입히고 대체 어떤 곡절이 있었던 것인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녀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앙투아네트가 실종됐던 날, 해질녘에 큰 곰 한 마리가 양떼 한복판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곰은 양들을 노리고 온 것이 아니었고, 대신 이 어린 양치기를 납치해 동굴로 데려가 겁탈했습니다. 곰은 그녀를 밤새 돌보고 감싸안고 핥는 등 애정을 표현했으나 그것은 기괴한 성적 결합을 동반한 것이었고, 불운한 소녀는 거의 매일 그것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곰은 매일 그녀를 찾아왔으며, 낮 동안엔 큰 바위로 입구를 막고 이웃마을로 가 소녀가 필요로 할 법한 빵, 치즈, 과일, 심지어 옷가지 등을 훔쳐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앙투아네트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곰인 괴물같은 아이를 낳았으나, 태어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곰이 아이를 너무 세게 끌어안은 바람에 질식해 죽었습니다.]


나브 사람들은 처음에 소녀의 이런 설명에 대해 납득하지 않고 대부분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는 그냥 그녀가 가출했던 것 뿐인데 일이 잘 안 풀려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했고, 교구 사제를 포함한 일부는 그녀가 뭔가에 홀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 퇴마사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산에서 내려온 곰이 앙투아네트를 돌려받길 원한다는 듯이 그녀의 집 주변을 찾아와 울부짖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고 곰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 밤도 찾아왔습니다. 견디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3일째에 준비하고 있다가 곰을 총으로 쏴 잡았지만, 그 과정에서 곰의 격렬한 저항으로 사람도 두 명이 죽었습니다. 이후 앙투아네트는 사보이에 인접한 프랑스 도피네 지방의 수녀원으로 보내집니다.
(총을 갖고 매복중이던 다수가 곰 한 마릴 상대한 것 치곤 피해가 커 보이지만, 수석식 총이 아직 점진적으로 개선중이던 이 시기에 군부대도 아닌 시골 마을에서 동원한 총이므로 아마 구형 화승식 총이었을 것입니다. 밤이라는 시간대도 주간시야에 강점이 있는 인간보다 후각에 강점이 있는 곰에게 유리했을 것이고요.)  



-----------------------------------------------------------------------------


일반적인 납치 사건의 경우,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기반이 될 것은 납치된 당사자의 증언이겠지만, 이 일화의 경우 앙투아네트의 증언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다른 곰과 구별되는 이 곰의 기이한 행동이나 인간에 대한 이상성욕(...)까지는 '그래 뭐, 그런 돌연변이적인 성향을 갖고 태어난 곰이 있을지 모른다'고 쳐도, 곰과 사람 사이에 자식이 생긴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현대 유전학적 지식에 비춰볼 때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굳이 앙투아네트의 증언을 인정하고 최대한 수용하는 방향으로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해 본다면, 저는 이 곰은 아마 숫곰이 아니라 암곰, 그것도 새끼를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미곰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새끼를 잃은 모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새끼의 시신이나 다른 개체의 새끼, 혹은 다른 무언가를 새끼로 여기고 애착을 형성하는 사례가 아주 간혹 발견되는 것으로 아는데(곰의 경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새끼를 잃은 어미곰이 그 사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소녀를 데려와 자신의 새끼로 여기고 대한거죠. 곰은 자신이 새끼로 여기는 앙투아네트에 대해 어미곰이 새끼곰에게 하듯이 끌어안고 핥는 등의 일반적 스킨십을 했고, 체계적인 성교육이 없던 시대에 관련 경험이 없었던 앙투아네트는 그것을 자신이 겁탈당한다고 착각해버립니다. 그녀가 말한 반사람 반곰인 아이도 아마 본인이 낳은 게 아니라 곰이 밖에서 다른 숫곰을 만나 새로 낳은 새끼인데, 납치당해 혼미한 정신상태와 두려움 속에서 그걸 겁탈당한 본인이 낳았다고 여겨버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끼곰을 굳이 반사람 반곰이었다고 표현한 것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풍성한 털가죽이 없는 새끼곰의 모습을 보고 오해한 것이고...

만약 앙투아네트의 증언을 딱히 받아들이지 않고 최초에 나브 주민들 중 일부가 그랬듯이 '그냥 가출 실패 후에 돌아와서 뻥치고 있는것 아니냐?'고 여긴다면, 많은 기괴한 부분들에 대해 굳이 현실적인 설명을 고안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기는 합니다. 곰은 뭐 그냥 인간에 산으로 밀려나 풀뿌리 나무뿌리 캐먹고 근근이 살던 곰이 분을 이기지 못해 분풀이+먹이찾기를 위해 마을로 내려온 건데 그게 하필 앙투아네트의 귀환일과 겹쳐버린 셈 치고...대체 앙투아네트는 성인 남성 여럿이 옮겨야 할 만큼 큰 바위에 막힌 동굴에 어떻게 들어가 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습니다만...



참고문헌
미셸 파스투로, 곰 몰락한 왕의 역사(주나미 역), 오롯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아프로디지아
22/10/12 21:02
수정 아이콘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22/10/12 21:17
수정 아이콘
라쇼몽 같은 이야기군요. 이야기는 있지만 전혀 사건의 본질에는 갈 수 없는 설화. 그래도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 이야기들을 만든 것이겠고요. 흥미진진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자급률
22/10/12 21:28
수정 아이콘
저도 처음에 보면서 흥미로웠습니다. 이 일화는 지역 주교가 사제에게 지시해 기록으로 남아 출판되었었는데 근현대에 들어와 다시 발견되었다네요.
고래비늘
22/10/12 21:18
수정 아이콘
곰나루 전설이 생각나네요. 어렸을 적 읽은 서양 동화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고, 얼불노에서 나오는 노래 중 곰과 처녀인가?도 뉘앙스가 거시기하던데.
두 발로 설 수 있는 동물이라서 그런가, 뭔가 인간과 결합했다는 이야기가 세계 각지에 많나 봐요. 단군 할배, 보고 계십니까?
자급률
22/10/12 21:26
수정 아이콘
고대나 중세 초 유럽에서 곰과 사람이 결합해 만들어진 후손 내러티브는 꽤 흔했다더라고요. 그런데 저때 나브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에 얘길 듣고 그냥 미친사람 취급했다는 것을 보면 시대가 변한다는 것이 있긴 한가봅니다.
임전즉퇴
22/10/12 21:40
수정 아이콘
이것이 그저 우연일까?!
고기반찬
22/10/12 22:58
수정 아이콘
곰나루 전설하고는 남녀만 바뀌었지 구조가 너무 비슷한데요
피우피우
22/10/12 22:41
수정 아이콘
왠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한 번쯤 나올 법한 기묘한 이야기네요.
저도 본문에 적어주신 전말이 가장 그럴듯해 보입니다. 처음 읽을 때 곰과 사람의 체격차가 있는데 3년 동안 매일같이 겁탈을 당하면서 사람 몸이 어떻게 멀쩡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본문의 해석대로면 설명이 되고요.
앙투아네트는 저 상황에서 미쳐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멘탈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남한인
22/10/13 07:57
수정 아이콘
곰이 동굴을 막았음이나 사람의 음식과 옷을 훔쳐다 주었음으로 보아 자기 새끼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인식은 있었을 터이므로, 암곰/암콤 가설은 안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남한인
22/10/13 07:54
수정 아이콘
대부분의 포유류는 태어날 때부터 털가죽으로 덮혀있습니다. 털가죽이 없는 포유 동물은 예외적입니다. 인간, 고래, 코끼리, 하마 정도가 생각납니다.

심지어는 그렇기때문에 "epithelium (상피)"라는 단어도 만들어진 겁니다, 수유기에 젖꼭지 주변만은 털이 빠져 버리므로.
집으로돌아가야해
22/10/13 08:19
수정 아이콘
역시 환국과 로마는 같은 뿌리를
무냐고
22/10/13 10:40
수정 아이콘
리버스 웅녀?!
22/10/13 09:41
수정 아이콘
곰 마눌 설화도 있는데 곰 남편 버전이네요.
옥동이
22/10/13 10:11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닉언급금지
22/10/13 10:52
수정 아이콘
갑자기 '마지막 네안데르탈'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곰이라고 불렀던 것은 마지막 남은 네안데르탈이었던 것이고...
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네요.
어디선가 비슷한 이야기를 본 것 같은데...
지탄다 에루
22/10/13 12:54
수정 아이콘
오 재미있네요
기간토피테쿠스라든지 거대한 유인원이었을수도..!
及時雨
22/10/13 14:00
수정 아이콘
바야바!
제랄드
22/10/13 17:26
수정 아이콘
이야기를 압축하느라 디테일을 너무 따지고 들면 안 되겠지만, 입구를 막고 있던 바위에서 의문이 생기네요. 설마 곰이 둥지의 안전을 위해 출입할 때마다 여닫은 건 아닐 테고, 원래 없었는데 구출되기 전 어느 머지않은 시점에서 위쪽 어디선가 굴러떨어진 바위가 하필 입구를 막은 건지 -_-

이야기 자체는 재밌네요~ 마치 성서나 설화를 놓고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를 탐구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6861 [정치] 전세대출변동 금리, 전체의 93.5% 차지 [38] Leeka17525 22/10/13 17525 0
96860 [정치] 윤석열 정부, 전술핵 재배치를 미국과 논의할 계획 [139] 계층방정23708 22/10/13 23708 0
96859 [일반] <중경삼림> - 왕가위와 외로운 마음 클럽. [35] aDayInTheLife12588 22/10/12 12588 12
96857 [일반] 오버클럭 RTX 4090 배틀그라운드 4K 330 프레임 기록 [39] SAS Tony Parker 15231 22/10/12 15231 0
96856 [일반] 근세 유럽의 한 곰 괴담 [18] 자급률11298 22/10/12 11298 12
96855 [일반] "유령의 말이 옳다면 그녀는 왜 울었을까" [39] Farce15861 22/10/12 15861 13
96854 [일반] 통신3사: 20대 30대 남성들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있어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다 [275] 별가느게31360 22/10/12 31360 10
96853 [정치] 구한말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는가 [203] 삭제됨20333 22/10/12 20333 0
96852 [일반] 40대 유부남의 3개월 육아휴직 후기 (약 스압) [28] 천연딸기쨈11242 22/10/12 11242 31
96851 [정치] 정진석, '식민사관' 논란에 "제발 역사공부 좀 하시라" [139] 밥도둑21847 22/10/12 21847 0
96850 [일반] 한은이 빅스텝을 밟았습니다 [197] 길갈25199 22/10/12 25199 6
96849 [정치] 한국 UN 인권이사회 이사선거국 낙선, 아시아 5위 [109] 빼사스19899 22/10/12 19899 0
96848 [일반] 케이팝 아이돌의 위상은 앞으로 틱톡커와 유튜버들이 이어나갈것 같습니다 [70] 보리야밥먹자18155 22/10/12 18155 1
96847 [일반] 모솔경력 38년차, 현43남 결혼했습니다. [94] 43년신혼시작18537 22/10/11 18537 101
96846 [일반] 아이폰 14 프로맥스 몇일간 사용 후기 [43] Leeka16812 22/10/11 16812 5
96845 [일반] 마이너스통장 금리 1년간의 추이 [12] style13511 22/10/11 13511 2
96844 [정치] 탄핵에 대한 이야기 [57] 고물장수16208 22/10/11 16208 0
96843 [정치] 최재해 “대통령도 국민…감사 요구할 수 있어” +정진석 망언 [135] Crochen19341 22/10/11 19341 0
96842 [일반] 내맘대로 개사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58] 하야로비11823 22/10/11 11823 25
96841 [일반] 전세 대란이 왔습니다. [288] kien.35950 22/10/11 35950 7
96840 [일반] [미드]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10] 해맑은 전사11501 22/10/11 11501 1
96839 [일반] [창작] 문제의 핵심 1편 [3] Farce11740 22/10/10 11740 6
96838 [정치] ‘영장 없이’ 디지털 포렌식…감사원, 내부 규정마저 대폭 완화? [40] 베라히18540 22/10/10 18540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