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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9/08 01:29:19
Name aDayInTheLife
Link #1 https://blog.naver.com/supremee13/222869763954
Subject [일반] 책 후기 - <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작가의 신작 <페스트의 밤>은 가상의 섬 '민게르'를 배경으로 하는 전염병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아무래도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는 점과 사실과 픽션 사이를 오가는 소설의 구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점에서 소설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많이 떠올리게 합니다. 전염병, 살인 사건, 전염병이 퍼짐에 따라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대응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저는 저 두 소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중간부터 끼어드는 역사적 상상력과 민족주의의 흐름은 포착하기 쉽지 않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역사와 사상의 충돌이란 측면에서 이미 명작의 위치에 도달한 작품과 비교하는 게 적절한가는 생각해 볼 만한 문제지만, 확실히, 조금 아쉬운 정도로 서술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은 지금 현재 터키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픈 오르한 파묵 작가의 생각이 관여된 부분은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쓴 시기는 2016년부터 2021년까지, 그러니까 팬데믹의 흐름을 타고 썼다기 보단, 어쩌다보니 팬데믹의 흐름을 타게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배경인 1901년, 20세기의 초입에서 최선을 다하는 방역 담당자들의 모습,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기심을, 혹은 이타심을 발하는 사람들, 방역 정책에 대해서 저항하는 사람들, 수긍하는 사람들, 그리고 포기한 사람들까지, 다양한 군상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소설이 묘하게 동정적이라는 생각이 조금 듭니다. <내 이름은 빨강> 만큼 충격적이었던 전반부는 아니었습니다만,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전반부도 인상적이었구요. 다만,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 약간은 얼렁뚱땅 같습니다만.


모든 전염병과 그 비슷한 이야기들은 많은 측면에서 '이성과 합리, 그리고 기술의 승리'로 치환되어 이야기되곤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삶은 이어지는 것이니까요.(그런 점에서인지, 이 책은 에필로그가 꽤 깁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묘하게도 길게 늘어진 후일담과 쇠락한 오스만 제국의 후손들을 통해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류의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지는 독자에게 달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조금, 아주 조금은 아쉽고 중반 이후 길을 살짝 잃은 느낌이긴 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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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8 01:44
수정 아이콘
오르한 파묵이 드디어 "갑자기 사라져버린 내 첫사랑" 이야기를 벗어났나보군요. 포스트모던의 정점과도 같았던 <내 이름은 빨강> 덕분에 한국에도 나름 독자를 확보한 작가지만, 튀르키예에 대한 역사적-경험적 맥락을 외국 독자 입장에서 읽어내기에는 어려운 면도 많았고 저 같은 경우는 파묵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그놈의 사라진 첫사랑 모티프가 너무 반복되는 것 때문에 언제부턴가 손이 잘 안가는 작가가 되었지만... 그래도 후기를 보니 간만에 읽어볼만 하겠네요.
aDayInTheLife
22/09/08 07:45
수정 아이콘
뭔가 묘하게 아련한 느낌은 여전히 있긴 합니다. 크크크
튀르키예, 정확하게는 당시 정치적 문화적 이야기가 꽤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아무래도 제3자, 이방인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긴 하더라구요. 당시 민족주의나 세속주의나,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니까요.
숨고르기
22/09/08 09:10
수정 아이콘
대표적으로 [하얀성]만 해도 터키 중세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슬람 전통주의와 세속주의, 범유럽주의와 아타튀르크주의 사이의 뿌리깊은 갈등과 투르키예의 현실 정치 딜레마가 녹아들어있는 정수인데 우리나라 문학 평론가란 양반들은 거기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이 작품을 두고 다들 황당한 소리만 해대고 있더라구요. 소개 감사드리고 빨리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2/09/09 08:30
수정 아이콘
파묵의 책들 중에 <순수 박물관> 외에 말씀하신 첫사랑 같은 주제의 책이 또 있었던가요? 빨강, 검은, 하얀 시리즈를 한 10년 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한데 그런 주제를 반복하는 느낌은 아니어서 질문드립니다.
22/09/09 10:59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저 역시 사실 파묵을 꼼꼼히 읽었던 게 10년이 다 되가니까 좀 과장된 개인적 감상이긴 합니다. 주제의 반복이라기보다도 '사라진 첫사랑' 혹은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남성의 이야기라는 소재 쪽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네요 <눈>에서도 그렇고, <검은책>도 비슷한 모티프를 공유하구요. <새로운 인생>에도 그런 소재가 있었는지는 가물가물합니다. 파묵이 다양한 소재를 다루기는 하지만 저는 그 안에 있는 남성 주인공의 정념이나 과거에 대한 지나친 노스텔지어적 감수성, 이런게 하나의 모티프처럼 반복적으로 느껴졌거든요. 다르게 말하면 너무 비슷한 주인공이나 그의 감상성이 등장하는 것에 물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특히 <순수박물관>을 읽다가 그런 느낌이 너무 강해서 독서를 멈추게 되었다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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